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윤이겸 학생. 그래서 방금 뭐라고 했죠?”
싸늘했다. 이겸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 앞의 그가 묻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해서가 아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제 귀가 잘못된 걸까 의심이 들 때 하는 그런 유의 질문이었다.
“그게….”
“놀러는 종강 후에 가도 충분하지 않나요?”
어렵사리 열렸던 입술이 냉큼 다물렸다.
“윤이겸 학생은 성적도 좋고, 강의 시간에 집중도 해서 그렇게 안 봤는데…. 됐습니다. 결석 처리로 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참고로 대리 출석 안 하나 지켜볼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만 나가 보세요.”
감사할 일이 아닌데도 감사를 건네며 교수 연구실을 나섰다. 축 처진 어깨는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까지 해서 꼭 가야겠어?”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태하가 못마땅한 낯빛으로 물었다.
“간다고 말했는데 가야지.”
나 혼자만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쯤 서도아와 차재우도 체험 학습 보고서를 작성 중일 테다.
그리고 방금은 실패했지만, 교양 2개는 출석 인정을 허가받았다. 꿀강의로 소문난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한 한 보람이 여기서 나왔다.
이겸은 생각보다 학업에 진심이었다.
“다음은 누구 교수님이더라.”
기억 속 강의 시간표를 되새김질하며 지금쯤 연구실에 있을 교수님을 찾아 헤맸다.
강태하가 제게 집중하라며 이겸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누구랑 가는데?”
“항상 놀던 애들이지.”
“그 ‘개새끼’라 저장된 분?”
“응. 305호에 가자. 그 교수님 지금 연구실에 계실 거야.”
계단을 오르는 이겸을 강태하가 붙잡았다.
“나도 가면 안 돼?”
“…뭐?”
“네 친구인데 내가 모른다는 게 웃기잖아. 이참에 좀 친해져 보려고.”
이겸이 멍하니 답했다.
“그게 왜 웃겨. 서로 모르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강태하도 이번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쪽도 너랑 자주 만나는 사이 같은데 서로 알고 지내면 좋잖아.”
“…….”
단순 여행을 가는 거라면 이겸도 괘념치 않고 래터에게 의견을 물어봤겠지만, 이번은 일로 가는 거라 아무리 강태하라도 조금 난감했다.
혹여나 그가 좋지 못한 일에 휘말리면 어쩐단 말인가.
뭉그적거리며 답변을 미루고 있을 무렵,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잠깐.”
낯선 번호였다. 원래라면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지만 그걸 핑계로 강태하에게 기다리라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여긴 ××고등학교인데요, 혹시 윤이겸 보호자 되시나요?
××고등학교라면 차재우와 서도아가 다니는 학교였다.
강태하에게 중요한 전화라며 언질을 준 후 구석으로 향해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네. 윤이겸은 맞습니다.”
보호자는 아니지만.
- 아, 안녕하세요! 저는 차재우 학생 담임 강혜정이라고 합니다. 재우가 다른 학생과 사소한 물의를 일으켜서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는 중인데 받지를 않으셔서요. 혹 시간 되시면 잠시 학교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
재우가 물의? 부모님이 받질 않아? 그렇다고 나한테 전화를 왜….
이겸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한 시간 뒤면 자신도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심지어 방금 혼나고 나온 교수님의 강의였다.
‘이걸 어쩌지.’
이겸이 답이 없자 담임이 재차 물었다.
- 혹시 바쁜 일이 있으신가요?
자신이 못 간다 하면 또 다른 보호자를 찾아 연락을 돌리려나, 서도현에겐 연락을 해 본 건가? 아니면 학교 내부에서 알아서 해결하려나, 생각 회로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내 ‘다른 학생과 물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학생은 보호자를 불렀겠지, 라는 판단에 혼자 의기소침해 있을 차재우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진짜 가족이 된 것도 아닌데.
- 바쁘시다면 저희 선에서….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 앗, 넵. 그럼 2학년 교무실로 찾아오시면 되세요. 중앙 현관을 통해 2층으로 올라오시면 바로 앞에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겸이 밀려오는 짜증에 머리칼을 흩트렸다. 미치겠네. 출석 인정 처리 부탁하러 가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차재우는 또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통화를 마친 이겸의 기분이 가라앉자 강태하가 다가와 물었다.
“급한 일 있어서 가 봐야 돼.”
“수업은?”
“…빠져야지.”
이후 5층 과방으로 올라가 제 짐을 챙겼다. 그 뒤를 강태하가 따랐다.
“다음 강의 누구 교수님인진 알지?”
“어쩌겠어.”
“무슨 일인데 그래. 같이 가 줘?”
“너도 수업이잖아.”
“너보다 중요할까.”
이겸은 걸음을 멈춘 채 그를 빤히 바라봤다. 긍정 한 마디라면 단박에 함께 가 줄 것 같았지만 이건 제 일이었다.
“미안.”
“…….”
“그리고 부산도 같이 못 갈 것 같다. 그 점도 미안. 나도 사정이 있는지라.”
미안함에 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급히 사라지는 이겸에게 강태하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전에 윤이겸이 제게 물었을 때 자신이 한 답변이었다. 그는 기억력도 좋고 행동력도 빨라서 한번 들은 건 잊지 않고 나중에라도 꼭 써먹었다.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입 안이 씁쓸했다.
***
이겸은 가는 길 편의점에 들러 박○스를 사 들고 교무실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차재우 보호자….”
“형! 여기요!”
차재우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뭐가 반갑다고 손을 흔드냐. 천천히 다가가던 중 차재우의 한쪽 뺨이 탱탱 부어오른 걸 발견해 냉큼 가까이 가 얼굴을 살폈다.
“너 얼굴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다른 데 다친 곳은 없어?”
교복을 살피니 살짝 헝클어졌지만 다행히도 뺨을 제외하고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너도 때렸…, 아니다. 맞고만 있었어? 누가 이랬는데?”
“…저기요. 이미 보호자 와서 상담하고 있어요.”
재우가 소심하게 저를 때린 이를 향해 손짓했다. 상담실이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교무실 안에 놓인 소파 주위로 패널을 세워 프라이빗하게 만든 곳이었다.
이겸은 빠르게 기척을 살폈다. 물은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이도.
“서도현?”
이겸의 중얼거림에 차재우가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피했다.
“너 서도아랑 싸웠냐?”
“아니, 그게에….”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서도현에게 전화가 갈 만도 한데 차재우가 자신을 고른 이유가 있었다. 걔는 도아 보호자로 이미 왔으니까.
이것들이 누구는 사무실에서 허구한 날 싸워 댄다고 난리를 치더만, 정작 자기네들은 학교에서 싸워?
권태롭던 눈매에 날이 서려 할 때쯤, 누군가 이겸을 불렀다.
“저… 재우 보호자님?”
“안녕하세요. 재우 때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선 이거라도….”
이겸은 서둘러 사 온 박○스를 건넸다.
“아뇨! 아닙니다. 저희 이런 거 받으면 큰일 납니다.”
“그럼 그냥 여기 놔두고 가겠습니다. 필요하실 때 꺼내 드세요.”
“아이, 그러시면 안 되는데…. 근데 재우와 관계가 어떻게….”
되게 젊어 보인다며 교사가 질문했다.
“제 사촌…!”
“아는 형입니다. 재우 부모님과도 자주 연락드리고요. 재우가 전화할 사람이 없어 절 찾았나 봅니다.”
이겸이 서둘러 재우의 말을 가로챘다.
“아아, 네.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연락을 안 받으셔서 걱정했거든요.”
“네. 상황 설명해 주시면 제가 잘 새겨듣고 부모님께 따로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잠시만요.”
아는 형이지만 아무래도 보호자 자격을 얻은 듯싶었다. 재우 부모님은 타 지역에 있다고 들었는데, 담임은 모르시나?
이내 재우의 담임은 도아의 보호자인 서도현과 잠시 대화를 하러 패널 뒤로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차재우도 헌터인데 일반인 고등학생과 싸우다 상처가 생길 리 없었다. 눈에 띄게 부은 재우의 상처에 놀라 잠시 사고가 안 됐을 뿐, 곰곰이 떠올리면 이 뺨을 이렇게 만들 사람은 당연히 서도아밖에 없지 않는가.
차재우와 서도아가 같은 반이라 했지. 담임이 바쁘시겠네.
담임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던 중, 재우가 이겸의 옷소매를 붙잡고 소곤거렸다.
“왜 사촌 형이라고 안 해요?”
“뻔히 들킬 거짓말을 왜 해? 그보다 너희는 왜 싸웠는데?”
“…서도아 완전 난폭해요. 전 맞기만 했어요.”
“그래서 왜 싸웠냐니까?”
“그게….”
재우가 우물쭈물거리며 답했다.
체험 학습 보고서를 작성하던 도중, 같은 반 학생 남녀 두 명이 같은 날짜에 같은 장소로 체험 학습을 가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니 네가 다른 장소로 적어라, 아니다 난 이미 작성 완료했다 네가 바꿔라, 하며 다툼이 일어났단다.
상황을 들은 이겸이 꿀밤을 날렸다.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우고 있어.”
“우…. 저희한텐 완전 중요한 거거든요!?”
“네, 그러세요.”
태평한 이겸의 답에 재우가 억울해하며 중얼거렸다.
“저 입 안에 피도 나는데 형 때문에 이제 이마도 아파요.”
“도아가 진심이었나 보네.”
그렇지. 도아 성격에 대충 작성했을 리는 없고, 여백 없이 빽빽하게 열심히 작성한 체험 학습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라면 나라도 화나겠다. 그 귀찮은 걸 어떻게 다시 해.
“서도아 어릴 땐 나름 귀엽기라도 했지, 지금은 완전… 어휴, 말도 마요.”
재우는 부어오른 제 볼을 부여잡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재우랑 보호자님,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담임이 패널 뒤에서 이겸과 재우를 불렀다.
“네.”
안내받은 쪽으로 향하자 소파에 앉아 있는 서도현과 그 옆의 부루퉁한 도아가 보였다.
도현은 이겸을 보더니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재우 보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