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이겸은 곧장 생각했다.
무시하자.
방금 이상한 무언가에게 잡혀간 남성은 저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간 신변을 보장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것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살며시 도둑 걸음으로 멀어졌다. 다행히 남성에게 정신이 팔렸는지, 아니면 이미 목적을 이뤘는지 샛길에 들어간 그것은 이겸을 쫓아오지 않았다.
누구나 그럴 것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의 범주였다.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누가 거룩한 희생을 하겠는가. 이겸에겐 자신을 걸면서까지 그를 구할 의협심 따위 없었다.
대신 걷고 또 걸었다. 아주 조심히. 사뿐히. 이내 그것과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숨이 벅찰 정도로 내달렸다. 이대로 지쳐 쓰러진다 해도 그것의 손에 잡혀 죽는 것보단 백배 나았다.
편의점도 들르지 않고 겨우 도착한 집 앞 전봇대에 기대어 가쁜 숨을 헐떡였다. 이겸은 방금 전 일어났던 사건들을 차근히 곱씹어 봤다.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고 나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우습게도,
그 사람은 괜찮을까.
였다.
그를 구할 용기도 없으면서, 목숨이 위급해질 상황엔 피하기 급급했으면서 막상 위협이 사라지고 나니 그런 안이한 마음이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모든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생물들은 존속을 유지해 왔고, 천적에게서도 기어코 살아남았다.
본디 인간도 다를 것 없고, 그건 이겸 역시 마찬가지다.
삶에 대한 갈망. 최우선적인 본능.
그런데 왜….
무언가 답답했다.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생존.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생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
하지만 인간에겐 체면이란 단어도 있지 않은가. 하나 남은 양심이 자꾸만 이겸을 보챘다.
아무도 모른다. 나만 목격했고,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
제가 누군가를 미끼로 살아남았단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럴 터였다. 그럴 터인데….
본능과 이성이 충돌했다.
“시발.”
다소 충동적이었다. 이겸이 전봇대 뒤에 누가 버려 놓은 야구 배트를 집어 든 건.
본능과 이성, 둘의 대립은 아직 결론이 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둘 사이의 중간 어디쯤일지도 모른다.
길고 가늘게 살 거야, 짧고 굵게 살 거야.
답은 없었다.
이겸은 아까 그 방향으로 다시 죽도록 내달렸다. 사실 죽도록 내달렸다는 건 변명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공포감 때문인지, 집 앞까지 단번에 뛰어와 피로감이 몰려와서인지 아까보다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는 건 확연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나 남은 양심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을 구하라고.
“헉…, 허억.”
목적지에 도착한 이겸은 야구 배트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된 듯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손에 꽉 쥐고는 걸음을 서성였다. 손바닥에 자꾸만 식은땀이 배어 나와 배트를 잡은 손이 미끄러졌다. 우선은 그것이 있는 샛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잠깐 숨 좀 고르고.
…전장에 가기 전에는 무기 점검이 필수잖아?
이렇다 할 무기가 야구 배트와 건장한 제 한 몸밖에 없던 이겸은 최상의 상태로 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그사이에 남자가 죽었다는 확답을 듣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죽었다면 에이, 늦었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는 구하러 왔었어. 라며 미련 없이 발길을 뗐을 텐데. 상대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서늘한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샛길에는 여전히 짙은 안개가 어둡게 깔려 있었다.
이판사판이다.
이겸은 힘찬 뜀박질과 함께 어둠이 집어먹은 샛길로 잽싸게 들어섰다. 그러자 안을 뒤덮은 검은 안개가 옅어지며 그것의 거대한 형체가 또렷이 보였다.
분명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이제는 이겸의 몸집보다 2배나 커져 있었다.
그 앞에는 쓰러져 있는 남자가 널브러진 채였다. 피는 흘리지 않은 것 같은데 꿈쩍도 안 한다. 기절했나?
정말 운 좋게도 그것은 이겸에게서 뒤돌아 있었다. 지금이 기회라 여긴 이겸은 제 온 힘을 내리 실어 야구 배트를 휘둘러 그것의 꼬리를 가격했다.
까랑. 팅- 데구루루. 시원한 타격 소리가 들려오고, 배트를 놓친 순간 저릿한 팔을 부여잡았다.
“윽….”
야구 배트로 때린 것인데도 어찌나 단단한지 이겸의 팔에도 타격감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팔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야구 배트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야구공이 아닌 야구 배트로 홈런을 성사해 버린 꼴이었다.
‘그것’에게 효과는 일절 없어 보였다.
아니…, 물고기 아니야? 뭐가 이리 단단해?
그때, 그것이 비늘을 아름다운 색으로 반짝이며 이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한 치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검은 눈동자 안에 공포에 질린 이겸의 모습이 또렷이 비쳤다.
이겸은 눈을 콱 감았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누군가는 죽기 전, 인생의 모든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그는 파노라마 대신 온갖 것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쓰레기 불법 투기를 한 얼굴 모를 야구 배트의 주인이었다.
전봇대에 버려져 있는 야구 배트가 제게 용기만 안 줬어도, 하찮은 자존심만 안 부렸어도, 지금쯤 좁디좁지만 아늑한 집 안에 발 뻗고 누워 있을 텐데.
감았던 눈을 살짝 뜨니 제 모습이 비친 그것의 눈꺼풀이 내려갔다가, 이내 올라갔다. 눈을 깜빡거린 것이다.
내가… 보이나?
그것이 이겸을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벌린 입이 너무나도 커서 순간 제 앞에 거대한 블랙홀이 생긴 줄 알았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이지 않았으면 진짜로 착각할 뻔했다.
몸집이 작았을 땐 손가락이 절단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단 한 번의 입질로도 인간의 몸을 두 동강 낼 수 있을 법했다.
‘…야구 배트가.’
고작 야구 배트로 그것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느껴졌지만,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침을 삼키는 일조차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2대 1로 싸우면 승산이 있을까? 그러기에 아직 남자는 기절해 있었다.
차라리 둘러업고 도망간다면? 느릿한 속도로는 잡힐 게 뻔했다. 그렇다면 혼자….
주먹에 피가 몰릴 정도로 꽉 쥐었다.
혼자 도망치면 기껏 돌아온 보람이 없잖은가.
이겸의 눈이 표독스레 빛나며 제게 벌어진 입을 노려보았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여기서 죽기엔 아직 창창하고 못 이룬 것들도 많았다. 억울했다.
그대로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그 일련의 행동은 곧 저를 집어삼킬 최후의 장면을 뇌 속에 입력하기 위해서도, 제 목숨을 끊어 갈 그것의 생김새를 기억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것과 싸우다 죽는다 해도,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보잘것없이 죽을 순 없었다.
그는 단지, 타이밍을 맞출 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쩍 벌려진 거대한 입이 닫히는 순간을, 그 순간의 빈틈을.
지금이다!
물고기의 입이 텁! 하고 닫힌 찰나, 귀가 찌릿할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이겸은 야구 배트 쪽으로 몸을 굴리면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저 입에 스치기만 해도 절단기처럼 신체 일부분이 토막 날 게 분명했다.
곧장 몸을 일으켜서 본 물고기는 자신의 입이 닫히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인지 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뭐지? 입을 닫을 때마다 무리가 오나?
참으로 이상했다. 보통 제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신체가 이루어진다. 한데 저가 입을 다물어 놓고 전해져 오는 아픔에 경련하다니?
오로지 살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 한 몸을 불사르는 생명체같이 느껴졌다.
이겸은 가까스로 야구 배트를 챙겨 일어나 그것을 쏘아봤다.
입을 다물 때를 이용해 공격하면 어찌어찌 먹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또 입을 다물게 하지?
그리고 이번처럼 타이밍을 맞춰 재차 피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
애써 가쁜 숨을 정돈했다. 몸을 한 번 구른 게 다인데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의 공포감에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그것이 몸을 부르르 떨며 고통을 떨쳐 낼 동안, 이겸은 호흡을 고르며 약점을 탐색했다.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했다 치면, 그다음엔 어딜 공략해야 효율적인 공격이 될까. 오로지 승리를 위한 궁리였다.
그러다가 눈에 띄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이 분명 없었을 터인 아가미를 꺼내 공기 중에 은은히 머무는 검은 안개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자 마치 호흡이라도 하는 양, 오색찬란하게 빛나던 비늘들이 살아 숨 쉬듯 빛을 강렬하게 뿜어냈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빛에 눈이 따가워 반사적으로 감을 뻔했지만 꾹 참았다. 이대로 시야가 먼다 해도, 눈을 감는 즉시 제 신체 한 군데가 사라질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겸은 천천히 야구 배트를 땅에 끌며 그것에게 다가갔다.
‘아가미를 숨기고 있었던 건가?’
왜?
그렇구나.
저기가 약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