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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38)화 (38/102)
  • #038

    도아와 함께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들던 재우가 말했다.

    “두 분 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겸은 차가 움직이자 그 앞의 서도현을 쳐다보곤 도아와 재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금까지의 상황과 아까의 상황에 다른 점은 없었다.

    창밖의 풍경 역시 달라진 점 없이 같았다. 5분 이내로는 서도현의 반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그의 능력이 우주에 해당하는 건가.

    “미안. 신기한 것만 보면 내가 정신이 좀 없어서. 내 억지에 어울려 줘서 고마워. 초면에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지?”

    “…….”

    그의 사과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남궁산하는 이번 한 번으로 테스트를 끝낼 이도 아닌 것 같았고 어차피 자신이 대답 안 한 걸 기억조차 못 할 테니까. 의외성은 거기서 터져 나왔다.

    “아! 혹시 지금이 첫 번째가 아니야?”

    “…두 번째요. 어떻게 아셨어요?”

    “도현이도 가끔 그런 실수 하거든.”

    “실수요?”

    “아무도 기억 못 하니까 내가 뭘 해도 상관없겠다는 실수.”

    그의 말에 이겸은 애꿎은 제 손만 꼼지락거리며 변명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게 실수인가? 기억 못 하는 건 사실이잖아. 이겸의 뇌리에 순간 굉장히 불순하고도 비도덕적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남들은 지금 시간을 잊고 말 테니 내가 뭘 해도 상관없겠다, 는.

    참으로 이상한 감각이다. 어차피 잊을 거니. 무적도 아닌 단어가 도덕적 사고를 야금야금 좀먹는 감각. 이걸 되뇔수록 비도덕적 기준치가 늘어만 간다.

    내가 타인을 무시해도, 타인에게 상처를 줘도…, 설령 내가 타인을 죽여도.

    그리고 서도현이 나를….

    섬뜩했다. 이겸은 급히 산하를 불렀다. 그 부름이 마치 구조 신호 같았다.

    “…형은, 형은 싫으세요?”

    “응? 기억 못 하는 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못해 아쉬운 거지 싫다 말하기까지는.”

    “아뇨. 제가 대답 안 하는 거요.”

    차 내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한참 후에 남궁산하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감히 좋고 싫고를 따질 수가 있을까.”

    “…….”

    “내가 기억 못 하는 건 사실이고, 그 감당은 뭐가 됐든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의 몫인데. 타인의 답은 관계없을 것 같아.”

    줄곧 제 손가락만 응시했던 이겸의 시선이 산하에게 향했다. 그는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했다.

    “그냥 너희가 그 기억 속에서 너무 외롭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불현듯 이겸은 그의 담백한 문장에서 함부로 정의를 내리기 힘든 의문의 감정이 왈칵, 벅차올랐다. 그 문장에서 다독거림을 느낀 걸 수도, 위로받은 걸 수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후련함을 느꼈다는 거다.

    “28살이라고 하셨죠?”

    “어? 응.”

    이겸은 의미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

    “그래도 형은 형이네요.”

    “…어라? 나 지금까지 형 안 같았어? 좀 철없이 굴었나?”

    “대뜸 이상한 부탁을 하시고, 막무가내로 굴긴 하셨죠.”

    남궁산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내가 좀 그랬지!? 미안! 근데 지금은 왜 형 같다고…. 어, 나 혹시 오글거리는 말 했어?”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르죠.”

    “어…. 으아! 미안! 며… 몇 분! 아, 1분 남았네! 다행이다! 너 1분 후에는 모르는 척해 줘야 해!”

    시간을 확인한 그는 앞으로 딱 1분만 부끄러워할 심산인 것 같았다.

    어쩌면 망각은 축복. 그렇다면 자신과 서도현은 저주받은 걸까.

    답은 없었다. 축복의 반대말이 무조건 저주일 리도 없었다. 그냥 또 다른 무언가일 뿐. 이겸은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웃어!”

    “아쉽네요. 이 대화를 형은 1분 후에 잊는다는 게.”

    “…방금 대화가 왜?”

    어… 어어. 뭐지? 뭐가 특별했나? 내가 호들갑 떨었나? 그게 웃겼나? 아니면, 아니면 또 뭐지? 혹시 내 얼굴이 좀 웃겨? 재밌게 생겼나?

    “네? 아니요? 형 얼굴 안 웃긴데요. 오히려 덩치가 커서 좀 무서워요.”

    “그래? 운, 운동을 너무 과하게 했나? 으아, 그럼 앞으론 좀 줄여야겠다. 5분 끝나 간다. 혹시 나중에 또 말해 줄 수 있어? 운동 좀 작작 하라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경황없는 산하를 보자 이겸의 입술 끝엔 진득한 장난기가 맺혔다.

    호냐 불호냐 물으면 불호에 가까웠다. 지긋지긋한 도현의 가상 세계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한편으론 잃은 적도 많았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러면 지극히 일반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남들보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타인이 모르는 걸 자신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남궁산하가 궁금해하는 미지의 세계를 저와 서도현은 수도 없이 경험한다는 점이.

    살짝은, 아주 살짝은 좋아질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고 재우가 손을 흔들었다.

    “두 분 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겸은 자동차 창틀에 손을 올리고 도현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남궁산하는 소심과 별개로 눈치가 빠른 자였다. 아까와 다른 이겸의 태도를 기억도 못 하면서 기민하게 알아채곤 출발하려던 차를 세우고 그를 쳐다봤다.

    이겸이 미미하게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래터에 들어오길 잘한 것 같아.”

    그러면 도현은 눈을 반달로 접으며 호응한다.

    “응. 환영해.”

    잊힌 세계의 이물질들은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

    “그래서 실험 결과는요?”

    도아는 래터 사무실에 도착한 이겸과 산하에게 물었다.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잘만 돌아가던데.”

    “잘만 돌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야? 도현이 주변에 없어도 사람들은 5분이 반복되는 한 같은 행동을 한다는 거야?”

    “네. 그렇던데요.”

    5분 안으로는 차를 타고 나가도 정해진 거리밖에 벗어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겸은 눈을 감았다. 아주 조금의 먼 거리라도 더 보기 위해.

    결과는 같았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지만 5분 안으로 그 태풍을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도현과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똑같은 행동을 했다. 남궁산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같은 경로를 이용했다. 다만 그는 감각이 예민한 건지 이겸의 사소한 행동에도 반응이 달라졌다.

    아마 지금은 몇 번째일까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만약 첫 번째라면 이 행동을 실행, 두 번째라면 이 말은 첫 번째에 했을 것 같으니까 다른 행동을 실행.

    그렇게 행동하는 탓에 이겸도 그와 있을 때 쉽게 지루함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몇 번 거듭 반복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첫 실험은 도현의 능력 반경이 몇 km인가였지만, 5분 이내 자동차의 속력으로 달려도 그의 능력 반경에 벗어나지 않는단 걸 깨닫고 다른 실험을 시작했다.

    휴대폰이라는 좋은 통신기기가 있으니 처음부터 이겸과 산하는 도현에게서 아주 멀리, 차를 타고 아주 멀리 나가 능력 발동. 그럼에도 5분 전으로 돌아오는 건 똑같았다. 아마 다음엔 거리를 좀 더 늘려 타 지역까지 떨어져 실험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산하는 흥분해 떨리는 음정으로 도현의 능력이 지구 전체에 작용할 수도 있다 말했다.

    이겸은 그런 그를 가볍게 흘겨보고는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이내 제 보금자리가 되어 버린 도아의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젠 도아보다도 이겸이 더 많이 사용하는 침대였다.

    5분 동안의 상황 반복은 정신적 피로의 소모도가 심했다. 서도현은 힘들지도 않은지 아주 멀쩡한 행색이었다.

    “약 줄까?”

    문득 들려온 도현의 질문에 이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 약도 먹어?”

    “그냥 비타민 약인데.”

    깜짝아. 순간 정신병에 관련된 약인 줄 착각했다. 나는 걱정이라도 한 건가. 쟤가 뭐라고?

    아, 몰라. 지친 이겸은 시린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가상 세계는 못 밝힌 걸로….”

    “가상 세계가 아니야!”

    “…네?”

    이겸과 재우는 힘껏 소리치며 부정하는 산하를 어색하게 쳐다봤다, 도현과 도아는 저 사람 또 저러네, 라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제 할 일을 찾아 했다.

    산하는 부끄럽다는 듯 살며시 볼을 붉히면서도 제 생각을 확고히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으니 가상 세계라고 단정하기보다는 미지의 세계, 또는 X 세계 등 다른 명칭을 붙여야 옳다고 봐.”

    그러면서 종이와 펜을 끌고 와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어 나갔다. 그런 산하의 태도에 호기심이 생긴 이겸이 몸을 일으켜 어기적어기적 그에게 다가가 종이 내용을 확인했다.

    가설 1. X 세계에선 주체자 ‘서도현’의 반경에 들지 못하는 모든 존재는 능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준비물: X 세계, 서도현, 윤이겸, 자동차(보다 빠른 것이 있을 시 그걸로 대체), 5분 알람, 서도현의 능력 반경 넓이 파악(중요☆☆☆☆☆)

    주체자 ‘서도현’을 제외하고 X 세계를 기억할 수 있는 ‘윤이겸’을 통해 확인한 결과, 작동한다. (서도현의 반경이 보다 넓거나 그의 능력이 전 지구에 작동한다는 가능성이 있다.)

    실험 결과: 사실상 중요도 5점의 준비물이 완전히 갖춰지지 못해 실패에 가깝다. 모든 가설 확인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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