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이겸은 침대 속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다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켰다.
필름이 끊겼다는 게 이 뜻이구나.
이런 적은 처음이어서 낯설기만 했다.
‘나 어떻게 집에 온 거지.’
“일어났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 집까지 데려다준 거야?”
“아니.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 서도현인가?”
“이름이 서도현이야?”
“걔가 데려다줬다면서, 둘이 만난 거 아니야?”
이겸은 강태하가 건네주는 꿀물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강태하가 자신의 집에 있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서로의 집에 오가곤 하니 비밀번호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겸의 자취방이지만, 강태하의 제2의 집도 된다는 뜻이었다.
“만나긴 했는데 이름은 안 알려 주더라.”
“그래? 근데 걔는 갔어?”
“너 데려와서 잠깐 머물다 금방 갔어.”
“그렇구나.”
호응은 그게 전부였다. 숙취로 인해 속이 쓰렸다.
강태하가 이겸을 타이르듯 혼냈다.
“집 비밀번호도 못 누를 정도로 누가 그렇게 마시래.”
“기억이 안 나. 어느 순간 정신이 나갔어. 그보다 나 라면 먹고 싶어. 속이 쓰려.”
이겸은 수척한 얼굴로 배를 문질렀다. 구토가 나올 정도는 아닌데 이렇게 마신 적은 처음이라 다음 날 숙취가 생긴 적도 처음이다. 당황스럽고 얼떨떨했다.
“콩나물국 끓여 놨어. 차려 놓을 테니까 씻고 와.”
“어, 땡큐.”
이겸은 어기적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그사이 강태하는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집 안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윤이겸이 겨울철 창문을 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이라 그가 씻고 나올 동안만 활짝 열어 두었다 다시 닫을 예정이었다.
상을 차리니 이겸이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왔다.
“드라이기로 말려. 감기 걸리잖아.”
“네가 말려 줘.”
강태하는 물끄러미 이겸을 바라봤다.
어렸을 때 자주 해 주었지만 근래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겸이 뭘 해 달라고 칭얼거릴 때는 언제나 밖에서 짜증 나거나 울분을 토할 일이 있을 때,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을 때였다.
결국 드라이기로 이겸의 머리를 말려 주며 슬쩍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너야말로 요즘 들어 그 질문 자주 한다.”
“무슨 일이 있어 보이니까.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늘고. 그 서도현이라는 사람은 누구야?”
“어쩌다 만난 애야.”
“앞으로도 만날 거고?”
이겸은 눈동자를 굴렸다.
“아마?”
“너랑 안 어울리는 사람 같아.”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나부터 열까지 사사건건 부딪치는 사람. 모든 성향이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그와 있을 땐 나름대로 편한 기분도 들곤 했다.
어차피 나와 정반대이니 생각이 맞지 않다고 화를 낼 필요도 없고, 그와 싸우거나 뭐가 잘 안 풀려도 원래 잘 맞지 않았으니 그러려니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애초부터 그에 대한 기준치가 낮으니 어떤 점은 편하게 다가왔다.
“저번에 본 차재우란 학생도 서도현 그 사람이랑 같은 이유로 만난 거야?”
“응. 근데 재우는 착해.”
강태하가 드라이기 선을 빼며 중얼거렸다.
“착하다, 나쁘다로 네 연을 멋대로 할 수는 없지.”
“다 말렸어?”
“응. 얼른 밥 먹자.”
이겸의 머리카락을 물기 털 듯 헤집어 주었다.
“오늘은 뭐 하려고?”
이겸이 수저를 들며 답했다.
“집에 있게.”
나가서 할 것도 없고, 얼어 죽긴 싫으니까.
“옷 사러 가자.”
“옷?”
“아까 보니까 옷 많이 해어졌던데, 그거 최근에 산 옷 아니야?”
“아….”
이겸은 제가 입고 있는 옷들을 떠올렸다.
CA 사냥을 나갈 때 걸쳤던 옷들은 언제나 얼마 못 입고 너덜너덜해지곤 했다.
이쯤 되면 작업복처럼 CA 사냥 나갈 때만 입을 옷을 구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크리처 팔아서 돈도 많이 벌었으니 옷이나 몇 벌 사러 가야겠다.
“그럼 이거 먹고 같이 가자.”
식사를 끝내고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이겸은 조수석 안전벨트를 매며 슬그머니 운을 떼었다.
“요즘 주식은 잘돼 가?”
“왜, 궁금해?”
“당연하지. 나도 종목 알려 달라니까.”
강태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주식 투자에 성공했다며 멋진 차를 한 대 뽑아 왔다.
그 후로도 계속 투자를 하는 건지, 현재 그가 혼자 살고 있는 아파트도 부모님의 재력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 거였다.
이겸이 언제나 종목을 알려 달라고 졸랐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진짜 주식을 하긴 하는 건지 의심도 하게 되는 판국이었다.
“종목 알려 줬는데 투자 실패하면 어떡하려고.”
“그런다고 너 원망 안 해.”
“내가 미안해서 싫은데.”
“그냥 알려 주기 싫은 거겠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백화점에 도착했다. 강태하와 있을 땐 편하고 익숙해서 그런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겸아, 이건 어때?”
매장에서 이것저것 옷을 구경하고 있는 이겸을 강태하가 불렀다. 브라운색으로 된 터틀넥 니트였다.
“니트는 빨리 닳아서 싫고, 목까지 올라온 건 더 싫어.”
“그럼 어떤 게 좋은데.”
“그냥 뭐, 무난하게 후드 티나 맨투맨.”
강태하는 아쉬운 손길로 들었던 옷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 그를 확인한 이겸이 다른 니트류를 들고 말했다.
“넌 이런 거 잘 어울리겠다. 하나 사 줄게. 골라 봐.”
“네가 사 준다고?”
“왜. 난 사 주면 안 돼?”
이겸이 퉁명스레 되물었다. 그렇게 반응할 정도로 지금까지 뭐 하나 안 사 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강태하와 잘 어울리겠다 싶으면 구매해서 자주 주곤 했었는데.
“아니, 그냥. 좋아서 그렇지.”
강태하가 다정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쇼핑을 하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분 겸이 형 아니야?”
“누구… 어, 진짜네! 오빠! 거기 윤이겸!”
도아가 활짝 손을 흔들며 이겸을 불러 세웠다.
“…차재우? 서도아?”
이겸이 고개를 돌려 제게 다가오는 두 인영을 확인했다.
“너희가 왜 여기 있어?”
“오빠야말로 여기서 뭐 해요?”
“나는 친구랑 쇼핑 왔지. 내 친구, 강태하.”
이겸은 제 옆의 강태하를 끌고 와 소개해 줬다.
“저번에 뵀던 분이네. 안녕하세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재우가 얌전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너 재우는 저번에 봤었지, 옆에 얘는 어제 왔다던 서도현 동생 서도아.”
“아, 닮았네.”
“그렇지? 완전 붕어빵이야.”
이겸과 태하의 대화를 들은 도아가 투덜거렸다.
“왜 사람을 앞에 두고 험담을 해요.”
“칭찬한 거잖아.”
“진짜 칭찬이라 생각하긴 해요?”
“…근데 여긴 왜 왔어?”
이겸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내일모레 산하 형 부대 복귀 하잖아요. 미리 선물 사러 왔죠.”
“아, 내일모레였어?”
“몰랐어요?”
“응. 며칠 뒤라고 얘기만 들었지 정확한 날짜는 못 들었어.”
도아가 반색하며 제안했다.
“그럼 같이 고르러 가요.”
“미안. 나는 따로 고를게. 친구랑 같이 온 거라.”
“친구랑 같이 가면 되죠! 초면에 불편하시려나?”
도아는 눈알을 데굴 굴려 태하를 쳐다봤다. 그가 입술을 잘게 휘며 자연스레 거절했다.
“불편하지는 않은데, 어색할 것 같아서요.”
‘어색한 게 불편한 거 아닌가?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될 걸 되게 고상하게 거절하네.’
뭉근히 차오르는 생각을 꾹 눌러 삼킨 도아가 예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럼요! 어쩔 수 없죠. 저흰 저희끼리 쇼핑하다 갈게요. 가자, 차재우.”
“우음, 겹치는 건 피하고 싶은데. 겸이 형, 그럼 뭐 살 건지 정해지면 연락 주세요.”
“그래. 내일 보자.”
“네! 내일 봬요!”
도아와 재우가 떠나고 태하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옆에 있던 여자아이는 처음 보는데. 부대 복귀 한다던 분도 그렇고. 또 내가 모르는 사람이 늘었네.”
“방금 소개해 줬잖아. 군대 가는 형도 곧 알려 줄게. 그 형은 되게 착하셔서 너랑도 잘 맞겠다.”
이겸은 남궁산하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래터에서 가장 선한 이미지를 꼽으라면 그는 망설임 없이 남궁산하를 꼽을 것이다.
생김새로 보면 재우가 체격도 작고 강아지상인 게 선해 보이지만 다소 막무가내인 기질이 있고, 반대로 덩치가 우락부락한 산하가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살피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또 나한테 숨기는 건 없고?”
“숨기는 거?”
이겸이 잠시 머뭇거렸다. 순간 주승태가 떠올랐다.
“…너 요즘 주승태랑 연락해?”
“내가 먼저 하지는 않는데. 그건 왜?”
조심스레 물어 오는 이겸에게 답해 주었다.
“그냥… 걔한테서 연락 오면 말해 줘.”
“왜? 너희 싸웠어?”
“싸우진 않았는데.”
그것보다 더 큰일이지.
이겸은 강태하를 올려다봤다.
‘네가 슬퍼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건 그 친구가 그저 그럴 만한 수준의 존재였던 거 아니야?’
정말 그럴까.
사실 주승태가 아니라 강태하가 블러드 헌터였고 자신을 납치당했다 유인해 속였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겸은 지금 한가로이 쇼핑도 하고 있지 못할 것 같았다.
‘지옥도 함께 가 주는 친구.’
강태하라면….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겸은 불안한 어조로 질문했다.
“넌 만약 내가 너한테 뭘 속였어. 속여서 널 위험하게 만들었어. 네 주변 친구들도 같이 위험해졌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윤이겸, 너 무슨 일 있지.”
“대답해 봐. 넌 어쩔 거야? 용서해 줄 거야?”
강태하가 대답을 망설이다 입술을 뗐다.
“용서할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