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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37)화 (37/102)
  • #037

    “그럼! 아, 그, 그래도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를 수 있으니까 이겸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겸은 딱히 아무런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산하는 쉴 새 없이 해명을 늘어놓았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처음 만난 건 자신과 재우 모두 똑같은데 재우는 거의 10살 차이다 보니 아예 아기 취급하는 건지 그다지 경계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겸 자신만 이리 대하는 게 조금 서글펐다.

    “괜찮습니다. 형 말씀대로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른 거니까요. 재우야, 나 물 좀.”

    이러다간 대화가 안 끝나겠다 싶어 이겸은 재우에게 배턴을 터치하듯 주제를 바꿨다.

    “네, 형.”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당 코코아나 인스턴트커피를 타 주기 위해 선반 쪽에 서 있던 재우는 제 옆의 물병 하나를 집어 이겸의 뒤통수로 서슴없이 던졌다. 그걸 정면에서 본 산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겸도 이 훈련에 나름대로 익숙해졌기에 노련하게 물병을 낚아챘다.

    “재, 재우야! 그래도 그렇지. 형한테 물병을 던지다니…!”

    “괜찮아요, 산하 오빠. 저거 훈련이에요. 오빠도 겸이 오빠한테 빈정 상하는 일 있으면 냅다 던져요. 아, 그 대신 물병만 던져야 돼요.”

    역시 이건 훈련을 빙자한 폭력이 맞았구나.

    은연중에 의심하던 걸 도아가 친절히 확인 사살을 해 주니 이걸 고맙다 해야 할지, 뭐라 한마디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맞다, 산하 형 그거 아세요?”

    “응? 뭘?”

    “겸이 형 능력 하나 더 있어요.”

    “진짜? 복수 능력인가?”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능력을 가지는 경우는 무척이나 희귀했다. 남궁산하는 존경 어린 눈빛으로 이겸을 쳐다봤다.

    ‘그게 아닌데.’

    이겸이 변명하기 위해 입술을 열려는 찰나, 재우가 말문을 텄다.

    “도현이 형 시뮬레이션 기억할 수도 있어요.”

    재우는 제가 다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겸은 딱히 상관치 않았다. 어차피 남궁산하 빼고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다. 그에 재우는 더욱 신이 나 어때, 우리 형 멋지지? 라는 톤으로 이겸의 능력에 대해 세세히 설명해 주었다.

    “뭐어!?!?”

    넋이 나간 얼굴로 재우의 말을 귀담아듣던 남궁산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내 만화 속 등장하는 캐릭터처럼 이겸의 손을 덥석 쥐었다.

    “…왜 그러세요?”

    “기억을… 잃지 않는다고?”

    “네. 뭐, 일단은….”

    “그렇다면…! 그렇다면!”

    산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려 오며 얼핏 그에게서 자그마한 환희가 느껴졌다. 이겸은 도현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았다.

    ‘이 형 갑자기 왜 그래?’

    그리 말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예쁘게 웃을 뿐이었다.

    남궁산하가 이겸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그럼! 그럼 알아봐 줄 수 있어!?”

    “…뭘요?”

    “다른 곳!!”

    다른 곳? 무슨 다른 곳? 알 수 없는 요청에 이겸의 얼굴이 굳자 남궁산하는 아까 보았던 소심한 성격과는 다르게 왜 그걸 이해 못 하나며 끄응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유레카!를 외쳤다.

    도현과 이겸을 제 쪽으로 끌어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 중얼거리기를 반복한다. 언뜻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겸을 불렀다.

    “이, 이겸아….”

    “네. 말씀하세요.”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도현이가 능력을 발동하면… 그건 어디까지 한정되는 걸까?”

    “…예?”

    “5분 단위로 리셋한다면, 도현이의 반경 몇 킬로미터만 해당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지구상, 넘어가 우주 전체가 리셋되는 걸까.”

    아, 그거? 일단 멀리 떨어져도 되긴 하던데. 이겸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산하가 눈을 반짝이며 둘에게 소리쳤다.

    “한번, 한번 시도해 보자!”

    “…무슨 시도요? 산하 형. 흥분하신 건 알겠는데 제대로 설명 안 해 주면 잘 이해가 안 돼요.”

    “헛! 나 흥분한 거 티 났어? 미, 미안해.”

    이겸의 언질에 산하는 그제야 부끄럽다는 듯 헛기침을 크게 한 뒤 고이 착석했다. 그 와중에도 손은 움찔움찔 가만두질 못했다.

    “그리고 반경 몇 킬로미터인지는 몰라도 멀리 떨어져도 시뮬이 작동되곤 해요.”

    이겸이 말을 덧붙였다.

    “헉, 대충 몇 킬로미터? 비행기는? 타국에 있을 때도 작동하나?”

    남궁산하가 의문을 폭발시켰다.

    “그건 잘….”

    이겸은 힐끔 도현을 쳐다봤다. 이 사람 왜 이러냐고. 좀 말려 보라는 눈길이었다. 그에 도현은 익숙하다며 태연한 낯을 했다.

    “옛날에도 산하 형이 궁금하다며 시도한 적 있어.”

    “시도?”

    “응. 나 빼고 아무도 기억을 못 해서 실패했지만.”

    당사자인 도현은 할 수 없는 실험이었다. 능력 발동 시, 그를 주위로 세상이 돌고 있다면 그가 그 시간 어디를 가든 능력이 적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은? 도현이 보지 못하는 곳을 볼 수 있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세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서도현의 능력은 신기하고, 특별하고,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도현조차 드넓은 우주 속 제 주변 상황밖에 알 수 없었다.

    이겸이 나타나기 전, 산하는 줄곧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인 도현과 도아를 따라 래터에 들어온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간 쌓은 정도 있었고, 무엇보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겸아, 잠깐 내 실험에 어울려 줄래?”

    그리고 내게 알려 줘.

    산하의 눈이 탐구하는 과학자처럼 반짝 빛이 났다.

    뭐야, 무서워. 이겸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다. 도현을 둘러싼 미지의 세계가 궁금한 것도 남궁산하였지, 자신은 딱히 호기심 같은 건 없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모른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잊힐 지독한 세계였다.

    느낌상 거절의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산하가 다급해졌다.

    “이… 이겸아!”

    “…네.”

    “고기! 고기 사 줄까?”

    “서도현이 자주 사 주는데요.”

    어제도 사 줬고.

    “어어. 그래? 그럼 다른 건? 다른 원하는 거 있어?”

    “딱히요? 있다 해도 웬만한 건 저 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요.”

    남궁산하는 끙끙거리며 고민하다 이내 활짝 웃었다.

    “무기! 무기 만들어 줄게! 내가 나중에 제대하면 좋은 무기 하나 만들어 줄게!”

    이겸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는 남궁산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남궁산하는 기술계라고 했었다.

    앞으로도 전투하려면 무기가 필요하긴 할 테고, 크리처 사체를 팔고 값비싼 무기를 구입한다면 남는 게 없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기술계를 자신의 길드에 들여 자급자족한다고도 했었고….

    이것저것 계산기를 두드려 본 결과, 결코 손해 보지 않는 장사였다.

    생각을 마친 이겸은 네 의견은 어떠냐며 도현을 바라봤다. 어깨를 으쓱이는 게 어찌 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이겸은 한숨을 내쉬며 질문했다.

    “근데 형은 그게 왜 궁금하세요?”

    “신기하잖아!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애초에 크리처가 나타나거나, 저희의 능력 모두 다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도현이가 보는 세계는 평행 우주일까? 그것도 아니면 0과 1의 시스템이 잘 구현된 어떤 것일까? 그 세계는 어떻게 생겼을까?

    산하는 이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미친 과학자처럼 중얼중얼하며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는 도현의 세계에 대한 한탄을 털어놓았다.

    소심하다가도 이런 부분에 한해선 과감하게 부탁하고, 중얼거림은 좀 섬뜩할 정도고… 성격을 당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를 조금 질린 눈으로 쳐다보던 이겸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그 대신 무기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응! 나 곧 제대거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들어 줄게!! 약속! 약속해! 아, 뭐든 증거가 중요하지? 지금 당장 계약서 작성하자!”

    “아뇨, 계약서까지는….”

    “이런 건 친한 사이일수록 확실하게 해야지! 입으로만 하는 대화는 돌아서면 아닌 척 시치미 떼는 게 다반수라고!”

    그 외에도 남궁산하는 인간은 이래서 문제야, 저래서 문제야 하며 인간 불신의 순간들을 늘어놓았다.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하던 훈련들은 일시 중지 하고 졸지에 과학 실험단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타이머를 켤게.”

    “응!”

    알람을 맞추는 도현의 말에 산하는 문제없다며 운전석에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안전벨트를 쥔 이겸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면허가 없는 이겸을 대신해 산하는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쥐었다. 5분간 도현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겸이 몇 번이나 이런 실험은 소용없다고, 반경이 뭔지 모르겠지만 5분 정도 차로 이동하는 걸로는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설득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남궁산하가 본디 실험이란 게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 가는 거라며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난 운전할 테니까 넌 주변 풍경에 집중해!”

    “…네.”

    난 떡을 썰 테니 넌 글을 쓰거라, 도 아니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산하였다.

    “두 분 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겸은 차가 출발함을 느끼고 도현의 뒤에서 손을 흔들던 도아와 재우에게 마주 흔들어 주었다.

    창밖 풍경에 집중하는 이겸과 거리상 도현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산하.

    이겸은 래터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크아웃 커피집에서 회색 후드 티에 흰 패딩을 입은 사람이 커피를 받는 것을 보았고, 더 거리를 벌려 흰색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담뱃재를 바닥에 떨구는 이들.

    처음 실험은 도현에게서 떨어질수록 주변이 어떻게 변하는지 테스트하는 거였다.

    이겸은 전부, 똑똑히 눈에 새겼다.

    “미안. 신기한 것만 보면 내가 정신이 좀 없어서. 내 억지에 어울려 줘서 고마워. 초면에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지?”

    “괜찮습니다.”

    “앗.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아닌데 괜찮은 척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이겸은 잠시 창밖에 시선을 떼고 운전 중인 산하를 쳐다봤다. 이 사람 인간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는데. 나중 되면 지구에 가장 해가 되고, 제일 먼저 멸망해야 할 종족은 인간이라고 외치고 다닐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이 그 포악한 서도현을 싸고돌 수 있는 거지? 부모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건가?

    “진짜 괜찮아요.”

    “그랬으면 좋겠다.”

    “…혹시 과학고 나오셨어요?”

    “헉! 어떻게 알았어?”

    “지레짐작이죠. 제 친구 중에도 거기 출신 있는데, 형이랑 좀 비슷하거든요.”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보면 탐구하거나, 그게 사물일 경우 분해, 조립하든가. 뭐든 성미에 찰 때까지 하나를 질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하. 그렇구나.”

    산하는 슬쩍 이겸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문을 텄다.

    “사실 헌터들은 군대 안 가도 되거든.”

    “정말요?”

    이겸의 눈에 살짝 기쁨이 담겼다.

    “응. 내가 소심하기도 해서…. 막 운동으로 근육도 키워서 성격을 바꾸려 노력했는데 쉽지 않더라고. 혹시 군대 가면 바뀔까 해서 지원했지…. 근데 타고난 거라 쉽게 바뀌진 않네.”

    “지금도 괜찮은데요? 굳이 바꿀 필요가 있나요?”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일 땐 누구보다 적극적이기도 했고, 이겸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래터엔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주장 강한 녀석들뿐이었고, 물론 과학에 한해선 독특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남궁산하 같은 성격은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때 5분 주기로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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