#084
“…서도아!”
이겸은 눈앞의 광경에 멈칫하다 부리나케 도아에게 달려갔다.
자세히 보니 배상우는 눈동자의 초점이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도아를 조르는 손의 악력을 풀지 않았다. 호흡이 막힌 탓에 그녀의 얼굴은 피가 통하지 않아 붉게 질려 있었다.
“쿨럭…!”
배상우는 그 자세로 가만히 서서 요지부동이었다. 누군가의 이능에 당한 걸까. 이겸이 어떻게든 그의 손아귀에서 도아를 빼내려 했지만 악력이 몇 배는 강한 탓에 쉽지 않았다.
이대로는….
이겸은 검을 빼 들었다. 일순 도아의 눈이 커졌다. 붙잡혀 다 죽어 가는 주제에 차마 배상우는 공격할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이겸은 달랐다. 빠르게 판단했고, 망설임 없이 배상우의 손목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배상우는 그저 누군가의 이능에 당해 정신을 잃고 무작정 도아를 공격하는 중이었고, 이겸은 그 모습을 두고만 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는 죄가 없다. 하지만 서도아도 죄가 없었다. 그리고 둘 중 누군가를 선택하라면 이겸은 서도아를 고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리 배상우와 그간 친하게 지냈고, 그에게 감사한 일이 있다 해도 우선순위를 정하라면 서도아 쪽이 더 중요했다. 서도현과의 약속도 있으니 말이다.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챙길게.’
어쩌겠어. 했던 말은 지켜야지.
“콜록…! 켁, 콜록콜록!”
마침내 배상우의 손아귀 힘이 풀린 뒤 바닥에 쓰러진 도아가 트인 숨통 사이로 기침을 내뱉었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고,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아저씨가. 팔이…. 피, 피가.”
도아에겐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과 제 오빠를 돌보아 준 은인이다. 아저씨라 부르지만 실상은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성을 잃고 자신을 공격했어도 도아는 그에게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겨, 겸이 오빠. 아저씨. 어서 지혈해야….”
“서도아. 정신 차리고 일단 뒤로 물러서.”
이겸은 도아를 제 뒤로 보내며 배상우를 경계했다. 그만한 고통을 주었는데도 아직 눈에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정신을 차린 배상우가 제 손목에 난 상처를 보고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는 정 많은 인간이니 그간 함께했던 과거는 다 헛것이었냐고 따질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서도아를 죽이려 했으니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할 수도 있다.
원망이든 칭찬이든, 뭐든 상관없다. 배상우의 반응을 생각하고 일을 벌인 게 아니다. 이겸은 지켜야 하는 게 있었다.
설령 누가 원망을 하든, 칭찬을 하든 지켜야 하는 게 있었다.
자신이 도아를 챙기겠다 말했고, 데려왔다.
너만은, 너만은 살아야 해. 너는 살아야 해.
내가 이곳에 데려왔고, 책임져야 했다.
협회 습격 때 서도현이 그랬었나. 여기 있는 모두가 전멸해도 너는 산다고. 너만은 살릴 거라고.
그때는 가벼이 넘겼었다. 단순히 자신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하는 말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제야 서도현의 각오가 느껴졌다.
서도아는 여기서 죽으면 안 돼.
그녀가 졸랐다지만 서도현은 반대했다. 그를 설득시켜 도아를 이곳에 끌고 온 건 자신이었다.
지금만큼은 서도현의 심정을 빈틈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이 배상우에게 미움받더라도. 도현이 세간에, 자신에게 미움받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이겸은 도아를 이련으로 데려왔고, 도현은 이겸을 래터로 데려왔다.
도아가 죽을 뻔했고, 이겸에겐 그녀를 지킬 책임이 있었다.
협회에서 이겸이 죽었을 때, 도현은 이겸을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평행이론이다.
서도현이 이해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애써 그를 닮아 가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자꾸만 그를 이해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치채고 보면 그가 하는 짓을 자신도 똑같이 이행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배상우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
똑똑- 똑똑-.
내색은 안 했지만 재우는 크리처 사육장의 위치 추적 같은 일에 깊게 관여되고 싶지 않았다.
목숨의 위협이라거나 그런 이유와는 조금 궤를 달리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래터에 1인분 몫을 하고 싶어 꽃도 열심히 만들고, 추적에 대한 작전도 함께 고민하며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물론 그 이후 자신의 상태를 알아챈 서도현이 방에 가끔 들러 괜찮은지 확인도 하고, 이 일에서 빠져도 된다고 권유해 주기까지 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그러겠다고 한 뒤 한결 기분이 나아졌지만, 자꾸만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그날 오후에는 래터의 맞춤 정장을 착용해 보고, 저녁을 왕창 먹은 뒤 장시간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어느새 오후 8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똑똑- 똑똑-.
좀 더 오래 잘 수도 있었지만 반복적으로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때문에 깼다.
똑똑- 똑똑-.
지치지도 않나.
결국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겸이 형이라면 몇 번 노크하다 얼마 안 가 자리를 떴을 테고, 도현이 형이라면 여분의 카드 키 중 하나로 그냥 열고 들어올 테다.
그리고 서도아의 노크 소리라면 똑똑이 아닌 쾅쾅이겠지, 그러면서 “차재우! 문 열어!”라고 진작에 소리치고도 남을 텐데 이건 그 어느 것도 아니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헛! 혹시 상우 아저씨인가?’
그럼 더더욱 열어 주기 싫은데….
재우는 누가 자기 방에 자꾸 노크를 한다며 래터 단체 메시지 방에 연락을 넣은 뒤, 누가 제 방까지 와서 장난을 치는 건지 범인을 물색했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똑똑-.
“저…저기요오. 계시나요….”
이번에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묻는 말이 들려왔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
재우는 문의 안전 고리를 건 후, 슬쩍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웬 멀쩡하게 생긴 남성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아까부터 자꾸 문이나 두드리고.”
“전 이련에서 연수 받는 기술계 헌터인데 잠깐 부탁할 게 있어서 들렀어요.”
“무슨 부탁이요?”
“그 전에 이것 좀 풀어 주실 수 있나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방에 들어가도 될까 해서요.”
“…….”
재우는 잠시 고민하다 거절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요. 다음에 찾아오세요.”
재우는 황급히 문을 닫은 뒤 얼른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저! 저기!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래요! 잠깐만요!”
문 너머로 저를 재촉하는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도현이 받질 않아 이겸에게, 마지막으로 서도아에게도 통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불통이었다.
쿵쿵- 쿵쿵-.
“저 진짜 급해서 그래요!”
이상하다. 왜 다 전화를 안 받지.
“…….”
재우는 문 밖을 바라보다 다시금 슬그머니 다가가 문을 열었다.
“저 진짜 죄송한데 다음에 찾아오시는 게….”
“수상한 사람처럼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그때 남자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사죄했다.
“…네?”
“그… 막무가내로 노크하고, 걸쇠도 풀어 달라 하고 수상한 사람처럼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급한 일이라…. 이거 안 푸셔도 되니까 여기서 대화만 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문은 잠가도 상관없습니다. 목소리는 들릴 테니까요. 아니면 제가 편지를 작성해 드리는 방법이든…, 뭐든. 뭐든 좋으니까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의외로 성실하게 사과하는 남자에 재우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순식간에 수상한 자에서 바람직한 자로 이미지가 쇄신되었다.
“아…아뇨. 저도 죄송해요.”
“아닙니다. 제가 의심할 만한 짓을 한걸요.”
“…네에.”
“제가 꼬옥 진짜, 급히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고 싶은 게 있어서 좀 과격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따로 편지를 적어 문 앞에 놔둘 테니 그거라도 읽어 주실 수 없을까요.”
저자세로 부탁해 오는 그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재우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라면…. 네.”
글자 읽는 게 뭐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 정도는 읽어 줄 수도 있었다.
“넵! 그럼 지금 작성해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곤 남자가 오히려 얼른 문을 닫으라며 재우를 재촉했다.
고개를 기웃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온 재우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셋은 나 빼고 어디 간 걸까, 연락 한 통이 없네.
단체 메시지 방도 고요했다. 문자가 하나 왔길래 확인해 봤는데 이겸도, 도현도, 도아도 아닌 남궁산하뿐이었다.
[재우야, 무슨 일 있어? 누가 두드리는데? 생김새는? 내가 신고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