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이겸은 속마음으로 독백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벗어나야 하나?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다. 어차피 도현의 옆에서 반복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할 방법을 찾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언질도 없이 찾아오는 지긋한 반복의 예고라도 얻어야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래, 말했잖아. 윤이겸. 뭐가 됐든 세상은 돈이 전부야. 당장 재우만 해도 통장에 돈이 쌓였다잖아? 이런 가족 같은 길드에서도 통장에 꽂힌 돈만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통장만 확인해, 통장만. 그러다 보면 얘네들이 예뻐 보일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이 범죄자 집단이 진짜 가족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렇게 다짐하며 다 먹은 햄버거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이겸의 검지에서 반지가 반짝, 하고 빛이 났다.
서도현은 잔뜩 해진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못다 본 만화책을 읽고 있었고, 차재우는 아까부터 무얼 하는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서도아는 다른 한쪽에서 노트에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하는 그들에 이겸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뻘쭘하게 서 있다 도아의 곁으로 가 슬쩍 물었다.
그날 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했던 도현과 재우보다는 차라리 완전 초면인 도아가 더 편했다.
“뭐 해?”
“내일 수학 시간 학교 숙제요.”
“몇 살인….”
“뭐? 내일 숙제 있었어? 나 안 했는데! 서도아 네 거 좀 베껴도 되나?”
학교? 몇 살이냐고 물으려던 이겸의 말을 싹둑 자른 차재우가 두드리던 키보드를 내팽개치고 도아에게 다가왔다.
“그냥 답지를 베껴.”
“그건 풀이 과정에서 베낀 게 티 나잖아!”
“그럼 직접 풀든가. 넌 너무 똑같이 베껴서 티 나. 기억 안 나? 너 때문에 저번에 나까지 같이 혼났었잖아.”
서도아의 일침에 차재우가 끄응, 신음을 흘렸다.
“둘이 같은 나이야?”
이겸의 질문에 티격태격하던 둘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네, 열여덟 살 같은 학교 같은 반. 겸이 오빠는 몇 살이세요?”
“스물두 살.”
“저희 오빠랑 동갑이네요.”
“동갑?”
이겸은 지루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도현을 쳐다봤다.
“헉, 그럼 다 동갑내기네요! 와, 신기하다.”
얼떨떨해하는 재우를 뒤로 하고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서도현이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제 이름을 편히 막 부르길래 자신도 아무 생각 없이 막 부른 거였다. 애초에 첫 만남도 그리 좋지 않았고. 얼굴로 따져 저랑 비슷한 나이겠거니 했지만 스물두 살 동갑일 줄이야.
저를 보는 시선을 느낀 서도현은 만화책을 내려놓고 눈을 곱게 접었다.
“왜? 스물두 살 안 같아?”
“너 대학교는?”
“안 다니는데.”
이겸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너희 평소에도 이러고 있어? 일은 안 해?”
협회의 누구 씨가 래터는 상위 길드인데도 소수 인원이라 바쁘다고 했는데.
“오늘은 일 없어.”
그리 말한 서도현은 책상에 올려진 달력을 가리켰다.
“그래도 저기에 빨간 동그라미로 체크 된 날들은 바쁠 예정이니까 다른 일정 있으면 비워 둬.”
이겸은 곧장 달력을 확인했다.
7, 10, 13, 14, 22, 25, 30?
“이게 뭔데?”
“이번 달 저희 담당 지역에 크리처가 나타나는 날이요.”
“그 CA 지역 탐지기라는 그걸로 알아낸 거야?”
“엇, 네. 모르셨어요?”
“설명은 듣긴 했는데….”
권상혁, 그 작자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재우야 네가 겸이 선임이니까 많이 알려 줘.”
“네! 이겸이 형, 여기 앉아 보시겠어요?”
도현의 명령에 재우는 신이 나 빈 의자를 제 옆에 끌고 와 두드렸다. 이겸이 착석하자 그는 빳빳하게 코팅된 A4 용지 뭉텅이를 꺼내 넘겨주었다.
“이건 협회에서 보내 준 이번 달 저희가 맡은 구역 CA 리스트고요. 여기 나타나는 크리처들은 전부 우리가 처리해야 해요.”
“시간이 없으면?”
“바쁘면 가끔 다른 길드한테 요청하기도 하는데….”
재우가 말끝을 흐렸다.
“래터 요청은 다들 잘 안 들어주세요.”
“…….”
한마디로 똥을 싸도 대신 닦아 줄 사람이 없다 이거지?
“이 넓은 지역들을 다섯 명, 아니 네 명, …세 명이서 처리한다고?”
질문하는 이겸의 인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총 다섯 명인 길드원.
한 명은 군대를 갔고, 자신을 포함한 네 명, 하지만 자신은 전투에 나서지 않을 거니 당연히 포함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럴 터였다.
“에이, 왜 이러세요. 앞으로는 네 명이죠, 네 명!”
재우는 이겸을 가리키며 화사하게 웃었다.
…난 없는 사람 취급해 주라. 애초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그런 이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우는 드디어 신참이 들어와 여유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이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근데 나 부마스터잖아. 꼭 이런 거 해야 돼?”
“…….”
“…….”
“…저, 저는 부마스터일 때 엄청 바쁘게 지냈어요.”
잠시간의 침묵과 함께 재우가 뒤늦게 입을 뗐다. 이겸은 당황하지 않고 재차 말을 이었다.
“부마스터 대접해 준다며. 나는 크리처 안 잡아. 아니 못 잡아.”
참으로 당당하고 뻔뻔한 말이었다. 그야 그랬다. 그걸 어떻게 잡아. 이겸은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차라리 자신은 후방에서 응원이나 하련다.
“부마스터니까 선두에 서야죠!”
재우가 책상을 쾅! 쳤다.
“에이잉! 제가 부마스터일 때는 말이죠! 매앤날 도현이 형 뒤꽁무니 쫓아다니고! 이것도 하고! 엉? 저것도 하고! 다 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네?”
“그건 너 때잖아.”
태연자약한 이겸의 말에 재우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무서우니까 뒤에 있을게. 크리처는 너희가 잡아 줘.”
민망함도 없는지 평온한 어조로 말하는 이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너한테 떨어지는 수익도 없을 텐데.”
도현의 말에 이겸은 난감을 표했다. 어디까지나 최우선 목적은 도현의 무분별한 능력 사용을 감시하는 것이지만….
“연예인 매니저처럼 뒤에서 보조할 테니까 팁이나 월급 같은 거라도 주면 안 되나.”
“크리처 사냥하는 거 의외로 쉬워요, 오빠.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숙제를 하던 도아가 한마디 거들었다. 죽어도 뒤에 있으란 소리 따위 안 하는 독한 것들.
뭐? 래터는 가족이다? 죽어도 같이 죽자 이건가.
두 명은 진짜 가족이고, 한 명은 래터에 뼈를 묻겠다는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하고, 군대 갔다는 분도 제대할 때까지 들어올 신참을 위해 반지를 백 개나 넘게 만들고 간 걸 보면 무리에 대한 집념이 그쪽도 장난 아닌 것 같았다.
가족 같은 길드….
진짜 짜증 나네. 여기서 난 뭘 하면 되지? 물론 크리처를 잡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서도현은 마스터이고, 저번에 보니 크리처도 혼자 잡던데 당연히 바쁠 테고, 서도아와 차재우는 학교 수업에 전념한 채고, 능력도 뭔지 모르지만 도아는 혈연이 마스터로서 여기 있는 한 대우는 말할 필요 없었다. 군대 간 분은… 음, 국가 안전에 힘쓰고 있고.
이겸은 서도현을 바라봤다.
“야, 난 여기서 뭐 해?”
도현은 침묵하다 운을 띄었다.
“크리처를 잡긴 잡아야 하는데.”
그 말과 무섭게 이겸의 인상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일련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도현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후,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붉은 입술이 고운 선을 그리며 열렸다.
“일단 그건 나중으로 하고.”
다행이다. 크리처는 안 잡는구나.
그 안심은 서도현의 뒷말에 의해 와장창 깨져 버렸다.
“계약서부터 작성하자.”
“…서류?”
“응. 계약서.”
본래라면 협회에서 헌터 테스트를 받은 뒤, 헌터 등록을 완료해야 길드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겸은 테스트 장을 뛰쳐나왔고, 다음 헌터 테스트는 다음 달에 있다. 앞으로 래터에서 활동할 거라 여겨 이것저것 알려 주고 실력도 키워 줄 텐데, 헌터 테스트를 완료하자마자 홀라당 도망치면 안 되니까.
이른바 어디 가지 말라는 계약이었다.
협회 사람을 통해 테스트를 본 후, 헌터 등록을 완료해 길드를 골라 들어가는 일반 코스와 각성하자마자 길드에 발견되어 그 길드에서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하고 전투 방식을 배운 뒤 테스트를 보고 바로 입단하는 엘리트 코스가 있었다.
엘리트 코스의 장점은 길드의 예비 신참이 테스트 때 높은 성적을 보여 주면 길드의 위상을 높이기 좋다는 점이었다.
다음 달, 예호에서 공들여 키운 예비 신참이 테스트를 보러 온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다. 길드 마스터 김이성이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닌 탓이다.
그리고 윤이겸.
서도현은 이번 테스트에서 예호의 신참을 짓밟고 윤이겸을 최고 성적자로 만들 계획이었다. 시뮬레이션 능력이 있으니 1등은 따 놓은 당상. 제 입맛대로 잘 굴리는 일만 남은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여기 지장 찍으시면 돼요.”
도아는 어느새 준비해 온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 뒤로 재우는 후다닥 인주를 준비해 이겸의 앞에 놓았다. 동갑이라더니 아주 쿵짝이 잘 맞았다.
더 이상 도망칠 경로도 없으니 이겸은 포기하고 지장을 찍기로 했다.
“헤헤. 이겸이 형 2차 각성이 뭐 나올지 기대돼요.”
“2차 각성은 어떻게 하는 거야?”
이겸은 순간 1차 각성했을 당시가 떠올랐다.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서,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죽음과 밤을 맞이했던 그날.
이겸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는 겁먹은 햄스터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며 입술을 꿍얼거렸다. 혹시.
“나 또 죽일 거야?”
래터의 눈들이 이겸을 향해 멍하니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