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이겸은 다시금 몰두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만 늘었다. 눈을 감아도 아까와 같은 풍경은 보이지 않고 어둠만이 존재했다.
왜, 왜 안 되는 거지? 어째서? 반복되는 상황이라면 지금쯤 보여야 할 텐데…. 모든 것이 훤히 보였던 첫 번째 판과는 달리 두 번째, 세 번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다른 거지? 첫 번째와 지금의 차이점은 뭐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래서 안 되는 건가?
“집중해.”
순간 이겸이 딴생각을 하고 있단 걸 눈치라도 챈 건지 도현이 그를 불렀다. 이겸의 떨려 오는 손이 그에게도 느껴졌다.
“후우….”
재차 집중을 가하기 위해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주 잡은 손은 따스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상상이라도 해.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궁금하지 않아? 크리처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지인의 죽음에 슬픔을 삼키던 최태웅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감이 안 잡힌다면 가까운 것부터.
이겸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현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제 왼편에 위치해 있고, 잡은 위치로 보아선 아마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서 있을 거다.
그가 입은 옷은? 검은색 목 티와 검은 슬랙스를 입고 코트는 벗어 둔 채였다. 지금은 스프링클러에 의해 젖어 있을 테다.
표정은? 지금 무슨 얼굴을 하고 있지? 그것까지 모조리 상상해. 너무 깊이 상상해서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그래. 마치, 마치….
‘언제 깰지도 모를 꿈에서 사는 건 너도 답답하잖아?’
꿈을 꾼다고 생각해.
번쩍! 이겸의 눈이 트였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스프링클러의 물에, 모든 장면들이 퍼즐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고, 이겸은 순식간에 그 모든 걸 조합해 낼 자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퍼즐 하난 그 누구보다도 빨리 맞출 자신이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기억력을 지녔으니까.
모든 방향과 사물의 위치, 테두리의 끊긴 부분과 연결되는 다른 조각들, 이쪽에서 보인 시각과 저쪽에서 보인 시각.
전부를 이해했고 전부를 맞추었다.
크리처가 보였고, 이겸에게 팔을 뻗었다. 도현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내 떨어지는 물이 단검에 부딪히고, 반짝이는 날붙이에 비친 도현의 얼굴조차 선명히 보였다.
제게 뻗어져 오는 팔과 함께 전투로 인해 움푹 팬 바닥 속 고인 물을 박차고 가까워지는 크리처.
빈틈. 그들이 그토록 찾던 빈틈과 공격의 궤도.
크리처가 저를 향해 뛰어온다. 어째선지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보이지 않을 터인 그의 등 뒤로 가시가 돋아나는 걸 보았고, 오른쪽 어깨 근육이 움직이는 걸 봤을 뿐이다.
이겸은 눈 감은 상태 그대로 도현을 잡고 왼쪽으로 몸을 숙였다. 크리처의 팔이 미미한 차이로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쳤다. 고개는 바닥을 향해 있는데 머리 위의 크리처 손등이 보였다.
“윤이겸?”
“아….”
서도현의 부름에 이겸은 짧은 탄성을 뱉었다.
시야에 사각은 없었다.
인간들이 사는 공간, 흔히 말해 3차원. 앞뒤, 좌우, 위아래, 세 가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볼 수 있다. 풀어 설명하자면, 세 가지 방향‘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겸은 달랐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그 너머. 혹은 그 너머의 너머. 공간적 움직임은 한정되어 있어도 다방면으로 볼 수 있고 그 시각을 합칠 수 있다. 자신의 모습 또한 상대방의 시선으로 제삼자가 되어 볼 수 있다.
찰나에 사는 3차원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다. 현재조차 결국 과거로 변한다. 순간을 스쳐 지나갈 뿐인, 찰나를 살아가는 미개한 존재들.
현재는 과거라고? 순간을 스쳐 지나간다고? 찰나라고? 이 또한 이겸은 특별했다. 도현의 능력으로 시간을 반복, 반복, 또 반복 시뮬레이션이 가능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박스 속의 고양이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박스의 문을 열기 전까진 죽음과 동시에 살아 있다.
동전처럼 한 면을 인식하면 다른 반대쪽은 인식이 불가능한, 관측이라는 아득한 개념.
물이 있는 한 이겸은 그 양면을 볼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 그 모든 걸 넘어선다면, 흔히 말하는 4차원 공간. 그것은 지금 이겸의 시야와 닮아 있지 않을까.
이겸은 문득 궁금해졌다. 순전히 욕심에 불과했다. 시야가 하나 더 늘어나면 어떨까. 1초가 급박한 대치 속에서도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뜬 건 그 이유였다.
그때, 하나가 되었던 퍼즐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사방을 부유하던 감각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꿈에서 깬 기분. 정신이 빠르게 돌아오며 눈앞에 다가온 크리처의 손이 보였다.
삐비빅-.
도현의 알람 시계가 울렸다.
***
“언제 출격합….”
도현은 태웅의 재촉을 무시하고 이겸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성공한 거야?”
태웅을 무시하는 건 이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야 태웅은 한 번 질문한 것이겠지만 그들에겐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지루한 질문이었다. 질문에 피로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이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어. 근데 눈 뜨니까 사라졌어.”
“인제 와서 묻는 건데. 네 능력이 뭔데? 물과 관련된 건가?”
“그냥… 잘 보여. 눈이 여러 개인 것 같아.”
여러 개?
방금 전 눈을 감고도 크리처의 공격을 피한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눈이 여러 개면 여러 각도에서 보인다는 건가? 짧은 시간 내에 정답에 근접한 결과를 내었다.
능력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서도현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말을 더 얹었다.
“이번에도 할 수 있어?”
이겸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대충 느낌은 잡아냈다. 잡은 걸 거머쥐어라. 성공의 느낌을 잊지 마.
“어. 할 수 있어.”
“좋아. 결과가 좋으면 이번 판은 굳힐게.”
“…….”
도현은 앞으로 단 세 번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했다. 그걸 지금의 전투에만 쏟아붓기엔 너무 아까웠다. 좀 더 먼 미래를 봐야 했다.
굳히기. 가상 세계에서 싸운 전투가 마음에 들었다면 그 선택지를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선택은 곧 과거가 되고 더는 돌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죽지 마.”
도현은 가시를 내뿜기 시작하는 크리처를 보며 스산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은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도현의 말을 토대로 하면 지금의 전투는 다음 반복될 똑같은 상황을 좀 더 낫게 하는 데 쓰이지 않을 거다.
현실.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이다.
실전 상황이란 소리였다. 물론 서도현 본인이나 이겸이 큰 부상을 입는다면 굳힌다는 말을 취소하겠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은, 도현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부상은 어느 정도 감내하고 무시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 누구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이겸은 순간 자신이 래터로 들어와 그의 편이 되었다는 게 내심 안심되었다. 적어도 남들보다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남들보다 많은 죽음을 맛보겠지만,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죽음의 공포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이겸은 다른 이들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고 있는 도현을 보며 생생한 눈을 빛냈다.
“준비됐어.”
드디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굴 준비가. 내가 죽지 않게.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끔 할 준비가. 비로소 승리의 기반이 다져졌다. 도현은 이겸의 다짐에 만족스레 입술을 말아 올렸다.
“멋지네.”
이윽고 위층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출격을 외쳤다.
***
행동 빠른 서도현이 미리 언급이라도 해 놨던 건지 불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이가 스프링클러를 터트렸다.
그 후 즉시 상상에 돌입했다.
이겸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부터 상상했다. 제게로 떨어지는 물, 물에 젖으면 체온이 낮아지고 행동이 굼떠진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 일반인을 버젓이 뛰어넘는 헌터들에게 있어 그건 불편함 축에도 들지 못할 것이다. 이겸 역시 그로 인한 불편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땅에 고인 물웅덩이, 폭격음과 비슷한 전투 소리, 굴러다니는 얼음 조각, 속눈썹에 빗물이 스며들었다.
그러기를 잠시, 조각조각 잘게 잘린 장면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이겸은 저를 중심으로 퍼즐 조각을 맞췄다.
모든 걸 한눈에 파악하고 그중 제일 중요한 걸 포착했다.
뛰어갈 만한 시간은 확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발아래엔 조각난 무기들이 즐비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재빨리 집은 후, 그를 향해 힘껏 던졌다.
“악…!”
팍! 소리가 나며 이겸이 던진 물건에 머리를 맞은 남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머리 위로 크리처의 가시가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갔다.
‘…힘이 좀 셌나.’
남자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죽는 것보단 기절한 게 나으니까.
그리고 다음.
공중에 뜬 탓에 불시에 날아온 크리처의 공격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을 포착했다. 또 한 번 물건을 주워 던졌다. 이번엔 급소도 아니었고, 공중에 떠 있던 사람도 이겸이 던진 물건을 보고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크리처의 공격보다 한 층 빨리 던진 물건이 그를 향해 날아갔고, 그가 팔을 들어 방어함과 동시에 저 멀리 날아 크리처의 공격 궤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빠각,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목숨이 사라지는 것보단 팔 하나 부러지는 게 나으니까.’
무엇보다 반대편 팔이 성하다면 전투에는 임할 수 있을 거다.
이겸은 그 후에도 망설이지 않고 유려한 동작으로 움직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5분 남짓한 시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몸의 떨림이 멎어 있었다.
또 다음. 다음, 그다음. 계속된 능력 사용의 부작용인지 눈에 모래알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까끌까끌하고 때로 시큰거렸다.
순간 크리처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크리처의 주변에 있고 그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최태웅!”
나이 따위 알 게 뭐야. 목숨이 달려 있는데.
빠르게 움직인 태웅이 속성 변환을 시키자 크리처 주변의 바닥이 볼록거렸다. 두 번째 회차에 겪었던 일과 동일했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미래를 알고 있는 자는 대비할 수 있다. 그것은 1시간 후의 미래든, 10분 후의 미래든, 1분이든, 혹은, 설령 1초라도 매한가지다.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빠른 대처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곧 희망의 불씨였다.
도현은 부러 두 번째 회차와 같은 위치에 다가섰다. 씨익 시원한 웃음을 걸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무기를 주워 들었다.
드디어, 모든 주석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