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비밀번호 뭐야.”
도현이 비틀거리는 이겸을 부축하며 물었다.
술은 두 명 마실 분량을 시켰지만 도현의 술잔은 단 한 번도 비워지지 않았다. 덕분에 두 명분을 마신 이겸은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하얀 입김을 뿜을 뿐이었다.
“겸아, 비밀번호.”
“…몰라.”
“너희 집이야.”
술버릇 한번 고약하네.
이걸 어쩌지 싶은 도현은 막무가내로 네 자리를 눌렀다. 윤이겸의 생년월일부터 해서 0000 또는 1234 여러 규칙으로 눌렀지만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난감하네.’
근처 모텔이라도 가야 하나 싶은 찰나, 안에서 문이 열렸다.
“누구?”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도현이 묻자 강태하가 느른하게 대답했다.
“보통 남의 집에 허락 없이 있는 사람을 도둑이라고 하던데.”
“겸이 친구입니다.”
“겸아, 일어나 봐. 너희 집에 도둑 들었다.”
“친구입니다.”
도현이 반쯤 졸고 있는 이겸을 흔들어 깨웠다.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 알아?”
졸린지 도현에게 기대며 웅얼거렸다.
“몰라.”
“모른다는데.”
술김에 귀찮음이 최고치로 차오른 건지 뭐가 됐든 ‘몰라.’ 하고 보는 것 같았다.
“윤이겸. 정신 차려.”
강태하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도현이 그를 막으며 이겸을 숨겼다.
“도둑이 집주인한테 손도 대네. 이거 상해죄 맞지?”
“도둑이 아니라…. 윤이겸, 정신 안 차려? 연락도 안 받더니 술이나 마시고 있었어?”
“아, 연락한 게 그쪽?”
어느 순간부터 이겸의 휴대폰이 계속 울려 대긴 했는데 폰 주인은 인사불성 상태여서 알지도 못했고, 도현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네, 접니다. 그러니 윤이겸 놔두고 이만 가시죠. 데려와 준 건 감사합니다.”
도현은 어쩔까, 눈을 굴리더니 이겸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뭡니까?”
“쉬다 가려고.”
“허락 없이 들어오면 도둑이라면서요?”
“같은 도둑 처지네. 잘 부탁해.”
강태하는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 한숨을 내쉬고 그를 맞이했다.
이겸을 침대 위에 눕힌 도현은 그에게 물었다.
“이름은?”
“도둑끼리 신원을 밝혀서 뭐 합니까.”
친해지기 싫다는 표현이었다.
“거절도 고상스레 하네.”
강태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꿀물을 탄 후 이겸을 일으켰다.
“씻고 누워야지. 이거 마시고 정신 차려 봐.”
“우응.”
이겸은 따뜻한 이불을 덮어쓰고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내버려 둬. 피곤하다잖아.”
하루쯤 안 씻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강태하가 그를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인상을 찌푸린 이겸은 본능적으로 제 편을 찾아 도현 쪽으로 몸을 붙였다.
강태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양치라도 해. 충치 생겨.”
풉. 도현이 작게 조소했다.
“윤이겸이 애도 아니고 무슨 충치야.”
“성인은 충치 안 생깁니까?”
“하루쯤 안 닦는다고 생기진 않지.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얘가 내일 입을 옷까지 골라 주겠다?”
둘의 신경전은 끝날 줄을 몰랐고, 그 사이에서 이겸은 노곤한 단잠을 청했다.
***
윤이겸이 고등학생일 무렵의 일이었다.
“조금만 먹어. 곧 점심시간이잖아.”
“그러고 있어.”
“조금이 반 봉지야? 벌써 반이나 먹었잖아.”
“한 봉지 먹을 거 참고 반만 먹었으면 조금이지.”
이겸은 매점에서 사 온 과자를 먹으며 강태하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화가 나서 일부러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거나, 투덜거리는 게 아닌 그들에겐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일 뿐이었다.
윤이겸은 강태하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고 심지어 옆자리였다. 놀 친구가 부족하지도 않은데 굳이 새로 사귈 이유는 없었다.
그때 앞자리의 주승태가 등을 돌려 물었다.
“너흰 평소에 뭐 해? 공부해?”
그 시절엔 주승태와 같은 반 학우였을 뿐, 그리 친하지 않았다. 그와 대화한 것도 오늘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임해.”
“너희가?”
“응.”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끔 이곳저곳 돌아다니거나 그게 아니면 강태하의 집에서 논다. 그의 집에는 각종 게임기가 즐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도 질리게 되면 각자 시간을 보낸다. 한 공간에 있지만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편한 대상이었다.
“너희 공부는 언제 하는데?”
주승태는 시험만 치면 전교에 들고, 모의고사도 전국 석차의 높은 순위에 드는 아이들이 평소에는 게임한다는 사실이 여간 신기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
“수업 시간에?”
“응.”
“수업 시간엔 나도 한다!”
“너 자던데?”
이겸이 과자를 우물 삼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최근 새로 자리를 바꿔 이겸과 강태하가 짝, 주승태가 그 앞자리였다. 그리고 수업 시간마다 제 앞자리가 고개 숙인 벼처럼 고꾸라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건 선생님 설명이 이해가 안 되니까 나중에 체력을 구비해 뒀다 복습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야.”
주승태가 진지하게 중얼거렸고, 강태하는 이겸이 더는 과자에 손대지 못하도록 고무줄로 꽁꽁 묶은 후 제 가방에 쏙 집어넣었다.
아쉬운 대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복습 말고 예습을 해 오면 되잖아. 그럼 수업 시간에 졸지도 않을 텐데.”
“그럼 넌 예습해?”
“아니. 난 이해 잘되던데. 굳이 예습할 것까지야.”
주승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넌더리를 냈다.
“이래서 똑똑한 놈들은 상종하면 안 돼. 우리 같은 평균을 이해하지 못하잖아.”
“미안한데, 저번에 네 성적 보니까 평균 이하던데.”
“그걸 봤어!? 언제!”
“…책상에 올려져 있길래.”
“그럼 잊어야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얼마나 자세히 들여다본 거야!”
이겸이 불쑥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잠깐 본 건데 지금 기억난 것뿐이야.”
“잊어! 잊으라고!”
“그러게 왜 아무 곳에나 던져둬. 가방에 잘 넣어 뒀어야지.”
“내 책상에 놔둔 게 아무 곳이야? 본 사람이 잘못이지!”
“보이는 걸 어떡해. 나중엔 음식 냄새 맡았다고 냄새값 내라 그러겠네.”
잔뜩 격분하는 주승태의 성질을 받아 주다 누그러질 즈음에 또 살며시 긁어 대고, 그럼 또 격분하고.
반년 동안 학우로 지내오면서 오늘 나눈 대화가 그동안 나눈 대화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다 수업 종이 쳐 씩씩거리는 주승태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웃겼다.
“재밌어?”
강태하가 조용히 물어 왔다.
“응?”
“즐거워 보이길래.”
그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늘 강태하와만 있어서 알지 못했다. 익숙함, 편함이 즐거움과 연결되진 않는단걸.
그래서 즐거움을 찾아 나섰다. 앞자리 주승태의 의자를 발로 툭 치며 물었다.
“야, 나중에 공부 같이 할래?”
결론은 이겸의 집에서 같이 했다.
한 10분 정도는 제대로.
윤이겸, 강태하, 주승태 셋이 모여 시작한 공부는 좋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집중력이 좋지 않은 주승태가 제일 먼저 나가떨어졌다.
“그만하고 놀자. 너희 평소에 게임한다며.”
“그건 강태하 집에 있어. 우리 집엔 게임기 없어.”
“그냥 인터넷 게임 하면 되잖아.”
거듭 칭얼거리자 강태하가 언짢았는지 눈치를 주었다.
“원래 공부하기로 모였잖아. 하기 싫으면 집에 가.”
“…윤이겸! 너는 하고 싶어? 너 공부는 학교에서만 한다며!”
“응. 근데 할 만해. 힘들면 집에 가. 우린 계속 공부하려고.”
새로운 친구는 즐겁지만 그렇다고 강태하가 아닌 그의 편을 드는 건 껄끄러웠다.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었다.
“…너무해!”
주승태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뛰쳐나갔다. 말릴 틈도 없었다.
이겸은 머쓱해하며 연필을 굴렸다.
“내가 잘못한 거야?”
“공부하자고 모인 건데 안 한 사람 잘못이지.”
“그렇지?”
강태하가 책을 덮었다.
“응. 우리도 이만하고 게임이나 하러 갈래?”
이겸도 별생각 없이 연필을 놓아두고 그의 집으로 가 신나게 게임을 했다.
주승태의 일은 잊은 지 오래였다.
“윤이겸! 과자 먹을래?”
“너 화난 거 아니었어?”
“뭐가? 안 먹을 거면 말고.”
“…먹을게.”
다음 날, 주승태는 어제의 일은 잊었다는 듯 여상히 말을 걸었다.
이겸도 눈치껏 어제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주승태와 점점 친해지게 됐다.
“윤이겨엄! 축구하러 가자!”
“나 축구 못해.”
“알려 줄게. 너 머리 좋으니까 룰도 금방 이해할 거야.”
점심시간 밖에 나가서 뛰어놀자고 달라붙는 주승태를 한사코 거부했다.
“룰은 아는데 공을 못 찬다고.”
“까고 있네. 너 체육 수행도 만점이잖아!”
“…더운데 뭐 하러 뛰어.”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 덕분에 겨울보다는 여름이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더운 걸 좋아한다는 건 아니다. 땀 나는 건 질색이다.
“햇살 좋은 날 일광욕하는 거지! 땀도 빼고!”
“찝찝하게 왜 그래야 해.”
“네가 그러니까 얼굴이 창백하니 아픈 사람처럼 허여멀건 거잖아. 밖에 나가서 타기도 해야지.”
주승태가 이겸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아하. 하디 마.”
“어? 나갈래, 안 나갈래? 같이 축구하자! 옆 반이랑 아이스크림 내기했어.”
“안 나가래….”
“이래도? 이래도?”
꿋꿋이 거부한 이겸의 볼이 시간이 지날수록 새빨개졌다.
“그만해. 나가기 싫다잖아. 그러다 멍들면 어쩌려고.”
강태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리자 그제야 이겸의 볼에서 손을 뗀다.
“…너 내가 오늘 봐준다. 다음엔 꼭 같이 축구해!”
씩씩거리며 반을 나섰다.
이겸은 늘 그랬듯 아무렇지 않게 강태하와 대화를 나누며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보냈다.
강태하는 주승태와 있을 때 말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주승태도 그를 어려워했다.
이겸은 딱히 둘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이런다고 강태하와 사이가 멀어진다거나, 혹은 그가 자신을 싫어할 리는 없다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고, 주승태와는 지내 보고 맞지 않으면 연을 끊어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승태의 집념 아닌 집념으로 그 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이제는 간간이 강태하와 주승태도 대화를 하는 사이까지 왔다.
만사태평한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