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66)화 (66/102)

#066

이겸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난 괜찮….”

“말로 설명하긴 그렇고. 상우 아저씨한테 부탁해 놓을게. 네가 직접 읽어 볼래?”

“아니. 그렇게까지는 괜찮….”

“내일 볼래?”

서도현은 말을 싹둑 잘라 대며 배상우에게 연락을 취했다. 결국 이겸은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원래도 한배를 타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도 같은 배를 타려면 미리 조심하라고 알려 주는 건가? 둘의 앞에서 그 얘기를 언급하지도 않을 거고, 남에게 말하고 다닐 것도 아니라 굳이 상관은 없는데.

“저희 왔어요-!”

“두 분 화해는 하셨어요? 아이스크림 사 왔는데 드실래요?”

“바보 차재우. 딸기 맛은 내 거니까 따로 빼놔.”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지.”

“좋아. 너 팥 좋아한다 했지? 촌스럽게…. 팥이 어디 있더라, 내가 먼저 집어야지.”

“아, 잠깐만…!”

두 사람이 추가된 것뿐인데 사무실이 북적거렸다. 이겸이 팔을 뻗으며 외쳤다.

“초코는 내 거야. 초코 사 왔으면 넘겨.”

“겸이 형 원래 딸기파지 않나?”

“오늘은 초코파야.”

재우가 던지는 초코 아이스크림을 받으며 말했다.

“서도현 너는?”

“나?”

“넌 무슨 맛 먹냐고.”

이겸의 질문에 그가 동작을 멈췄다.

“응?”

입씨름을 벌이던 도아와 재우도 조용해졌다.

“…무슨 맛 좋아하냐고. 뭐, 난 묻지도 못해?”

그 침묵에 괜스레 민망해져서 툴툴거리자 도현이 대답했다.

“난 아이스크림 별로 안 좋아해.”

“…그래?”

아이스크림은 사무실에서 자주 먹는 음식 중 하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도현은 늘 아이스크림31 체인점에서 사 온 것도 몇 스푼 뜨다 말았고, 하드바를 먹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겸이 오빠, 그걸 이제 안 거예요?”

“…….”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알아야 돼? 쟤가 뭘 좋아하는지까지? 아니, 아니야. 윤이겸. 친해지려고 노력하기로 했잖아. 서도현은 내가 좋아하는 컵밥 종류까지 알고 있는데….

이겸은 저도 모르게 삐뚤어지려는 생각을 바로잡고 도현의 한쪽 어깨를 두드렸다.

“그…, 미안? 아이스크림 안 좋아한다고? 그래…. 이제부터 외워 둘게.”

“…세상에.”

도아는 아이스크림이 담긴 비닐봉투를 떨어트렸다. 원래라면 빠른 몸동작으로 떨어지려는 음식을 낚아챘어야 할 재우도 이겸의 태도에 놀라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화해. 화해했어? 겸이 오빠가? 화해? 화해를 했다고? 누구랑? 우리 오빠랑? 진짜?”

서도아가 염불을 외듯 중얼거렸다.

“내가 뭘. 너희 귀신이라도 봤냐? 반응들이 왜 저래?”

“네가 나한테 잘해 줘서 놀랐나 봐.”

“…이 정도로?”

고작 무슨 맛 좋아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이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그동안 얘한테 어떻게 대했길래 이 정도 반응을 보여?

“회식! 오늘이 며칠이지? 기념. 기념일이다! 저희 오늘 회식해요!”

모든 사고 회로가 음식으로 종결되는 재우가 양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회식이다!”

곧 있으면 풍악을 울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

이내 그는 뚱한 얼굴을 한 이겸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고 이마에 손을 올려 열 체크도 마쳤다.

“뭐지? 겸이 형 어디 아프나? 그건 아닌데? 아무튼! 형 오늘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회식! 겸이 형, 오늘은 형의 날이에요! 회식해요! 매년 이날 회식하는 거예요!”

무슨 직원이 사장보다 회식을 더 좋아해.

도현이 입가에 웃음을 걸치며 응답했다.

“그럴까? 겸아, 먹고 싶은 거 있어?”

“…회식 좀 그만해. 지겹다 이제. 난 빠질래.”

눈을 가느다랗게 뜬 도아가 이겸의 팔꿈치를 쳤다. 눈가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오빠 때문에 회식하는 건데, 오빠가 빠지면 어떡해요. 근데 둘이 어쩌다 화해했어요?”

‘아주 남매가 쌍으로….’

차재우가 수긍하며 물어 왔다.

“그러게요. 맨날 다투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대요? 아무튼 사이좋아 보이고 좋네요!”

“…….”

이겸은 물끄러미 학생 둘을 바라봤다. 자신들의 화해가 무척 기쁜지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그래도 다 큰 성인들이 허구한 날 사무실에서 말다툼을 벌이는데 둘도 굳이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눈치가 보였겠지? 애들 앞에서 너무 싸워만 댔나,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근데 좀 아쉽긴 하다.”

“그러게. 둘이 다투는 거 재밌었는데.”

“산하 형 있었으면 또 화해 원정단 꾸려서 겸이 형네 집 놀러 가는 거였는데.”

…화해 원정단? 이겸은 순간 들었던 생각들을 일절 취소했다. 이것들이 사람 싸우는 걸 즐기고 있어.

뭐라 한소리를 하려던 순간, 도현이 팔목을 잡아 왔다.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하아, 거기 학생들. 그만 떠들고 빨리 준비나 해. 회식이나 하러 가게.”

도아와 재우가 눈을 반짝였다.

“네!”

회식 장소인 식당에서도 이겸은 도아를 평소대로 대했다. 과거를 알고 나서 태도가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 일이 도아에겐 트라우마로 남았을 텐데, 지금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그 점은 다행이네.’

이겸은 장하다며 고기를 집어 도아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응? 갑자기 왜요?”

“많이 먹고 쑥쑥 크라고.”

“저 차재우랑 키 비슷한데요. 좀 더 클지도.”

고기를 자르지도 않고 우걱우걱 집어넣은 차재우가 투덜거렸다.

“뭐? 가만히 있는 나는 왜 끌어들여?”

“좀 천천히 먹어. 네가 얼마나 빨리 먹었으면 오빠가 나한테 고기를 주겠냐?”

“…천천히 먹고 있는 건데.”

진심으로 빨리 먹으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빨라지는 건데. 차마 묻지 않기로 했다.

그날은 그렇게 회식을 마쳤다.

***

다음 날이 밝자 이겸은 도현과 함께 전날 찾아갔던 자경단의 본거지로 다시금 향했다. 앞에는 배상우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서도현이 차 창문을 내렸다.

“여, 서도현이.”

“안녕하세요.”

“너도 들어올래?”

도현은 답도 없이 조수석의 이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리려던 이겸이 멈칫하고 물었다.

“왜?”

그가 눈을 접고 예쁘게 웃었다.

“기다리기 심심하니까 얼른 갔다 와.”

“뭐래.”

이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음, 노력 중인 거 맞나? 여전히 까칠하네.’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차에서 내린 이겸이 문을 닫은 후 열린 차창을 통해 중얼거렸다.

“금방 올 테니까 까까라도 사 먹고 있어.”

“…….”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잘해 주려고 노력 중인 것 같긴 한데, 방법이 좀…, 아이 다루는 것 같지 않나?

꼭 도아와 재우에게 할 법한 행동들이었다.

“근데 도현이 그놈은 왜 그걸 보여 주라는 거지? 상관은 없다만. 아니, 상관이 있지. 외부인에겐 유출 금지인데.”

배상우가 제 집무실로 안내하며 중얼중얼 혼잣말했다. 그 뒤를 따라붙은 이겸이 물었다.

“그래서 봐도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크흠! 그놈 동의도 있고 해서, 내 특별히 보여 주는 거니까 어디 가서 봤다고 함부로 떠들거나 그러면 안 된다.”

“네. 어차피 말할 곳도 없어요.”

집무실에 도착해 배상우는 곧장 4월 5일 사건 일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이겸은 어색한 손길로 파일을 더듬었다.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것도 본인 허락하에.

“커피? 차?”

“오늘은 커피요.”

“거 취향 한번… 메뉴 통일이 안 되네. 난 오늘은 차인데.”

“차도 좋아요. 다 잘 마시니까 편하신 대로 주세요.”

배상우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커피를 타 주었다. 어차피 커피로 줄 거면서 왜 툴툴거리신 거람.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커피를 타는 동안 이겸은 페이지를 넘겼다. 앞 장은 어제 본 내용이지만 재차 읽어 내려갔다.

“…….”

이걸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는 마음 반과 서도현이 봐도 된다고 했으니, 하는 마음 반이 충돌했다.

이내 가장 큰 피해자인 도아에겐 허락도 못 받았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라는 걱정도 들었지만 손은 어느새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집무실엔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

건물에서 나온 이겸이 서도현의 차에 올라탔다.

“금방 왔네?” 

“금방 읽었으니까.”

“소감은?”

“뭐 좋은 일이라고 소감까지 말해.”

도현은 검지로 핸들을 툭툭 두드리며 운을 떼었다.

“도아는 충격이 커서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해.”

“그래.”

사건 일지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피해자의 심신이 불안정해 더 이상의 정황 조사는 불가하다고.

다 이겨 내서 그렇게 해맑은 줄 알았는데, 아예 기억 속에서 그 사건을 도려 낸 것이었다.

“…그 자경단원은, 잡혔고?”

“내가 죽였지.”

그 자경단원은 탐욕을 참지 못하고 블러드 헌터에게 피를 받고, 그와 결탁하는 대가로 서도아를 팔아넘기려 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남매 둘이서 자랐고 했는데, 그 분노는 참지 못할 만했다.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이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생했네.”

“도아가 아무것도 기억 못 해서 상황이 좀 흐지부지하긴 한데, 그래도 복수는 했으니까.”

사건 일지를 보면 자경단 전원이 움직여 도아를 납치한 놈은 물론이고, 그에 일조한 ‘델로’라 불리는 블러드 헌터의 단체 하나를 전멸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날은 그간 배상우를 앞에 내세우고 명령만 내려 오던, 그저 존재만 했을 뿐인 A가 활동했던 날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