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마침 손목시계의 알람이 3분이 지남을 알렸다.
“그럼 출발하지.”
좁은 비상계단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붙어 있었다. 그중 선두 쪽에 서 있던 최태웅은 공기 중 뜨거운 호흡을 내뱉으며 손안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정세를 살폈다.
크리처다. 정말로 뮤턴트 크리처가 있었다. 그 주변으로 익숙한 얼굴들도 보여 더욱 암담한 심정이었다.
같은 협회 소속.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했던 소중한 동료들이었다. 다들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있거나 서로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제 동료들이 적의 최전방에 서서 곤죽이 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편하지가 않았다. 태웅은 한시라도 빨리 뛰쳐나가 동료들을 구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도현은 잠시 대기하라는 명령만 내릴 뿐 별다른 신호는 보내지 않았다. 언제는 한시가 급하다며 빨리 지상으로 올라가자 했으면서 앞뒤가 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제 와서 뮤턴트 크리처가 겁나기라도 하는 건가?
두려움으로 상황을 통솔한 건 좋은데,
‘좀 더 평화로운 해결 방법도 있었을 텐데.’
좀처럼 납득하기는 힘들었다.
“언제 출격합니까?”
최태웅이 초조한 듯 보챘지만, 도현은 무심하게 일축했다.
“기다려.”
태웅은 언짢은 표정을 애써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와서 그의 말을 거부해 봤자 이득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분이 더 흐른 후, 사방에서 크리처의 검은 가시가 뿜어져 나오며 경호실장이 가시 속을 뚫고 달려들어 크리처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무슨!”
그 광경에 깜짝 놀란 상혁의 동공이 축소했다.
“끼에에엑-!”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리처의 기괴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마침 위층 비상계단에서 내려오는 지원군의 발소리가 들렸다. 서도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출격.”
***
태웅은 도현의 폭력적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평화로운 해결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겸이 눈을 잘게 떨며 다급한 손길로 도현을 붙들었다.
“야…, 서도현 나 방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겸아, 전투 중엔 눈 감으면 안 되지.”
“그게 아니라….”
태웅은 숨을 헐떡이는 이겸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이제 막 1차 각성을 마치고, 래터에 들어간 신입일 뿐인데 협회 내의 크리처 습격 현장에 와 있다니. 혼란스러운 상황이 가중되어 누구보다 정신없겠지.
‘저분만은 꼭….’
꼭 살려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그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져 도현을 보챘다.
“언제 출격합니까?”
도현은 태웅의 말을 무시하고 불쑥 이겸의 옆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너. 촛불도 아니고, 작은 화염구로 크리처 화만 돋우지 말고 기다렸다가 응축해서 거센 화염으로 공격. 그다음 넌 왼쪽으로 한 바퀴 구른 후 돌진. 너는 이상한 데 얼음만 날리지 말고 차라리 적의 몸을 고정하는 데 사용하도록. 거기 넌….”
도현은 짧은 시간 동안 대여섯 명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서도현이 내 능력을 어떻게 알지?”
“뒷조사한 거 아니야?”
“뭐? 근데 그건….”
“야, 래터잖아. 래터가 뭘 못 하겠어. 걔네는 뒷조사한다는 소문도 있어.”
그렇게 마지막 타자. 도현의 시선이 태웅에게로 향했다.
퍼억-! 단숨에 태웅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처박았다.
“동료가 죽어 슬픈 건 알겠는데, 전투 중에 넋 놓고 있지 마라.”
갑작스러운 공격에 태웅의 눈이 부릅뜨였다. 머리가 띵- 울렸다.
“저는 넋 놓은 적이 없…!”
“그렇겠지. 조심하라고 주의 준 거다.”
무슨 주의를 이딴 식으로 주는가. 그로선 황당할 노릇이었다. 주변의 모든 이들도 전투 준비를 멈추고 어이없는 시선으로 서도현을 쳐다봤다.
그는 저를 향한 시선들을 가볍게 무시하며 태웅에게 일렀다.
“너는 크리처의 오른편에 서서 공격해.”
“…알겠습니다.”
그가 불퉁하게 답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재 지휘관은 서도현. 지금 상황에 반박하고 나서 봤자 혼란만 가져올 뿐이었다.
마침 사방에서 검은 가시가 뿜어져 나오며 경호원들의 방패에 막혔다. 그 사이를 경호실장이 뚫고 달려들어 크리처의 목에 검을 힘껏 꽂아 넣었다.
“…무슨!”
깜짝 놀란 태웅의 동공이 일순간 축소했다.
“끼에에엑-!”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리처의 소음이 울려 퍼지고 위층 비상계단에서 내려오는 지원군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서도현이 나지막이 신호를 보냈다.
“출격.”
***
위아래 층에서 크리처를 에워쌌다.
어떤 이는 힘을 응축시켰다가 불을 쏘았고, 또 어떤 이는 왼쪽으로 한 바퀴 구른 후 돌진했다. 덕분에 제게 날아오는 크리처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조금만 늦게 굴렀으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다른 어떤 이는 얼음의 특성을 이용해 크리처가 날뛰지 못하도록 바닥과 그의 발을 얼려 고정했다. 그러나 크리처가 거치적거린다며 다리를 휘젓자 얼음은 힘도 못 써 보고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안 되나.’
크리처의 오른쪽을 파고들던 태웅의 시야에 문득 왼편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경호실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기절… 잠깐 기절한 거겠지.’
‘동료가 죽어 슬픈 건 알겠는데, 전투 중에 넋 놓고 있지 마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재차 억눌렀다. 태웅은 그의 말을 되새기며 제 능력을 발동시켰다. 얼음으로 붙잡지 못한다면 더 단단한 걸로 붙잡으면 그만이다.
태웅의 눈이 번쩍이더니 크리처 주변의 바닥이 볼록거리며 물렁물렁해졌다. 이내 바닥이 물이라도 되는 양 크리처의 다리를 빠트린 후, 다시 단단해진 시멘트 바닥이 그의 다리를 붙들었다. 최태웅의 능력, 속성 변화였다.
도현은 씨익 웃음을 걸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무기를 주워 들었다. 그러곤 다리가 고정된 크리처가 도현을 향해 팔을 내뻗자 그대로 잡아당긴 후 손등에 칼을 꽂아 꾸욱 눌렀다. 이후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최태웅!!”
“네!”
그걸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눌 것도 없었다. 단 한 번도 합을 맞춘 적은 없지만 무수한 전투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다.
순간 도현의 주변에 있는 바닥이 물처럼 물렁물렁해지더니 도현이 크리처의 손등에 칼을 박아 넣은 채로 바닥을 향해 내리눌렀다. 아까처럼 크리처는 손이 빠진 바닥이 원래 형태로 돌아가 딱딱해지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리와 팔이 고정되었다. 크리처가 달리 공격할 방법은 없었다.
도현은 그대로 고정된 그것의 팔에 두 발로 올라섰다. 얇고도 가느다란 팔에 비틀거림도 없이 올라선 후 쭈욱 달렸다.
이겸은 그의 전투를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겼다.
그들에겐 이번이 두 번째 국면이었다.
첫 번째는 아수라장이었다. 공격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 동료의 죽음에 넋을 잃은 최태웅, 서도현의 지시를 잘 따르는 지하에서 올라온 지원군과 달리 통제가 안 되는 위층의 협회 사람들.
경호원들이 애써 시간을 벌어 가며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 간절함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무참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이 버틴 시간보다도 더 빨리.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소 길드의 어중이떠중이들과 햇병아리 신참들뿐이니까. 상시 전문 훈련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였다. 주변 동료들이 공격당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서도현은 움직였다.
오직 서도현만이 움직였다.은
이번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그에겐 다음이 있었다. 다음 전투를 위해 주변인들의 능력을 기민하게 살피며 크리처의 공격 패턴을 찾아 헤맸다.
살이 찢겨 나가도 뼈가 부러져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건 무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겸은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이겸에게 속행되는 공격들은 서도현이 가까스로 쳐 냈다. 마치 넌 살 거야, 내가 그렇게 해, 라는 말을 지키듯이.
왜? 어째서? 어차피 죽더라도 리셋될 거잖아. 별 의미 없잖아? 지금 상처가 난다 해도 능력이 쓰이면….
그러던 중 돌연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다. 조금씩 불을 다루던 사람이 천장 위의 스프링클러를 건드린 것이다.
순간 이겸의 시야가 훤히 트였다. 천장 위에서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듯 아주 훤히. 모든 게 시원스레 내비쳤다.
그 자리 그대로 서서 홀린 듯 제 두 눈을 손으로 덮고 있는 저의 모습도.
“윤이겸!!!”
저를 부르는 서도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눈을 뜨라고 소리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이 보이는걸.
보인다고.
크리처가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를 주워 들어 내게 던지려는 것도.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본 그 각도가 조금은 틀렸다는 것조차도.
맞지 않을 공격이야. 피하지 않아도 돼.
손으로 눈을 막고서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2차 각성은 능력의 개화.’
물. 물이 매개체였다.
물이 곧 나의 시야다.
번뜩, 눈앞의 현상이 되감기고, 정신을 차려 보니 비상계단 쪽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야…, 서도현 나 방금….”
“하아…. 겸아, 전투 중엔 눈 감으면 안 되지.”
낯을 찌푸리고 얘기하는 서도현 때문에 이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저기요. 스프링클러에 불 좀 던져 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