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아….”
이겸은 일부러 눈알을 데굴 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고 언제 봤다고 이리 반가워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저 협회의 권상혁이요!”
권상혁은 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는 종잇조각이었다. 이겸은 거절한 후에 껄끄러운 감정을 한가득 담아 대답했다.
“네. 기억합니다.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아, 저는 이번에 연차 썼는데, 이참에 호신용이나 하나 만들어 둘까 해서 들렀어요.”
크리처도 무서워하는 사람이 무슨 호신용이래. 권상혁은 속도 없이 해맑게 주절주절 제 상황을 나열했다.
“이번에 총기류로 새로운 무기가 나왔다더라고요. 그거 보러 왔어요.”
“굳이 총을요?”
아무리 그래도 총보단 칼이 낫지 않나? 이겸이 의아해하자 그가 당차게 말했다.
“제 이능으로는 총이 더 좋은 무기거든요.”
“아, 그렇다면야.”
그의 이능이 뭔진 몰라도 이겸이 거기까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만나서 반가웠고, 다신 보지 말자는 심정으로 제 옆의 서도현에게 눈짓했다.
평소에는 권상혁이나 노정규를 잘만 쫓아내더니 지금은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는 게 어이없었다. 하지 말란 건 기어코 하려 하고, 해 달란 건 해 주지 않았다.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서도현은 자신을 욕하는 이겸의 속내도 모르고 가만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어이! 얼른얼른 안 따라오고 뭐 해?”
그때 앞서가던 배상우가 소리쳤다. 이겸은 옳다구나 하고 가벼운 인사를 건넨 후, 그의 뒤를 따라 얼른 움직였다.
그들이 들어선 2층 건물 중, 현재 머물고 있는 1층에서는 각종 무기류를 판매하고 있었다.
옷에도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듯, 헌터 무기에도 브랜드가 있다. 저희 브랜드는 누구누구가 제작한 무기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가 주요 홍보 문구였다.
파는 물건만 조금 난폭할 뿐이지 일반 백화점과 다를 바 없었고 헌터들도 이곳을 ‘이련’, 내지는 ‘백화점’이라 부른다 했다.
“형, 저분 협회 사람이죠?”
뒤따라오던 재우가 물었다.
“응.”
“저분이랑 친해요?”
“아니. 안 친해.”
권상혁과 친하냐고? 백번을 질문해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겸이 단호하게 말하자 재우는 그렇구나, 하며 태평히 넘겼다.
2층으로 올라가자 이곳은 무기가 아닌 각종 옷들이 즐비했다. 1층은 무기, 2층은 옷을 파는 곳인가. 그러고 보니 여기에 도착하기 전, 차를 타고 오던 길에 배상우가 어느 한 공장을 가리키며 이련의 제조 공장이라고 설명했었다. 여기 있는 전부가 그 공장에서 나온 물품들인 듯싶었다.
좀 더 구석진 곳까지 배상우를 따라가자 사무실처럼 생긴 곳이 나왔다. 벌컥,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자기 열린 문에 화들짝 놀란 한 남성이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 위로 엎질렀다.
“앗…. 뜨뜨뜨…! 아, 아니. 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 우리 애들 무기 하나씩 맞춰 줄 겸 나들이 왔지.”
배상우는 그를 윽박지르며 한가로이 소파에 기대앉아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
관리소장으로 보이는 그는 엎지른 커피를 슥슥 닦아 내곤 슬며시 방문객들을 관찰했다. 언제나 정장을 입고 있는 자경단과 다르게 차림새는 가지각색이었다.
“자경단은 아닌 듯하고….”
“어. 그냥 나랑 친한 애들이야. 요즘 잘나가는 무기 없냐?”
“잘나가는 무기야 많죠. 어떤 종류를 찾으시는지?”
“너희 나가서 원하는 거 하나씩 골라 와 봐.”
자신은 관리소장과 대화를 해 보겠다며 얼른 나가라는 배상우에게 이겸이 곤란을 표했다. 딱히 원하는 무기는 없는데. 그리고 무기를 사 준다는 말이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말인지 진심이 담긴 말인지도 아리송했다.
게다가 이곳에는 관리소장이 아닌 김이성을 만나러 온 것 아닌가? 왜 여기에….
그때 서도현이 바뀐 소장실 내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분이네요. 이전 소장님은요?”
배상우를 따라 부산에 자주 내려왔던 미성년자 시절 이후로 이련은 처음이었다. 갓 성인이 되어 래터를 창설했을 땐 자경단에서 쓰던 무기를 대충 사용했었고, 그러다 이곳에서 연수를 받고 온 남궁산하가 제작한 무기만 사용했다. 소장이 바뀐 것도 모를 만했다.
“어. 이전 소장은 몇 년 전에 진작 은퇴했지.”
현 관리소장은 배상우의 설명에 수긍하는 서도현을 힐끔 살피며 조심스레 여쭸다.
“저…. 선생님, 이분은?”
“아, 이놈은 자주 안 올 애니 이름 같은 거 외워 둘 필요 없어.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고. 너흰 이만 나가서 구경이나 하라니까?”
배상우의 으름장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겸은 순순히 나가 주는 도현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사무실 문 옆에 붙은 2층 피난 안내도를 흘기며 스쳐 지나갔다.
“예호 마스터 만나러 온다면서 관리소장님은 왜 만나시는 거지? 근데 저희 이제 뭐 해요? 1층 구경?”
“겸사겸사 할 말이 있으시겠지. 우리는….”
투덜거리는 도아에게 답해 주던 이겸이 멈칫했다. 그러게. 우린 뭐 하지? 정말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 서도현을 흘끗 쳐다봤다. 그는 입매를 위로 늘였다.
“뭐하긴, 옷 사기로 했잖아.”
아, 아저씨의 말을 들어 사무실을 나선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군.
“옷이요? 무슨 옷? 저 저번 주에 서도아랑 쇼핑 왕창 했는데.”
“그거 말고.”
재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서도현은 성큼성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별수 없이 그를 뒤따라 어느 정장 브랜드점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자경단의 정장은 판매부터 수선, 세탁까지 모두 이곳에서 관리하기에 서도현도 한때는 익숙했던 가게 중 하나였다.
“겸아.”
도현이 이겸을 앞세웠다. 척 보아도 비쌀 것 같은 외관에 이겸이 뜸 들이다 직원에게 말했다.
“아, 네. 옷…. 정장 맞추러 왔습니다.”
제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서도현이 사 준다는데 거리낄 건 없지만 이런 곳은 생전 처음이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한 분만 맞출 거냐는 직원의 말에 답을 구하듯 도현을 쳐다봤다.
“한 명. 난 필요 없어.”
“네에!? 저희는요!”
도현의 뒤에 선 두 쌍의 눈동자에 욕망이 가득했다.
“학생은 교복이 정장이잖아.”
“저희도 곧 졸업이거든요!”
“아직 1년도 더 남았잖아.”
도현을 대신해 이겸이 말려 봤지만 도아와 재우는 자신들도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불만을 내뿜었다. 결국 제 사람들에게는 부처가 따로 없는 도현이 설핏 웃으며 허락했다.
“너희도 골라.”
“와! 신난다!”
학생들은 헤벌쭉해져서 어떤 게 잘 어울릴까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옷 구경을 시작했다. 이겸은 눈살을 찌푸리곤 퉁명스레 물었다.
“너 부자냐?”
제 돈 자기가 쓴다는데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더군다나 자신도 서도현이 사 준다길래 고르는 주제이지만 비싸 보이는 정장을 세 벌이나 단번에 구매한다는 게 내심 마음이 쓰였다. 아무리 그라도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어 자그마한 인정을 부렸다.
“애들 사 줄 거면 난 안 사 줘도 돼.”
다음에 돈 모아서 직접 사지 뭐. 중얼거리는 이겸에 도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데 쓰려고 모은 건데. 너도 어서 가서 골라. 그리고 무기도 보러 가자.”
“…….”
이겸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사 주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자신도 받는 입장이기에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하고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어디 니트류는 따로 없나. 좋은 게 하나 있으면 강태하 선물로 사 갈까도 잠시 생각했지만, 그가 헌터도 아니고 역시나 이런 크리처 재질로 만든 옷들은 좀 그렇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진열된 옷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 재우와 도아의 치수를 확인한 직원이 이겸에게 다가와 치수를 재었다.
선호하는 색상, 옷감, 넥타이 등 여러 가지를 묻는 걸 보니 진열된 것 중 하나를 사는 게 아니라 아예 맞춤 제작을 하는 듯싶었다. 그럼 더 비싸지지 않나, 걱정하다가 이내 서도현 돈인데 내가 왜…, 라는 심정으로 애써 관심을 껐다.
“1층에 있나 했더니 여기서 쇼핑하고 있었냐.”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배상우가 바지 주머니에 삐딱하게 손을 넣으며 걸어왔다.
사이즈를 재기 위해 직원 앞에 서서 양팔을 빨래 건조대처럼 일자로 벌린 이겸이 물었다.
“소장님과 할 말은 끝나셨어요?”
“어. 물어봤는데 이성이는 지금 여기 없다더라.”
“그거 물으려고 하신 거예요? 그보다 여기 없으면 저희는….”
“어디냐고 문자로 자꾸 추궁해 대면 이성이도 낌새를 눈치챌 거 아니야.”
습격범으로 단정 지은 것도 아니지만 조심히 굴어 나쁠 건 없었다.
“무슨 볼일 있다며 같이 온 자기 신참이랑 무기 제작 의뢰하고 어디 갔대. 아마 나흘 후엔 찾으러 다시 올 거라는데.”
신참이라면 노정규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들이 돌아올 나흘 동안 자신들도 이 주변에 머물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희도 사일 동안 꼼짝없이 부산에 있어야겠네요.”
날짜를 여유롭게 잡고 오길 잘했군. 지난날의 자신을 칭찬하며 그동안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계산했다.
배상우는 버릇처럼 담배를 꺼내려다 실내인 걸 깨닫고 담뱃갑에 다시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이 근처에 기숙사 있으니까 거기 빈방 달라고 하면 돼.”
이련에 연수 온 기술계 쪽 헌터들이 쓰는 기숙사였다. 물론 숙박 비용은 지불해야겠지만 호텔처럼 만들어 놓아 일반 헌터들이 놀러 올 때도 자주 머물곤 하는 숙소 중 한 곳이었다. 호텔같이 꾸며 놓아 그리 장소가 나쁘지 않았다.
마침 직원이 줄자를 거두며 자신들의 정장도 사흘 이내에 완성된다고 언질을 주었고, 맞춤 제작에 그것도 세 명분인데 고작 사흘이면 된다는 소식에 이겸이 순수하게 놀랐다.
“여긴 뭐든 빨리 만들어. 재료만 있으면 뭔들 못 만들까.”
학생 둘이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그럼 저희 놀러 가요!”
“여기 근처에 맛집이 어디 있더라! 서도아, 찾아본 곳 있어?”
그렇게 사흘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낼지 차츰 계획을 세워가고 있을 무렵.
“…아.”
이겸은 불현듯 짧은 탄식을 뱉으며 제 눈을 감쌌다.
약간의, 아주 약간의 세로로 된 빛이 들어왔다.
거리가 멀어 그런지 전파가 잘 닿지 않은 것처럼 화질이 좋지 않았고, 그 조막만 한 빛 사이로 제각각의 괴이한 형태들이 보였다. 크리처. 단수가 아닌 복수. 크리처들. 열댓 마리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 사람. 눈물 젖은 사람. 무어라 부르짖고 있었다. 아마….
“살려 주세요.”
이겸은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입 모양을 따라 중얼거렸다.
화끈-. 화상처럼 통증이 밀려오며 시야가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