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그 자태를 우두커니 지켜보던 이겸이 중얼거렸다.
“필요 없는데.”
도현이 의외라는 듯 이겸을 살폈다.
“필요 없어? 진짜?”
“내 목숨은 내가 챙겨. 넌 네 앞가림이나 잘하든가. 하다못해 인성에 관련된 책이라도 좀 읽어라. 너 친구 없지?”
“친구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친구 없냐고 묻는 너도 딱히 인성이….”
“시끄러.”
적어도 너보단 낫다. 이겸은 그리 생각하며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 뒤를 도현이 따라왔다.
“어디 가는 줄은 알고 앞장서는 거야?”
“어디 가는데?”
“등록하러. 1층으로 가면 돼.”
“네가 앞장서.”
자연스레 도현을 앞으로 보낸 이겸은 그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딱 한 대만 때려 봐도 돼? 아니다. 다섯 대 정도.”
서도현은 그의 말이 웃긴다며 입꼬리를 느슨하게 늘어트렸다.
“그걸로 화가 풀려?”
“전부는 안 풀릴 것 같은데. 어느 정도는?”
“나중에 상황 봐서.”
이겸은 불시에 도현의 종아리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그는 보지도 않고 가볍게 피했다. 더 열불이 뻗쳤다.
“넌 상황 보고 사람 죽였냐?”
그럼에도 도현은 태연자약하게 무시하며 앞서 나간다. 당황한 건 그들을 지켜보는 주변인들이었다.
‘뭐야? 지금 서도현 때리려 한 거야? 왜… 왜?’
‘살아 있어? 저분 살아 계시지?’
‘저분이 래터 신입? 왜 굳이 저 길드로 가는 거지? 서도현이랑 친구인가?’
차마 사람들의 생각까지 이겸이 알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서도현이 앞에 놓인 자판기를 가리키며 친근하게 물었다.
“겸아, 음료라도 마실래?”
누가 겸이야.
“그냥 물이면 돼.”
이겸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답하며 도현이 음료를 뽑아 오길 기다렸다. 자판기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적이던 도현은 귓가에 자리한 피어싱을 문지르며 다시 이겸의 앞에 섰다.
“카드는 있는데 현금이 없네. 돈 좀 빌려줄래?”
이겸이 매서운 눈길로 사납게 노려봤다. 분노가 넘실거렸다.
“너 나 삥 뜯냐?”
“갚을게.”
뺀질한 얼굴의 서도현을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지갑 속 현금을 꺼내 주었다.
“잔돈도 가지든가, 거지야.”
저를 향한 험한 말에도 도현은 빙그레 웃을 뿐 이겸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다.
도현이 곧장 자판기 음료를 뽑으러 가자 이겸은 그가 뽑아 올 생수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방금 친구에게 보낸 문자가 전송되지 않았단 걸 발견했다.
뭐지? 데이터 아직 남았는데. 이겸이 다시 재전송을 누르려던 그때였다.
생경한 풍경.
사방의 소음들이 멍해지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도 정면을 보는 게 아니었다.
딸칵- 데구르르.
자신은 어두운 공간 속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간간이 들어오는 하얀 빛은 눈을 아프게 했다. 데굴데굴 굴러다녀 시야가 자꾸만 반전되는 어지러움에 달팽이관이 아우성쳤고, 눈을 감아도 계속되는 기이한 현상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지금 내가 똑바로 서 있는 게 맞나?’
모든 감각들이 무로 돌아가 발이 닿는 곳이 땅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붕 뜬 기분이었다.
눈이 시큰거렸다.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몸은 여기 있는데, 시야는 전혀 다른 존재를 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 순간 빛이 스며들었다. 눈이 부셔 질끈 감았지만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했다. 그 틈새로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누군가의 손.
“허억…!”
이겸은 급한 숨을 들이 삼켰다. 참으로 이상한 감각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꽉 쥐었다. 전신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연속적으로 장면이 바뀌었다. 이내 현실로 돌아온 듯 데스크에 앉아 있는 직원, 휴대폰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이다가, 그 사이로 아찔하게 다시 또 장면이 바뀌었다.
스윽- 탁.
모든 세상이 볼록하게 보였다. 보이는 것은 제삼자의 시야에 비친, 휘청이며 서 있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서도현.
“윤이겸. 받아.”
그가 뽑아 온 생수를 제게 던졌다. 이겸은 날아오는 생수를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또 한 번 시야가 출렁이는 반전이 생겼기 때문이다. 천장을 보다가도 어느덧 땅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고, 협회의 내부가 곡선의 형태처럼 일그러지곤 했다.
순간 제 팔꿈치가 시야를 가득 채우면서 가까워졌고, 생수병이 정확히 팔꿈치를 맞고는 떨어졌다.
밀려드는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윤이겸?”
상태가 좋지 않은 이겸을 본 서도현이 재빨리 다가가서 부축했다. 가쁜 숨을 가다듬는 지경에 이르자 이겸의 옆에 있던 사람에게 급히 캐물었다.
“왜 그래. 괜찮아? 얘 왜 이래요?”
“어? 글쎄요…. 갑자기 숨을 몰아쉬었다는 것밖에는….”
“겸아. 정신 차려. 병원 갈까? 여기 치료팀 3층에 있죠? 여기로 오라 해요. 아니다, 직접 가는 게 빠르겠네. 윤이겸, 업힐래?”
“네… 하지만 협회 치료팀이라….”
“시발, 지금 그게 문제야!?”
버럭. 서도현의 거센 고함과 함께 직원의 몸이 움찔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겸이 서도현의 어깨를 붙잡고 말렸다.
“야, 그만하고 빨리 나가자. 괜찮아졌어.”
“그래도 치료는 받고….”
“아니.”
서도현의 걱정에도 이겸은 단호히 거절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나쁜 예감이 들었다. 무척 불쾌하고도 섬찟한.
그 때문에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서도현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그냥… 그냥 빨리 나가자. 어지러워서 좀 쉬고 싶어.”
서도현은 마지못해 이겸을 따라나섰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 살기 어린 눈으로 주변인들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서도현의 시선은 집요하게 이겸을 쫓았다. 정말로 그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괜찮아?”
도현의 걱정이 우습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그래서 평소처럼 날카롭게 그를 대하지 못했다.
“어, 괜찮긴 한데.”
띵동.
문이 열리고 1층으로 발을 디딘 이겸은 방금 벌어진 일이 무엇이었는지 상기하기 위해 서도현을 불러 세웠다.
“야. 근데 나 방금 이상한 게 보였는데….”
“보여?”
아까의 일로 피로를 느끼는지 눈을 문지르며 이겸이 답했다.
“응. 2차 각성, 뭐 그런 건가?”
“왜? 뭐가 보였는데?”
그 모습을 보던 서도현은 이겸의 눈 주변을 엄지로 꾹꾹 눌러 주었다. 이겸은 부모도 안 해 주는 스킨십이 낯간지러운 나머지 고개를 뒤로 뺐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너무 획 지나가서 자세히 못 봤어.”
일단 협회를 나가서 더 대화를 하든가 해야겠다. 피곤하니까 가는 김에 집까지 태워 달라고 해야지. 도현도 싱긋 웃고는 이겸의 뒤를 따랐다.
이겸은 입구를 나서며 협회로 들어오는 낯선 방문객에게 시선을 힐끔 주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체형에 맞지 않은 큰 옷을 뒤집어쓴 탓에 얼굴도 신체도 어떤지 파악할 재간이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하고 스쳐 지나갔다.
순간 건물 입구에 검은 막이 형성되며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그와 동시였다. 이겸의 심장이 꿰뚫린 것은.
“…어?”
터져 나오는 짧은 의문도 잠시, 확실히 죽이겠다는 집념인지 한 번 더 같은 위치를 꿰뚫렸다. 찾아온 고통과 함께 그제야 상황에 대한 인지가 가능해졌다.
몸에 힘을 축 빼고 눈동자를 힘겹게 굴려 제 옆의 서도현을 바라봤다.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흰자가 일순 커졌고, 뒤늦게 이겸의 상태를 발견한 주변인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순간 방문객의 팔이 쭈욱 늘어나더니 비명을 지른 사람의 숨통을 끊겠다는 듯 꼬챙이 같은 형태가 되어 단숨에 꿰뚫었다. 그가 팔을 휘저을 때마다 아릿한 고통이 찾아오며 미처 눈도 감지 못했던 이겸은 그에 맞춰 맥없이 휘둘릴 뿐이었다.
비명을 들은 경호원들이 경호실에서 대거 튀어나왔고, 여러 물건들이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사방에 피가 낭자하며 건물 내가 아수라장이 된 건 순식간이었다.
5분도 넘기지 않은 시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시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전투 준비!”
협회의 경호팀들은 이런 습격을 대비해 상시 훈련을 해 왔었는지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열을 맞춘 뒤, 방문객, 이젠 침입자가 되어 버린 그것에 공격을 쏟아부었다.
이겸은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지며 체온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이대로 죽는구나, 라는 짧은 감상과 함께 모든 게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침입자를 향해 검을 빼 들고 달려드는 사람들, 겁에 질린 사람들, 쾅- 소리를 내며 벽에 처박히는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느렸다. 느리게 흘렀다. 너무나도 더뎌서 이겸은 찰나에 눈앞에서 모든 것이 되감기라도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깨진 유리창은 다시금 탄탄하게 붙었고, 벽에 처박힌 사람은 몸을 일으켜 맞서 싸우는 것 같았으며, 그것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은 뒷걸음질이라도 치는 듯했다.
이내 침입자의 길쭉한 팔에 꼬챙이처럼 꽂혀 이리저리 휘날리던 이겸은 꼬챙이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이후 엉거주춤 땅에 발을 짚었을 땐, 꿰뚫린 상처 부위가 금세 아물어 있었다.
소란이 일었던 공간 속에서, 모든 현상이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세상이 멈췄다.
헙, 내쉬는 깊은 호흡과 함께 초침이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서도현이 옆에 서 있었다.
휘이익-.
저를 향해 돌진하는 침입자의 팔이 선명히 보였다. 도현은 대번에 그것을 낚아채고는 성큼 발을 앞으로 디뎌 힘을 축으로 삼고, 벽을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콰앙- 거대한 소음이 남과 동시에 이겸을 빠르게 제 등 뒤로 숨겼다. 이겸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제 가슴팍을 더듬어 보았다. 꿰뚫린 자국도 없었고 작은 상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게…, 방금 무슨….”
크리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던 도현이 긴장 풀라는 듯 일부러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한 번.”
“…뭐?”
“한 번 살렸네.”
하하. 이제 네 번 남았다, 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