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딱 한 번 마주친 얼굴이지만, 증오하고 또 증오하는 얼굴.
…놀라라. 이겸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는 특유의 예쁜 웃음을 지었다.
“놀랐어? 앞으론 안 할게.”
그 웃음조차 이겸에겐 가증스러울 뿐이다. 도현은 재우의 옆 빈자리에 앉았다.
“재우가 잘 설명해 줬어?”
“설명… 음, 질문에는 착실히 답해 줬어요!”
차재우는 군기가 바짝 잡혀 반듯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또 슬그머니 이겸의 눈치를 살폈다. 시간을 확인하던 서도현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로 가 볼까?”
“넵!”
“…어딜?”
이겸이 당황스레 묻자 서도현이 답했다.
“2시 10분 발생할 CA 지역. 협회 소속 헌터가 사냥하는 건 봤지? 커리큘럼이라 안 보여 줬을 리는 없고….”
“…보긴 했지만.”
“가자. 래터 사냥법도 구경시켜 줄게.”
이겸은 전투가 싫다며 몸을 잘게 떨었다. 왜 협회의 권상혁도 그렇고 사냥 방식을 못 보여 줘서 안달이람. 헌터 안 한다고. 길드 안 들어간다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다들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무분별한 능력 사용에 대해 합의점을 찾으려 만난 건데 일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옷 구경하러 옷 가게에 들어왔다 잔뜩 영수증을 떼이는 그런 그림이 절로 그려졌다.
이겸이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이자 차재우가 조심히 말했다.
“사냥 방식이야말로 각 길드의 차별화된 특성이에요.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크리처를 공략해 죽이느냐. 길드의 스타일과 전력을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아… 그래.”
이겸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재우는 한 건 알려 줬다는 뿌듯함에 광대를 씰룩였다. 그 모습에 이겸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머리를 잘게 쓰다듬어 주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딱 재우에게 들어맞는 말이었다. 애가 철이 없어 방관을 한 거지. 애초에 재우가 나쁜 길로 빠지도록 유도한 서도현의 탓이 컸다. 미안해하면서 제 눈치만 살피고 주위를 기웃거리는데 더 화낼 수 없었다. 이겸은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잠시 후, CA 지역에 도착한 이겸은 눈을 깜빡였다. 벌건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큰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라고?”
“응.”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크리처를 잡을 때만큼은 크리처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지만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보지 못한다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없던 걱정도 차올랐다.
“형,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시적 동화라고 한다. 헌터라고 불리는 자들의 각성 능력은 어디서 왔는가. 제일 유력한 가설 중 하나가 크리처의 능력 중 무언가가 변질되어 우리에게 왔다, 였다.
헌터가 크리처를 사냥할 때만은 마치 크리처와 동화라도 된 듯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크리처와 헌터가 싸울 때 생기는 피해를 싱크홀, 지진 등의 허울 좋은 핑계로 갖다 붙일 수 있는 이유였다.
다만 도심지는 역시 일반인들의 눈에 크게 띄었다. 때문에 인구 유동이 많은 지역이 CA 지역으로 선정되면 다수의 길드들이 고작 한 마리의 크리처를 주변 피해 없이 제압하고자 몰려온다. 다시 말해 전력 낭비였다.
따라서 크리처가 힘도 못 쓸 정도로 단시간 안에 속수무책으로 끝낼 수 있는 사람이 지원을 나가곤 했는데, 서도현이 그중 한 명에 속했다. 그가 CA 지역을 배정받아 오늘 이곳에 온 이유였다.
2시 10분이 되기 1분 전, 서도현은 이겸과 재우를 뒤로 보내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재우가 슬그머니 이겸에게 말을 걸었다.
“마스터 싸우는 거 되게 멋있어요.”
이겸은 도현의 등을 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멋있다고? 가서 뒤통수나 한 대 때려 주고 싶은데?
“되게 스타일리시하게 싸우거든요. 마스터는.”
재우는 동경을 가득 담아 서도현을 바라봤다.
온다. 재우의 중얼거림과 함께 이겸도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크리처는 주저 없이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뒤에 있던 이겸의 흰자가 일순 커지며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서도현이 손을 뻗자 크리처는 몸을 잘게 떨었다. 거미 모양의 크리처는 8개의 다리가 있었고 털이 수북이 나 있었다. 다리를 휘둘렀지만 서도현의 손아귀에 가로막혔다.
재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이겸의 반응을 곁눈질했다. ‘우리 마스터 어때?’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크리처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뚫고 지나가는 일반인, 그런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유려한 동작으로 전투에 임하는 서도현. 서도현은 크리처의 다리가 시멘트 바닥을 내려치려 할 땐 그를 막으러 달려가 몸으로 받아 내거나 혹은 다리를 잘라 내 도심에 피해를 줄였다.
서도현이 빠르게 반응한 것은 아니다. 여유롭고도 천천히, 크리처의 공격 방향을 예상하고 이미 그 경로에 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불, 검술, 방어. 아무리 화려한 기술이라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산된 전략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상대방의 공격 범위, 이동 경로, 약점, 전투 습관 모든 걸 파악해 두면 설사 조막만 한 장난감 칼로도 상대를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서도현은 그 어떤 무기도 없이 크리처와 수합을 겨루고 있었다.
“완전 멋지죠. 저희가 한 번 싸울 동안 마스터는 족히 10번은 싸웠으니까요.”
“…….”
“형?”
재우는 힘찬 자랑질에도 옆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슬쩍 그를 쳐다봤다.
분명 놀랄 거라 생각했는데… 뭔진 몰라도 상당히 빡친 표정이었다.
“…이겸이 형?”
“저 새끼가.”
이겸이 서늘하게 짓씹었다. 크리처 사냥할 때마다 능력을 이렇게 써 댄 거구나. 자신은 뭣도 모르고 거기에 휘말린 거고.
재우가 어색한 몸짓으로 이겸을 잡아당겼다.
“어… 그러고 보니 형은 가상 세계를 기억할 수 있다 하셨죠. 특별한 거라도 보셨어요?”
“…….”
이겸은 끝끝내 침묵을 택했다. 특별한 거? 그래, 뭐. 잘 싸우긴 하네. 하지만 그게 평가의 끝이었다. 그저 지긋지긋할 뿐이다. 이딴 능력에 자신이 얽힌다는 게. 차라리 옆에 있는 재우처럼 아무것도 기억 못 했다면 좋았을 텐데.
전투가 끝난 서도현은 피가 묻은 겉옷을 홀가분히 벗고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내 크리처의 등에서 단번에 뛰어내려 이겸의 앞에 섰다.
“어땠어? 협회랑은 많이 다르지?”
이겸이 불퉁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걸 보려고 만나자 한 게 아니잖아.”
심지어 상호 협의하에 무분별한 능력 사용은 자제하자고 말할 겸 만나자 한 건데, 원치도 않았던 크리처 사냥 방식을 보여 주겠다며 끌고 와 또 능력을 써 대? 이게 장난하나.
“왜? 재밌지 않아? 나만 기억하는 세계. 아, 이제 우리구나.”
이겸은 입을 벙긋했다. 확실히 혼자 반복되는 시간을 감내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모두가 반복됨에 있어 똑같이 행동하는 반면, 서도현은 달리 움직였으니 그를 보고 있던 이겸은 지루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과격하게 싸울 줄이야.
반복되는 가상 세계와 별개로, 서도현이 크리처를 압도하긴 했지만 간간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5분이 지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니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크리처에게 달려들어 싸우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재우에겐 마지막 5분만 인식되어 수월하게 크리처를 제압하는 걸로 보이는구나. 타인의 시선으로 확인하니 꽤 새롭기도 했다.
서도현은 다 안다는 듯 가벼이 웃으며 말했다.
“래터로 올래? 반복되는 시간에 나와 같이 있으면 안 심심하잖아. 힘들게 힘 안 빼도 돼. 내가 명령하는 대로 싸우면 상처 없이 간단히 이기거든.”
뭐, 그럴 거 같긴 하네. 하지만…. 이겸은 서도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모든 문제의 원인 끝엔 서도현이 있었다.
“크리처와 싸우고 싶지도 않고. 그냥 네가 능력 사용할 때 대비라도 하게 언질만 좀 해 줘.”
“귀찮게 내가 왜?”
뻔뻔하게 말하는 그에 이겸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순간 이겸의 어깨에 체중이 실렸다. 서도현이 그에게 팔을 올려 기댄 것이다.
불쾌해….
구멍이 잔뜩 난 귀에는 피어싱이 여러 개 있었고 입꼬리는 언제나 살짝 위를 향해 있었다.
“래터에 들어오면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지만.”
“너 같으면 살인자 새끼랑 한 팀이 되겠냐?”
“네가 기억해 낼 줄 몰랐어. 앞으론 그런 짓 안 할게. 맹세.”
도현은 마치 선서라도 하듯 오른팔을 올려 손바닥을 정면에 보이며 말을 이었다.
“래터로 오면 부사장 자리를 줄게. 음, 부마스터가 되려나. 어때? 꽤 좋은 제안이지 않아?”
부마스터? 권상혁의 설명에 따르면 래터는 상위 길드이기도 했고, 인원이 소수라 길드원이 많이 구른다고도 들었다.
더불어 무엇보다.
“난 여기에 발 안 들일 거야.”
삐뚜름히 거절하는 이겸에 도현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 그럼 영원히 반복하며 살든가.”
“그러니까 그거에 대해 말하자고…!”
“래터에 들어와. 부마스터 자리도 준다니까? 내 옆에 있으면 목숨도 부지해, 언제 반복될지도 알 수 있어, 파격적인 제안 아닌가?”
이겸은 눈을 부릅뜨고 도현을 앙칼지게 노려봤다.
“제안? 그런 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뭐,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긴 하네. 그래도 고민은 해 보는 게 어때? 래터에 들어오는 게 너한테 해는 아니잖아.”
해거든? 해악 그 자체거든?
자신은 평생 이렇게 지낼 거니까 꼬우면 네가 내 쪽에 붙어라. 이 뜻이었다. 인성이 무슨…. 얘는 날 죽였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걸까?
차재우는 대체 왜 이런 놈 밑에서 일을 하는 거지? 얘한테서 존경할 게 무엇 있다고. 이겸은 힐끔 차재우를 쳐다봤다. 기대 어린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시간을 가지며 평생 스트레스받으며 사는가, 아니면 서도현이란 작자의 옆에 붙어 언질이라도 받을 건가.
이윽고 낮은 음정이 튀어나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며칠.”
“일주일.”
이겸의 말에 도현은 만족스레 웃었다.
“긍정적인 답변 기대할게.”
***
이겸과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 재우가 설렘이 담긴 어조로 물어 왔다.
“형, 형. 도현이 형. 이겸이 형 래터에 오는 거예요?”
“그러면 좋겠네.”
조수석에 앉은 재우가 배시시 웃었다.
“형도 이겸이 형이 마음에 들었구나.”
“왜? 왔으면 좋겠어?”
“전 좋아요. 생긴 건 무섭게 생겼는데 완전 착해요.”
앞을 응시하며 운전을 하던 도현은 이겸을 떠올렸다. 저만 보면 얼굴을 와그작 구기며 욕설을 뱉는 게 착한 것 같지만은 않던데.
자신이 한 짓은 기억도 못 하고 이겸이 저를 대하는 태도만 기억하는 일방적이고도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아무튼 능력 사용하지 말라고 빽빽 대들면 정말 죽여야 하나 싶어 나름 고민도 했는데, 일주일 뒤에 답변을 준다니 그때까지 기다리면 될 터였다.
“마스터랑 이겸이 형이 같이 싸우는 것도 기대돼요. 능력을 기억할 수 있다니…!”
확실히 그건 서도현도 재우와 같은 생각이었다. 같이 싸우면 시너지는 나겠지. 손발이 맞는 경우에만 말이었다. 그도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오합지졸이 될 뿐.
윤이겸.
침착하고 머리 회전도 빠른 자 같았다.
같이 싸우면 어떨까, 라니.
굳이 기대까진 아니더라도.
“뭐, 궁금하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