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주승태와 대화한 이후로 이겸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 있던 내 제육불고기 컵밥 어디 갔어?”
“형, 그거 제가 먹었어요. 마파두부 컵밥으로는 성에 안 차서.”
재우가 손을 들며 자진신고했다.
“윤이겸, 내 거라고 이름도 번듯하게 적어 놨는데.”
“에이, 사내 용품에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나요?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지.”
이겸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재우를 믿고 선반 위에 대놓고 올려 둔 제 잘못이었다.
언제나 서서남매가 사 와 구비해 두는 거지, 제 돈으로 구매한 건 아니라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인 건 맞긴 하지만. 내일 먹어야지, 하고 고이 이름을 적어 놔두면 재우가 이미 먹어 치우고 없었다.
옆에 다른 컵밥들도 많은데, 그중 ‘윤이겸’이라 검은 네임펜으로 표기해 놓은 걸 콕 집어 골랐다면 의도가 다분한 거 아닐까.
“저희 왔어요.”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남매가 도착했다. 서도현은 말없이 검은 봉지을 이겸에게 건넸다.
“뭐야?”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그토록 찾던 제육불고기 컵밥이었다.
“좋아하잖아. 지금쯤이면 재우가 먹었을 것 같아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을 만졌다.
이겸은 잠시간 그를 쳐다보다가 묵묵히 컵밥 포장지를 깐 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서도현은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이런 쪽으론 잘 챙겨 주었다. 사무실에 뭐가 떨어졌다 말하면 바로바로 구비해 두고, 멤버들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눈에 익혀 둔다.
저번에도 자신이 주승태 일로 망설이니 지인을 찾아가서 부탁해 만나게 해 주고. 이런 점이 참….
“짜증 나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서 싫어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다정히 대해 주는 면모가 보이면 혹하고 만다.
“형? 제가 컵밥 먹어서 화났어요?”
이겸의 중얼거림을 들은 재우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어…. 죄송해요, 겸이 형. 근데 눈앞에 음식이 있으면 참기 힘들어서. 다음부턴 참도록 노력….”
“아니, 그냥 서도현이 짜증 나서.”
“아아, 뭐야. 별거 아니네요. 난 또 뭐라고.”
…별거 아닌가? 재우의 태평한 반응에 도리어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다 데워진 컵밥을 꺼내며 재차 말했다.
“나 서도현 짜증 난다니까?”
돌아오는 반응은 차가웠다. 재우는 아예 답도 없고,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도아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뭐예요. 둘이 또 싸웠어요? 애예요? 나랑 차재우도 그만큼은 안 싸우겠다.”
“아니.”
“안 싸웠어.”
도현과 이겸에게서 동시에 대답이 터져 나왔다.
“야, 서도아, 그냥 내버려 둬. 저거 겸이 형 입버릇이야, 입버릇. 저러면서 맨날 붙어 다니잖아.”
“우리가 언제.”
“저번에도 둘이서 어디 멀리 갔잖아요. 우리 빼놓고.”
“그건….”
말문이 막힌 이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주승태를 잠깐 만나러 간 것뿐인데, 그에 관한 일을 둘에게 비밀로 하고 있으니 뭐라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저 봐. 또 말 못 하잖아.”
졸지에 서도현을 싫다싫다 노래 부르면서도 그와 항상 같이 다니는 이중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계속 부정하다 더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까 싶어, 얌전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근데 산하 형은 잘 지내고 있겠죠?”
“그 형은 사격하면 10점 쏘지 않을까.”
재우의 질문에 이겸이 중얼거렸다.
“무기를 만드는 것과 다루는 건 달라요. 제가 예상하는데 산하 오빠 3점도 겨우 쏠걸요?”
“그래?”
“네. 무기 제조와 운동 빼고 뭐든 서투르던데요.”
도아의 답변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이야-. 여기 뭐야? 도현아 너 이런 데서 지금까지 일했던 거야?”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의외의 인물이 래터를 방문했다.
“상우 아저씨?”
“어어! 우리 도아, 잘 지내고 있었어?”
“그럼요! 왜 연락 한번 없으셨어요?”
도아가 달려가 그를 반겼다. 일찍이 부모님을 떠나보낸 남매는 원래라면 보육원에 들어가야 했지만, 서도현의 각성 후 그가 자경단에 들어가며 배상우가 집도 마련해 주고 그들을 여러 방면에서 많이 챙겨 주었다. 도현보다 더 어린 도아는 배상우의 안전한 울타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었다.
“그동안 바빴거든. 근데 너희 청소 좀 하고 지내라. 여기서 지내다간 병 걸리겠다, 이놈들아.”
“알아서 잘 지내요. 어쩐 일이세요?”
도현의 질문에 터벅터벅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은 배상우는 식사 중인 이겸에게 고갯짓했다.
“저어기. 저 친구에게 볼일이 있어서.”
“…저요?”
느닷없이 제가 호명되자 이겸은 한쪽 볼에 음식을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주승태에 관한 일인가? 자리를 옮겨야 되나. 이겸은 도아와 재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누구 한 명이 비었단 걸 깨달았다.
“재우는?”
“차재우 걔 방금 화장실 똥 싸러 들어갔어요. 한 시간 넘게 걸릴 거래요.”
“그러게 많이 먹으니까 그렇지.”
작게 타박하곤 제 맞은편 사람에게 고개를 들었다. 서도현은 자리를 옮겨 이겸의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물었다.
“윤이겸은 왜요.”
“아 그러게 볼일이 있어서 왔다니까?”
“오늘은 이만 가시고, 다음에 저 통해서 연락 주세요. 제가 가려 가며 전달할 테니.”
“그 ‘가려 가며’가 거슬리거든? 내가 몇 번이나 연락했었는데 맨날 씹기나 하고 말이야.”
상황을 보니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서도현이 제 선에서 가차 없이 씹은 모양이었다. 결국 답답해져 사무실까지 찾아 오신 건가.
이겸은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저한테 볼일이 뭔데요?”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고. 잠깐 나갈래?”
도현이 이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 돼요. 저희 지금부터 일 있어서.”
“오늘 CA 지역 없잖아.”
“안 돼. 추운데 여기 있어. 너 추운 거 싫어하잖아.”
“싫긴 한데.”
그래도 주승태가 걸린 일일지도 모르는데 이겸의 생각은 나가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서도현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일은 아니죠?”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지.”
뭐야, 불안하게. 배상우의 답변에 더욱 불안감만 증폭됐다.
준비하고 나가려던 찰나, 이미 나갈 준비를 끝낸 도현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너도 가게?”
“네가 가는데 내가 왜 안 가?”
뭐, 서도현이라면 상관없나. 주승태에 관해 알고 있기도 하고.
“그러든지.”
그러나 거절은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안 돼, 인마. 너 오면 또 지랄할 거 아니야.”
“가자.”
도현은 배상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이겸을 이끌었다.
“다녀오세요.”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도아에 배상우는 결국 한숨을 내쉰 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 명이 빠지자 사무실이 조용해졌고, 화장실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그 사이로 재우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가셨어?”
“응. 근데 화장실은 왜 간 거야? 네가 배탈 날 리는 없고.”
재우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변명했다.
“아니…, 그. 저 아저씨 포스가 무섭잖아.”
“포스라면 산하 오빠가 더 무서운데.”
덩치도 더 크고, 근육도 우락부락.
“무슨 소리야!? 산하 형은 같은 래터잖아! 저분이랑 같은 취급 하면 안 되지!”
“뭐? 너 지금 내 앞에서 상우 아저씨 욕했어?”
도아에겐 거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인 걸 전해 들어 알기 때문에 재우는 두 팔을 휘휘 저으며 제 주장을 펼쳤다.
“윽, 그게 아니라…. 그냥 그랬다고. 나만의 생각! 개인적인 가치관!”
“말이나 못하면. 근데 무슨 얘기 하러 간 걸까?”
도아는 떠난 그들의 행방을 떠올렸다.
“나야 모르지. 근데 또 겸이 형이랑 도현이 형만 나갔네. 둘이 친한 거 맞다니까.”
“겸이 오빠 앞에서 그 말 하면 엄청 화낼걸.”
“아, 그런가? 그럼 더 해야지. 헤헤.”
***
학생 둘이 사무실에서 웃고 떠드는 사이, 셋은 근처 카페에 도착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이겸은 곧장 본론을 말했다.
“주승태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그 친구 일은 아니고….”
“걔는 잘 지내고 있어요?”
친구가 걱정됐던 이겸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우다다 쏘아 말했다.
“하아…. 내가 총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 알진 못해. 그 친구 한 명만 수감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배상우가 머리를 박박 헤집으며 설명하자 이겸은 조용히 수긍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거 말고 제게 어떤 용건이?”
서도현은 지금 상황이 언짢다는 듯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그동안 배상우의 연락을 씹었다 했으니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배상우의 분위기가 꽤 진지했다.
“우선 말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네.”
“너 A랑 아는 사이냐?”
“…네?”
이겸이 눈을 깜빡였다. A라면 자경단의 리더 아닌가?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녀 누구도 모른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순진무구한 눈빛에 배상우는 자기가 실언했다며 사과했다.
“아니…. 그래도 내가 자경단 내에서 A를 제일 많이 만났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라….”
“뭐가요.”
계속 두루뭉술 운만 띄우는 그에 이겸은 슬슬 인내심이 떨어졌다. 그러곤 제 옆에 앉은 도현의 팔꿈치를 툭 쳤다. 별 얘기 아니면 간 보다 일어나자는 무언의 전언이었다.
눈치 빠른 배상우는 그들의 몸짓을 알아채고 말을 이었다.
“아아, 알았어,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네. 제게 무슨 볼일이신데요.”
“후우, 툭 까놓고 말한다.”
배상우는 잠시 생각하느라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윤이겸. 너 자경단에 들어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