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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30)화 (30/102)
  • #030

    도현은 크리처가 자신을 향해 팔을 내뻗자 그대로 잡아당긴 후 손등에 칼을 꽂아 꾸욱 눌렀다. 이겸이 한 번 불렀었기에 다시 부를 필요도 없었다.

    익히 말했듯, 단 한 번도 합을 맞춘 적은 없지만 무수한 전투 경험이 있는 그들이다.

    도현의 주변에 있는 바닥이 태웅의 능력으로 인해 물처럼 물렁물렁해지더니 그가 크리처의 손등에 칼을 박아 넣은 채로 바닥을 향해 내리눌렀다.

    바닥이 원래 형태로 돌아가 딱딱해지자 크리처는 손과 발이 고정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도현은 그대로 고정된 크리처의 팔에 두 발로 올라섰다. 얇고도 가느다란 팔에 비틀거림도 없이 올라선 후 쭈욱 달렸다.

    아까는 오른쪽에서 가시가 날아왔었지, 그때는 이렇다 할 반응을 못 해 손바닥이 뚫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반대편으로 바꿔 들어 가볍게 공격을 튕겨 냈다.

    다음 공격, 제 팔이 바닥에 고정된 걸 깨달은 크리처가 팔을 빼내기 위해 다른 팔로 그 주변 바닥을 내리쳤었다. 그 결과로 팔이 빠지고, 도현은 중심을 잃고서 떨어졌다. 그 즉시 크리처는 바닥에 고정된 발마저 뚫고 나왔고 눈을 감고 있던 이겸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뼈를 부러트렸었다.

    이전 회차에서 경험한 일, 도현은 그 전에 미리 팔에서 내려가 크리처가 달려가는 궤도에 버티고 서서 몸을 웅크려 기다렸다. 땅을 박차고 크리처가 달려옴과 동시에 서늘한 검날을 휘둘렀다.

    ‘얕았나.’

    크리처의 속도가 빠르기도 했으나, 검의 길이가 짧은 탓에 깊이 박아 넣지 못했다.

    ‘다음 판엔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 5분 주기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도 그리 나쁜 건 아니니 좀 더 지켜보자.

    이겸은 도현의 공격에 상처를 입은 채 제게로 뛰어오는 크리처를 보았다.

    그땐 오른팔로 잡혔었다. 이전과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지만 습성이나 버릇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확인은 필수. 다행히 이전과 같은지 크리처가 제 오른쪽 어깨 근육을 잠시 수축함과 동시에 이겸에게 팔을 뻗었다.

    그걸 확인한 이겸은 눈을 감은 채 왼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그러고는 바닥을 축 삼고 반 바퀴 몸을 회전한 후, 옆에 위치한 남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 어어?”

    이름도 모르는 자였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몇 번의 반복을 통해 꿰듯이 알고 있었다.

    이내 크리처의 왼쪽 다리 근육이 수축함을 보았고, 남자를 끌고 아래쪽으로 함께 몸을 구른 후 크리처의 등 뒤에 섰다. 등엔 빠졌던 가시가 새로 돋아나고 있기도 했고, 또 가시가 빠져 움푹 꺼진 부분도 존재했다.

    생소하고도 낯선 풍경이었다.

    그 부분 틈 사이로 스며든 물이 힌트를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었던 가시. 보통 사람이라면 알 수 없었을 정보. 이겸은 언제나 보고 있었다. 물을 통해 보고 있었다. 앞면뿐만 아닌, 앞뒤, 좌우, 위아래, 모든 면들을 3D처럼 간파했다.

    그는 제 손이 어떻게 되든 괘념치 않고 그의 목, 그러니까 경추에 제일 가까운 부분에 박혀 있는 검은 가시를 잡아 빼내었다.

    사방이 칼날처럼 첨예한 탓에 손에 선혈이 가득 고였다. 나이프를 맨손으로 만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 혈흔이 튀었다. 이겸은 그럼에도 상관없다며 남자에게 가시가 빠진 크리처의 경추를 가리키고는 태연하게 지시할 뿐이었다.

    “공격해.”

    녀석의 약점이었다.

    부식.

    이겸의 옆에 있던 남자의 능력은 부식이었다.

    크리처의 목뒤가 빠르게 썩어 갔지만 아쉽게도 깊이 파고들 정도는 아니었다. 이겸은 한쪽 눈살을 구겼다. 좀 더 들어가야….

    아. 뒤쪽의 무언가를 확인한 이겸은 크리처의 경추에 공격을 쏟아붓던 자를 홱 잡아채 끌어냈다.

    “비켜.”

    부지불식간에 달려온 도현은 짧은 명령과 한 번의 뜀박질로 단번에 크리처의 등에 올라탔다. 동시에 5분이 지남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며 현재의 지금은 선택되었고, 과거가 되었고, 굳혀졌다.

    도현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목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목 주변이 부식되어 썩어 문드러지고 있던 터라 검을 꽂을 때 일정 부분까지는 마치 물복숭아를 벨 때처럼 쑤욱 들어갔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끼에에에엑-!!”

    크리처의 어깨에 올라탄 서도현은 불현듯 경호실장이 이것의 목에 장검을 꽂아 넣을 때 낸 낫지 않은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약점.’

    짧게 생각을 마친 서도현은 쥐고 있던 검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러나 크리처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몸부림치는 탓에 그 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는 것만으로 벅찼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공격을 중지하고 제 팔을 뒤로 뻗어 위에 올라탄 도현에게 공격을 가했다.

    ‘우선 한발 물러섰다가….’

    새로 시작된 현재를 시뮬로 돌리고 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한 뒤에 다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도현이 크리처의 위에서 내려오려 할 때쯤.

    문득 이겸이 피가 고인 손을 무릅쓰고 검을 꽉 쥐었다. 마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화끈거리는 눈을 질끈 감고 진격했다.

    왼쪽, 대각선, 뒤, 오른쪽, 오른쪽, 다시 왼쪽.

    모든 걸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시야가 가진 특권이었다. 볼 수 있다면 대응을 할 수 있고, 대응을 할 수 있다면 당하지 않는다.

    잠시 주춤하는 기색도 없었다. 도현은 이겸이 제게 오는 공격들을 쳐 내는 걸 확인하자마자 크리처의 경추에 검을 더 깊게 찔러 넣었다. 켁, 숨이 멎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검의 길이가 너무 짧은 게 한이었다.

    그때였다.

    크리처의 등에 올라탄 서도현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타격을 받았다. 그는 공중에서 여유롭게 한 바퀴 구른 후 땅에 사뿐히 발을 디뎠다.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크리처가 사라지고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뭐야? 어디 갔어?”

    “얘 투명화도 하나?”

    “갑자기 사라졌는데?”

    크리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그들이 싸웠던 상대가 환영이라도 된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침 검은 막으로 막혀 있던 협회 건물의 입구도 열렸다.

    뜬금없는 상황에 모두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이겸은 줄곧, 줄곧 의문이 들었다. 서도현의 말대로 정말 습격이라면 블러드 헌터의 목적은? 협회에 쳐들어온 이유는? 무엇보다… 적이 과연 한 명에 불과할까.

    달라진 점을 찾아. 아까와 달라진 점. 아주 자그마한 단서도 놓치지 않도록. 모든 퍼즐 조각을 재분해하고 재조립했다.

    타다닥-!

    경황망조한 상황 속, 오직 이겸만이 빠르게 발을 굴렀다. 그가 힘차게 소리쳤다.

    “서도현!!! 네 왼쪽!”

    도현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왼쪽을 향해 힘차게 팔을 뻗었다.

    “……?”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제가 쥔 칼날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겸이 미간을 구겼다. 물웅덩이가 생긴 바닥을 찰박이는 미세한 소리, 발을 땅에 박참에 따라 사방으로 튀기는 물. 부서지는 퍼즐 조각.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누군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르겠네.’

    무언가가 사람들 주변을 지나 빠져나가는데 도현과 태웅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이름을 알지 못해 정확한 지시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때 서도현이 외쳤다.

    “체스보드! 알아!?”

    투명한 무언가의 뒤를 쫓던 이겸이 멈칫했다. 체스보드? 가로 a부터 h, 세로 1부터 8까지. 64개의 정사각형.

    협회는 건물이 넓은 탓에 64개의 칸으로 쪼갠다 한들 한 칸, 한 칸의 크기가 컸다. 정확한 위치 추적이 불가능할 터였다. 그럼 한 번 더 쪼개면 그만이다.

    “f5! 그 안에 b4!”

    마침 최태웅이 그 일대의 바닥을 출렁이게 했고, 얼음 사용자가 재빨리 건물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 사이로 도현이 던진 검이 정확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가 푹-, 무언가에 꽂혔다.

    아마 누군가의 다리로 추정된다. 피가 떨어진 웅덩이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겸은 감고 있던 눈을 꿈틀거리며 재차 말했다.

    “f8에 d7!”

    마침 그 주변에 체스보드를 알고 있던 사람이 존재했다. 그는 칸의 개수를 세더니 제 오른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옷자락만 스치곤 아슬하게 놓치고 말았다.

    그 후 와장창- 굉음이 일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얼음 장벽이 맥없이 뚫리면 기어코 적의 탈출을 허락하고야 말았다. 눈 뜨고 코 베인 꼴이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전개에 다들 주변을 살피며 현상을 파악할 때.

    그 틈새로 도현이 이겸에게 나지막한 신호를 보냈다.

    “리셋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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