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14)화 (14/102)

#014

이겸은 일주일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간단히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서도현에게 있었다.

“이 시발 새끼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그 일주일을 못 참고 반복을 해 대냐, 미친 새끼.

하루 꼬박 24시간 50분을 보낸 이겸은 깊은 숨을 뱉었다. 이마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 고민은 끝냈어?

전화 너머로 그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거의 반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러고도 인간인가? 자신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여분의 시간, 50분을 알차게 보낼 준비를 갖춰야 했다.

“갈게. 간다고. 가면 될 거 아니야.”

얕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사무실 주소 보내 줄 테니까 내일 보자.

“…….”

빡치네, 진짜.

크리처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들여도 권상혁 같은 신입 관리 직책만 맡을 거라고? 서도현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난 것과는 별개로 다음 날 아침 이겸의 몸은 착실히 서도현이 보내 준 주소로 움직이고 있었다.

거지 같은 반복, 개 같은 반복, 지긋지긋한…. 여러 수식어를 붙여 대며 제 분노를 표현했다. 그럼에도 성이 차지 않았다.

“…여긴가?”

여기라고? 래터의 사무실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한 이겸은 낡고 허름한 외관의 건물을 쳐다봤다.

1층에 위치한 래터 사무실은 철문이 아닌 유리문으로, 그것도 손수 붙인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필름지가 내부를 지켜 주고 있었고 필름 위에는 하얀 마커 펜으로 ‘래터’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힌 채였다.

‘크흠! 그으게…. 저희 사무실은 지금 보수 공사 중이어서…. 많이 번잡할 거예요. 카페가 깔끔하고 좋잖아요? 하하.’

보수 공사 한 거 맞아?

이겸은 다시 한번 서도현이 보내 준 주소를 확인했다.

‘여기가 맞는데.’

일단은 들어가 보자.

성큼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컵밥을 먹던 차재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컵밥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아! 형 반가워요!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그래. 재우야. 나도 반갑다.”

이겸은 천천히 내부를 둘러봤다.

한쪽 벽면에는 서울의 지도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고, 화이트보드에는 CA 지역이 날짜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먼지가 쌓인 책상과 컴퓨터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 식사를 해결했던 건지 키보드에는 진득한 무언가가 잔뜩 묻어 있다.

다른 곳은 또 어떤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모양인지 침대와 귀여운 캐릭터 이불, 길게 전선을 늘어트리고 있는 전기장판까지.

그러니까 여기가….

“래터 사무실 맞지?”

“네!”

재우가 부정하지 말라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그… 2층도 볼 수 있을까?”

“2층은 가정집이에요. 건물주가 살고 계세요.”

“서도현이?”

“네에? 아니요? 마스터는 아직 출근 안 하셨어요. 아침잠이 많거든요. 2층은 그냥 친절하신 아주머니, 아저씨 부부세요.”

이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재우의 말로 짐작해 보면 래터 사무실은 초라한 여기가 전부라는 뜻이었다.

상위 길드라며? 근데 천장 위로 쥐가 기어 다닐 것 같은 더러운 환경에, 장소는 또 얼마나 협소한지, 상위 길드가 맞나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아니면 모든 상위 길드가 이따위 환경인가?

“이겸이 형? 그… 사무실이 좀 더럽죠?”

재우가 민망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20평 남짓한 사무실에 관리가 제대로 안 된 탓에 위생도 청결하지 못한 여기가 래터라고? 인제 보니 보수 공사라고 했던 것도 저를 사무실로 초대하지 않기 위한 핑계인 듯싶었다.

“길드원은 몇 명이야?”

소수 길드라고 듣긴 했지만 래터의 사무실을 보면 100명은커녕 30명도 못 들어온다. 20평 공간에서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최소, 최대 인원이란 게 있잖은가.

재우는 일일이 손가락을 접어 가며 세었다.

“래터 인원은 마스터랑 저, 그리고 서도아라고 마스터 친동생 있고, 군대 갔다는 형도 있는데 저도 아직 얼굴은 본 적 없어요. 마지막으로 이겸이 형! 이렇게 끝이에요. 헤헤.”

검지로 저를 콕 집어 지목하는 재우에 이겸은 쉽게 말해 허망함을 느꼈다. 사기 계약을 당한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두 손을 쓸 필요도 없이 한 손으로도 셀 수 있는 ‘5’라는 숫자가 길드원의 숫자였다. 망해 가는 길드가 아니라 진짜 상위 길드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았다.

‘래터로 오면 부사장 자리를 줄게. 음, 부마스터가 되려나. 어때? 꽤 좋은 제안이지 않아?’

순간 이전에 서도현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작 다섯 명밖에 없는 길드에서 부마스터….

하지만 좌절도 잠시, 이겸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건 돈이나 회사의 규모를 보고 온 게 아니었다. 뭐가 됐든 서도현이 능력을 쓸 때 작은 언질이라도 받고 싶어서. 그 외의 중요한 건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꼭 궁금한 게 있다면,

“상위 길드면 수익도 높아?”

“네… 네! 사무실이 이 꼴이어서 그렇지 돈으로 따지면 남부러울 것 없어요!”

재우가 격분하여 말했다.

“궁금하시면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진짜겠지. 안심한 이겸은 사무실 내부를 한 번 더 점검하듯 둘러보고는 전기장판이 켜진 침대에 앉았다. 유리문이라 빈틈 새로 찬 바람이 이는 게 몹시도 추웠기 때문이다.

“편하신 데 앉으라 하려 했는데 이미 앉았네요. 이겸이 형, 점심은 드셨어요?”

“아직.”

“잘됐다. 마침 마스터가 햄버거 사 오는 중이라네요. 같이 먹어요.”

재우는 먹고 있던 컵밥을 한편에 치워 두고 햄버거를 기다렸다.

이겸이 침대에 올라가 몸을 노곤히 녹이는 동안 사무실에는 재우가 컴퓨터 마우스 딸칵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너무 깔끔한 것보단 낫나.’

애써 합리화를 하고 싶은 건지 정말 그렇게 느낀 건지, 사무실이 몹시도 더러운 게 제집처럼 아무렇게나 막 사용해도 된다는 이상하고도 묘한 심리를 불러왔다. 한겨울에 따뜻한 이불을 푹 덮어쓰고 마우스와 키보드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슬슬 이겸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겨울의 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억지로 졸음을 버티고 있던 이겸의 눈이 확 뜨였다. 누군가 문을 연 것이다.

“어라, 벌써 와 있었네.”

“도현 형, 오셨어요?”

재우는 기다렸단 듯 버선발로 종종 달려가 서도현의 손에 든 햄버거를 받았다.

이겸은 서도현의 상판만 보면 자연스레 차오르는 분노를 뒤로하고 움츠렸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서도현의 뒤에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서도현의 친동생이라는 걸 눈치챘다.

찢어진 눈꼬리와 높은 콧대, 날카로운 얼굴에 언제나 올라가 있는 입술까지, 붕어빵 남매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오기로 한 신입이시죠?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저는 서도아라고 해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 안녕.”

서도현이 비켜서며 문을 닫은 후 이겸에게 도아를 소개했다.

“겸이는 처음 보나? 내 동생이야. 전전전 부사장.”

“누가 겸이야.”

어째 친근한 척이 더 늘었다. 윤이겸이 이겸이 되고, 겸이 되어 버렸다.

그보다 전전전?

“전전전은 뭐야?”

“래터 설립 당시 부사장이었고, 그 후엔 군대 간 형, 그다음은 제가 부사장이었어요! 이겸이 형은 4대 부사장!”

…미친 거 아냐? 해맑게 말하는 재우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건 이겸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허탈함이 차올랐다. 어이가 없었다.

“이거 순 사기 아니냐.”

반협박에, 사기에. 마스터란 놈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가히 범죄자 길드였다.

도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부사장도 시켜 줄 거고, 대우도 잘해 줄게. 이게 왜 사기지? 아, 혹시 따로 원하는 거 있어? 일단은 햄버거부터 먹을래?”

“다들 이렇게 협박받고 들어온 거야?”

살쾡이처럼 꼬리를 쭈뼛 세우고 말하는 이겸에 서도현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협박이라니. 다들 원해서 들어온 거야. 너처럼.”

나처럼? 나처러엄? 이겸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겸이 오빠. 여기 햄버거랑 콜라요. 뭘 좋아할지 몰라서 불고기로 사 왔는데 싫으면 말하세요. 쉬림프랑 바꿔 드릴게요. 감자튀김도 있어요.”

서도현 핏줄이 어디 안 가는지 도아는 언제 봤다고 끝자리 이름만 툭 떼 내어 허물없이 그를 불렀다.

“불고기도 좋아.”

일단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눈앞에 살인마를 두고 먹는 햄버거는 체하기 딱 좋았다. 억지로 맛을 음미하며 우물거리던 도중, 서도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컴퓨터 책상 옆, 서랍을 열며 말했다.

“겸아. 먹고 나서 여기 반지 사이즈 찾아가.”

“반지?”

뭐 할 때마다 겸아, 겸아, 이겸도 귀찮은 탓에 겸이라는 말이 들릴 때마다 콧잔등만 살포시 찡그리고 딱히 제재를 가하지 않자 아예 호칭이 굳어 버렸다.

“응. 남궁산하라고 군대 간 형인데, 손재주가 있어서 몇 개 만들어 놓고 갔어. 래터 길드원이 끼는 반지야.”

이제 보니 서도현은 오른손 검지, 차재우는 체인을 이용해 목걸이로, 서도아는 왼손 약지에 모두 같은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실버 링이 너무 단조롭지 않게 중간엔 검은 줄로 홈이 파여 있었다.

얼마나 손재주가 좋길래? 호기심이 돋은 이겸은 먹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책상 서랍으로 향했다. 그러곤 제 눈을 의심했다.

“하하. 산하 형이 자기 군대 가 있는 동안 들어올 신참들 생각해서 좀 넉넉히 만들어 놨어. 사이즈도 다양하니까 원하는 가락에 낄 수도 있고, 좋지?”

“…좀 넉넉한 정도가 아닌데.”

족히 백 개는 넘어 보이는 반지들이 서랍장 안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반지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그분이 입대한 기간에 들어온 신참은 재우와 저 둘뿐 아닌가.

“혹시 군대를 최근에 가셨어?”

“1년도 넘었어요. 6개월 후엔 제대래요.”

감자튀김을 먹던 서도아가 대신 답해 주었다.

그사이 서도현은 서랍장 반지를 뒤적거리며 눈대중으로 이겸의 손가락에 맞는 사이즈를 찾고 있었다. 그러더니 비슷한 사이즈를 찾아 이겸의 손을 가져와 끼워 주며 말했다.

“딱 맞네. 그리고 요즘 길드마다 이념을 짓는 게 유행이던데, 래터도 한번 지어 봤어.”

스멀스멀 불안함이 차올랐다.

“래터는 구성원도 다섯 명밖에 없고, 돈독해지기 딱 좋은 환경이잖아?”

서도현은 이겸을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부터 래터는 가족이야.”

사이좋게 지내자. 원래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인상인지라 미소 짓는 것도 짜증 날 정도로 예뻤다.

세상엔 피해야 할 회사가 몇 가지 있다. 질서 없이 멋대로 굴러가는 회사, 야근을 밥 먹듯 하면서 휴가도 눈치 봐야 되는 회사 등. 여러 곳이 있다. 그중 단연 피해야 할 곳을 꼽으라면….

도현의 미소와 대조되게 이겸의 날카롭고 첨예한 인상은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

이런 가, 족 같은 길드를 다 봤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