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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26)화 (26/102)

#026

이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는데도 그의 얼굴은 연신 굳어 있었다. 그러다 또 한 번 도현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관통되었던 부위를 재차 확인했다.

아까 전 크리처의 모습을 선명히 상기했다.

등 뒤에는 검은 가시가 돋아 쉬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고,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강철과도 같은 팔은 어깨에 두 개, 늑골에서 튀어나온 두 개, 도합 네 개의 팔이 있었다.

입을 열면 하수구에서나 나는 코가 썩을 것 같은 냄새를 풍긴다. 함몰된 눈을 지나면 골반 아래부터 중심을 잡기도 어려울 법한 비쩍 마른 다리가 보인다. 그러나 약 3척은 되는 듯한 발바닥이 신체를 단단히 지탱해 주고 있었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아. 나는 죽지 않았어. 정신 차려 윤이겸. 많이 당해 본 거잖아. 처음이 아니잖아.

정말 같잖게도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첫날, 서도현이 저를 몇 번이고 관통해 죽였던 그날이 지금, 오늘의 위로가 되었다. 그날이 없었다면 지금쯤 넋이 나가 어디 한 구석에서 기절해 있을지도 몰랐다.

그걸 생각하자 불쑥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구나.

이겸을 조이던 긴장과 공포가 어느 정도 느슨해진 걸 확인한 도현은 다시 한번 그에게 말해 줬다.

“예언할게. 넌 살 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전멸해도 너는 살아.”

“…네가 날 제일 많이 죽였어. 개새끼야.”

“개새끼라….”

도현이 낮게 웃었다.

“그럼 네가 개새끼 주인이라도 할래? 충실한 번견이라도 되어 줄게.”

도현의 다짐에 이겸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침묵하다 되물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의심이 들었다. 자신이 긴장을 푼 틈을 타 크리처에게 미끼로 던져 주고 그사이 홀라당 내빼는 건 아닌가? 서도현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겸의 예상과는 달리 도현은 담담히 답했다.

“구해 준다고 했잖아. 다섯 번 죽였으니까 이제 네 번 남았네.”

사실 네 번은 무슨. 몇십 번이고 살려 준다고, 겁먹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이겸은 자신에게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수지타산을 따지듯 군 것뿐이다. 이겸이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으면 도현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자신이 타의 표본이 될 만한 좋은 인물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래터란 길드의 마스터인 이상, 이겸이 래터 소속인 이상. 한 식구가 되기로 한 이상. 내 사람은 지킨다.

‘이제부터 래터는 가족이야.’

그 누구도 가족을, 내 사람을, 래터 길드원을 죽게 놔두진 않는다. 그걸 위해 창립한 길드였다.

“알아들었으면 내 옆에 붙어 있어.”

네 죽음을 내가 모르게 두지 마. 리셋 포인트에서 멀어지게 두지 마.

도현은 무심한 손길로 제 손목시계 알람을 맞췄다. 곧 지상으로 올라갈 시간이다.

“지금부터 지상에 올라갈 인원을 모집할 건데, 같이 갈 사람?”

도현은 마치 지금부터 함께 소풍 갈 사람은 여기 여기 모이라는 식으로 산뜻하게 외쳤다.

그때 어떤 이가 수군거리는 군중들 틈을 헤쳐 나오며 서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협회 소속의 1팀 최태웅이었다.

“현재 다른 길드의 마스터들은 모두 자리를 떴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지하로 내려온 거니 확실합니다. 협회장님 역시 지금은 일이 있어 먼 지역으로 출장을 가신 상태입니다. 그리고 건물 전체의 통신이 끊긴 걸로 봐선 아마 협회장님이 없는 틈을 타 노린 것 같습니다.”

“그래. 습격이지. 건물의 사람 수는?”

“…한 층에 삼십은 넘습니다. 전투 가능 인원은 사무직을 제외하고, 이곳을 포함해 50명 이하일 거라 예상합니다.”

서도현은 장내를 훑었다. 낮게 혀를 찼다.

상위 길드는 제 길드 내에 훈련실을 가지고 있어 굳이 협회로 발걸음할 필요가 없었고, 때문에 협회의 훈련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중견 길드나 그 이하일 뿐이다.

한마디로 전력이 되는 이들은 없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협회 소속 헌터가 있다 해도 노련한 헌터들은 모두 CA 지역에 나간 상태일 테고, 이곳의 사람들은 기본 전투 훈련조차 제대로 안 된 햇병아리들일 게 뻔했다.

지하로 내려오면 쓸 만한 애들이 있을까 싶었는데 판단 미스였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지상에서 경호원이랑 싸우는 게 나았을지도.

실제로 윤이겸이 없었다면 서도현은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잠시 윤이겸에게는 정신을 차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지하로 내려와 숨을 고른 것뿐이었다.

그는 제게 말을 건 최태웅을 쳐다봤다. 그나마 쓸 만한 카드는 얘뿐인가.

다 같이 살아 가자는 희망찬 말을 할 성정은 되지 못하고, 실제로 모두가 살 수는 없다. 아마 이 중 몇 명은 얼 타다 죽을 수도 있고, 전투하다 죽을 수도 있었다.

그중 서도현은 이겸과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그런 각오가 필요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죽음을 덤덤히 대할 준비가. 그 잔혹한 준비를 이겸이 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저… 작전은….”

“어리광 피우지 마.”

그는 아직까지도 작전 타령하고 있는 사람을 한심한 눈으로 흘겼다. 지상에선 현재 경호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지원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기 위해 크리처의 발을 묶으며.

그들이 만들어 준 소중한 기회였다. 1분 1초가 급한데 작전은 무슨.

지금은 그저 한시라도 빨리 올라가 경호원과 합류해 뮤턴트 크리처를 물리치는 수밖에 없었다.

“한가하게 작전이나 짤 시간이 있다 생각해?”

각자도생. 그걸 주목적으로 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식이다. 1팀, 2팀 같은 걸 나눠 작전을 짜 봤자 올라가면 반 이상이 죽을 텐데 무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장지졸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휘자가 필요하긴 한데….

“일단 지휘관은 내가 맡지. 지시는 올라가서 짧게 할 테니 너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그때그때 내 말만 잘 들어.”

그럼 반은 먹고 갈 테니까.

“앞으로 3분 후, 올라간다. 이의 있는 사람?”

“왜요?”

그때 저만치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저희 선배가 지휘관 하면 더 잘할 것 같은데요?”

도현은 귀찮다며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예호였다.

한 사람이 꿀릴 것 없다며 가슴을 당당히 내밀고 자기소개를 했다.

“예호 길드의 최현식입니다.”

훈련실이 목적이 아닌, 잠시 지인을 만나러 왔다가 지하에 머물게 된 그들이었다. 뮤턴트 크리처의 존재로 인해 목숨이 위험할 법도 하지만, 아직 그 위력을 잘 몰랐던 최현식은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다. 모든 헌터들이 흔히들 하곤 하는 실수였다.

만약 이 전투가 승리한다면 모든 공은 서도현, 래터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왜? 우리 선배도 이 바닥에서 오래됐고, 남들보다 많은 경험과 전투력도 뛰어나고 크리처 사냥도 노련한데? 지휘자가 우리 선배라면…!

이 일을 해결하게 되면, 이 모든 건 예호의 공이 된다.

예호의 최현식이 제 선배의 손을 잡고 번쩍 들었다.

“여기 계신 분은 예호의 김민식입니다. 지휘자라면 차라리 저희 선배님이…!”

“야… 야 너 미쳤냐? 머리 어떻게 됐어? 난 됐어…. 그냥 서도현이 하게 냅둬….”

김민식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눈치 없는 망할 후배가 저를 지옥으로 떨군다.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탓에 서도현이 이전에 자경단이었단 걸 몰라서 그러나? 목숨이 중하다면 제발 뮤턴트를 상대해 본 적 있는 경험자한테 맡기길 진심으로 바랐다.

“무슨 말씀입니까. 선배님! 지금이야말로 저희 예호 길드를…!”

잠깐 빌리지. 최태웅의 재킷 안 주머니에서 단검을 찾아 빼 든 서도현이 그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예호의 최현식이라고?”

도현은 손안에서 검을 굴린 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어깨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으… 으아악!”

이겸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현식은 제 어깨에 박힌 단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이… 이게 무슨.”

도현은 무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부상이군. 넌 지하에 남아라.”

이후 예호의 민식이라는 자에게 시선이 향했다.

“너도 남을 텐가?”

그는 바짝,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닙니다!”

도현은 귀찮다는 듯 피로한 눈가를 누르며 말했다.

“일각을 다투는 상황이다. 전투 중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부하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고.”

그는 털썩 주저앉아 제 상처 부위를 부여잡은 채 떨고만 있는 현식에게 몸을 숙여 어깨에 박힌 단검을 쑤욱 뽑아냈다.

“아… 아악!”

그러자 입구가 막혀 나오지 못했던 선혈이 옹골차게 맺히기 시작했다. 피가 묻은 단검을 휘리릭 돌리며 피를 털어 낸 후 서늘한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또. 반론 있는 자.”

그 누구도 쉽사리 손을 들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 오직 공포 정치만이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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