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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28)화 (28/102)
  • #028

    “…네? 저요?”

    “그럼 누구겠어요. 빨리요.”

    “네… 네!”

    이겸은 천연스레 부탁하고 난잡한 상황들을 시야에 가득 담았다. 전투에 도움 될 실력이 아니라면, 상황이라도 살펴라.

    나도 서도현과 다를 바 없잖아. 반복되는 일을 기억하고 있잖아.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에, 그다음에 또 도전하면 그만이야.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엉터리인 무언가라도 해.

    서도현과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면 어설프게라도 힘을 보태.

    서도현은 전투 중이라 시야가 한정돼 있는 데다 전투도 해야 하고, 주변 상황도 살펴야 하고, 사람들에게 그때그때 지시도 내려야 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이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촤르륵-. 스프링클러의 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겸은 그것을 맞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까와 달리 눈앞이 어두컴컴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크리처의 팔에 올라타 그의 안면 앞까지 달리던 서도현이 또다시 외쳤다.

    “윤이겸!”

    왜? 어째서?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거지? 크리처가 또 내게 무기를 던졌나? 하지만 각도가 틀릴 텐데….

    아, 우린 아까 전과 다른 행동을 취했었지. 그로 인해 도출되는 결과도 변할 터였다.

    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보일 듯도….

    “눈 떠!!!”

    그의 불호령과 함께 이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크리처가 바로 눈앞에 있다.

    이건… 누구의 시야지?

    꽈악. 이겸의 목이 기괴한 손에 붙잡혔다.

    아. 나의 시야구나. 결국 보지 못한 거구나.

    팔과 다리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을 텐데, 언제 빠져나온 거지. 힐끔 시야를 굴리니 크리처가 뚫고 나온 곳의 시멘트 바닥 잔재가 움푹 패어 있었다.

    아직 도현의 손목시계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될 뿐. 고통은 아주 잠깐일 거다. 뚜둑. 이겸의 목뼈가 부러졌다.

    ***

    “언제 출격합니까?”

    “시끄러.”

    서도현은 태웅의 재촉을 익숙하게 제지하고는 윤이겸을 응시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서늘한 낯이었다.

    “겸아, 아까부터 뭐 하자는 거야.”

    “뭐가.”

    “왜 자꾸 눈을 감냐고. 윤이겸. 목숨이 장난이야?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너 못 지켜.”

    이겸 또한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직시했다. 목숨이 장난이냐니. 솔직히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무수한 말들을 뒤로하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2차 각성 능력에 대해 테스트해 볼 게 있어. 일일이 해명할 시간 안 되니까 일단 믿어.”

    “…….”

    서도현은 고민했다.

    전투의 한복판에서 눈을 감겠다고? 그걸 굳이 지금 테스트하겠다고? 스프링클러가 터졌었지. 첫 번째, 두 번째 모두 터졌지만 두 번째엔 보다 빨리 터졌었다. 왜? 어째서? 이겸이 의도했나?

    아주 짧은 시간 수천 개의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하지만 구태여 답을 찾지 않았다. 이것저것 따져 봤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제일 중요한 건 딱 하나.

    “전투에 도움이 돼?”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이 사태 속에서 2차 각성에 힘쓸 정도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그렇게 물어 왔다.

    이겸이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내 얼굴을 내리깔고 잠시간 계산했다.

    시야가 시원스레 트였던 아까의 광경. 그 느낌만 잡을 수 있다면 도현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었고, 1초가 급한 상황 속에서 보다 명확히 적의 경로와 공격의 궤도를 파악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일까.

    죽음을 목전에 둔 자를 발견하는 일도 가능했다. 발견은 곧 구조로 이어지고, 전투에서 생존자의 전력만큼 중요한 건 없을 것이다.

    사실 저울질할 것도 없다. 각성하면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 생존자를 늘려 상황의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겸은 손을 올려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솜털이 섬뜩하게 위기를 알렸다. 눈을… 감을 수 있을까.

    깊게 함몰된 두 눈, 군데군데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피부, 입술 틈으로 뱉은 숨에는 악취가 아직도 코에 맴도는 것 같았다. 목이 깊게 조이며 숨통이 막혔다.

    “윤이겸. 전투에 도움이 되냐고.”

    서도현의 독촉에 이겸이 고개를 바짝 들었다. 동공이 떨려 왔다. 주륵.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할 수 있냐, 할 수 없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억하는 자가 두 명이라면, 두 명의 값을 해. 서도현의 짐을 덜어. 승리의 가능성을 높여.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겸은 얼굴을 위로 해 천장을 향해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간단히 진정될 박동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슬슬 나가서 싸우자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지체됐나.

    서도현이 기다려… 라고 말한 뒤, 정적이 흐른 몇 분의 시간. 지시를 내릴 여유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가 만들어 놓은 공백의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전부 다 쓸 수는 없었다.

    이겸은 감았던 눈을 떴다. 시발, 그냥 해. 죽는 게 대수야? 몇 번이나 죽어 봤잖아. 거기에 한 번 더 추가될 뿐이야. 실제로 진짜 죽지도 않는걸?

    떨림이 멎지 않은 신체와 달리 이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도현을 곧바로 쳐다봤다.

    “어, 도움 돼. 그럴 거야.”

    그러곤 돌아올 답변을 기다렸다. 답변은 꽤나 간단했다.

    “알았어.”

    “……?”

    “이번 회차는 포기할게.”

    도현의 눈동자에 어리둥절한 이겸의 표정이 담겼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헌터 테스트에서 두 번, 방금 전투를 포함해 오늘만 벌써 여섯 번을 썼어.”

    하루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총 열 번. 앞으로 네 번밖에 남지 않았다. 그사이에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

    도현이 가시를 뿜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 크리처를 가리켰다. 그 안에 쟤를 물리칠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고.

    “윤이겸. 단 한 번만 줄게. 그 한 번 동안 해내 봐.”

    “…못 하면?”

    이겸의 질문에 도현이 몸을 뒤로 빼며 살포시 웃었다. 이미 지시를 내릴 시간도 지났다.

    어차피 이번 회차는 망했어. 그래도 전투에 몰입해 머리에 열을 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한숨 돌리는 판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윤이겸은 제 가상 세계까지 기억해 낸 규격 외의 존재였다. 딱히 실패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왜? 자신 없어? 못 할 거 같아?”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미소를 자아냈다.

    이겸은 단단히 결심한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해 볼게.”

    좋은 태도라며 이겸의 머리에 손을 올려 가볍게 토닥이던 도현은 계단 한편에 떨어진 이겸의 목도리를 주워 들었다.

    제대로 매듭을 짓지 않은 탓에 계단을 오르던 중, 줄곧 떨어져 있던 걸 이번 회차에서야 겨우 발견했다.

    그는 네가 뭔데 내 머리를 토닥이냐는 불퉁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겸의 목에 목도리를 감쌌다. 전투 중에 끈이 나풀거리지 않도록 매듭 속에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만족스레 중얼거렸다.

    “됐다.”

    “뭐 하는 짓이야. 더워.”

    잡아 풀려는 이겸의 손을 막았다.

    “안 돼. 쿠션이야.”

    “…….”

    도현의 제지에 이겸은 멈칫했다. 이 정도 쿠션으로는 크리처에게 어림도 없을 텐데. 더군다나 신체를 둔하게 만들었을 때의 쓸모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겸은 목도리를 풀 수 없었다.

    ‘…뭐, 맨목보다는 낫나.’

    마침 사방에서 검은 가시가 뿜어져 나오며 경호실장이 가시 속을 뚫고 달려들어 크리처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전투에 관심도 없는지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이겸과 도현의 대화를 이해해 보려 했지만 알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태웅은 벌처럼 크리처를 향해 뛰쳐나가는 경호실장의 몸짓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끼에에엑-!”

    마침 위층 비상계단에서 내려오는 지원군의 발소리가 들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리처의 기괴한 소음과 같이 서도현이 중얼거렸다.

    “출격.”

    ***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도현은 3층에서 온 지원군에게 말을 걸지도, 함께 지하에서 올라온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 또한 최태웅에게도 경호실장의 죽음을 알렸다.

    그저 단순히 이겸의 시선이 향한 스프링클러를 보고 어떤 이를 붙잡아 그쪽을 향해 불을 던지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물이 머리카락을 적시고, 그는 눈을 감은 이겸의 옆에 섰다.

    눈앞에 보이는 약자를 가장 먼저 공격하는 습성 때문인지 크리처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다가도 이겸이 시야에 들어오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때문에 도현은 이겸이 오로지 2차 각성에 집중할 수 있게 이번 회차에선 그의 옆에 서서 혹여나 있을 공격을 막기로 다짐했다.

    그때 얼굴에 잔뜩 피를 적신 자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정장을 입고 있는 걸로 봐선 경호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고성을 질렀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공격해!!!”

    서도현은 소란 속에도 입술을 잘근 씹어 가며 집중하고 있는 이겸을 확인하곤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조용히 제 입술 위로 검지를 올렸다.

    경호원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에게 성큼 다가와 멱살을 쥐어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지금 우리는! 실장님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던 피를 천장에서 내려온 물이 씻겨 주었다. 더불어 눈물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렸다.

    도현이 제 멱살을 쥔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시끄럽게 굴지 마.”

    도현은 경호원의 목뒤를 가격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1층에서 크리처와 대치하느라 진이 다 빠져 있는 상태라 기절시키는 건 몹시도 쉬웠다.

    이겸은 감은 눈을 꿈틀거리며 갑자기 조용해진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도현?”

    순간 제 뺨의 물기를 닦아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뒤로 몸을 뺐지만 손이 꽉 잡혔다. 익히 알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있어.”

    정말 우습게도, 그 말에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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