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침대 헤드에 기대고 앉아 해성이 나온 예능 프로그램을 보던 하진이 갑자기 바뀌는 화면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 정우’라는 글자가 진동과 함께 울리고 있었다. 하진은 조금 머뭇댔지만, 세 번 정도 더 진동이 울렸을 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말을 했는데 정작 정우는 조용했다. 하진은 전화를 먼저 걸어놓고 조용한 정우의 반응에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 …아, 아! 미안해요, 형. 받을 줄 몰라서 지금 좀 놀랐어요.
“끊을까?”
- 아니요!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메시지 남기려고 했는데, 형 목소리가 들려서 잠깐 놀랐어요. 좋아서, 좋아서 놀란 거예요.
장난을 섞어서 한 말인데 장난처럼 안 들렸는지 필사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는 정우의 목소리에 하진은 조금 미안해졌다.
“숙소야?”
- 네. 오늘은 스케줄 없어서 연습실에 있다가 왔어요. 아, 운동도 하고. 형은 오늘 뭐 했어요?
오늘 뭐 했더라. 하진은 옆에 놓인 큰 쿠션을 들어 품에 안았다. 그리고 쿠션 위로 턱을 올리고 생각했다.
“엄마랑 나가서 점심 먹고, 영화 봤어. 그리고 마트 가서 장도 보고… 들어와서 엄마랑 또 영화 보다가 초저녁에 잠들어서 저녁도 늦게 먹고 지금 잠 안 와서 해성이 형 나온 예능 보고 있었어. 그냥 요즘 난 거의 매일 이렇게 지내. 별로 특별할 건 없어.”
- 형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좋아요. 꼭 자기 전에 형이랑 침대에 누워서 얘기하는 기분이에요.
하진은 괜히 손끝이 간지러운 기분에 쿠션 끄트머리를 당겼다. 정우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괜히 여기저기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네가 왔다 간 뒤로 더 많이 괜찮아졌어. 너도 괜찮았으면 좋겠어.”
- 형이 괜찮으면, 나도 다 괜찮아요.
“…….”
- 보고 싶다, 또. 우리 만난 지 사흘이나 지났어요.
사실 하진에게도 사흘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활동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전혀 신경 쓰지 못할 때가 많고, 또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몇 주가 훌쩍 지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뭉텅이로 확 지나는 시간들 속에 살다가 이렇게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니 확실히 시간에 따라 여러 감정들이 다채롭게 더 선명하게 피어났다.
“내일은 스케줄 어때?”
- 내일도 딱히 잡힌 건 없어요.
“…그럼 내일 점심 먹으러 올래? 내일 부모님 봉사 가시는 날이거든. 자고 오실 거라 혼자 있어.”
하진은 말하고 나서야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못 할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우가 스스로 결정해서 열 번을 정해야 하는데 제가 괜히 오라고 한 것 같았다.
“아… 미안.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 갈래요.
“…….”
-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부모님 안 계시다고 한 건… 물론 부모님 계실 때 와도 되지만, 엄마가 자꾸 신경 쓰니까… 안 계실 때 오면 너도 좀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해서 말한 거야.”
구구절절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제가 너무 웃겨서 하진은 말을 하면서도 괜히 애꿎은 쿠션만 괴롭혔다.
-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형 어머니 뵙는 거 좋은데, 죄송하기도 하고, 또 저 가면 챙겨 주시고 하셔서… 또 죄송하고 했거든요. 제가 그럴 짓을 해서 그런 거지만…….
“엄마는 그냥 계속 널 좋아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말 안 한 거고, 앞으로도 말 안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조금은 편해졌으면 좋겠다.”
- 그럴게요. 내일 몇 시쯤 가는 게 좋아요?
“…음, 열두 시 반쯤 올래?”
- 네. 그때까지 갈게요.
응, 그럼 내일 보자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정우와 이렇게 긴 통화를 할 일이 없어서 통화가 너무 어색했다. 늘 같이 있었기에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더 익숙했었다. 같이 데뷔 조가 된 후에 메시지를 보내거나 이렇게 통화를 하는 일은 사실 거의 없어서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 형.
“응?”
- 내일 오라고 해 줘서 진짜 고마워요. 사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계속 가고 싶었는데… 형이 너무 가볍게 생각할까 봐… 무서워서 못 갔거든요. 얼마나 있다가 가야 진정성이 좀 있어 보일까 고민했어요.
정우의 말에 하진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쿠션 위로 입술까지 꾹 묻었다.
“…뭐 그런 걸 고민해. 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잖아.”
- 갔다가 바로 또 가고 그럴지도 몰라요.
“그래도 돼. 너한테 맡긴 거니까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내 눈치 보지 마.”
- 네. 그것도 그럴게요.
“말 잘 듣네.”
- 앞으로는 더 잘 들을게요. 형이 하는 말 전부.
“…네가 그렇게 말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 안 해도 돼요. 난 지금 이렇게 형이랑 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형은 하고 싶은 말만 해요. 듣기 싫으면 듣기 싫다고 말해도 되고, 형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형은 그래도 돼요.
이 순간을 잘 넘어가기 위해서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오늘도 무사히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일부러 의심을 해 보려고 날카롭게 들어도 결국, 그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부드럽게 귀를 기울이게 됐다.
하진은 오늘 연습 중 있었던 일을 말하는 정우의 목소리에 더 깊게 귀를 기울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그 익숙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높아지지 않는 목소리, 가끔 들리는 아주 작은 웃음. 오늘도 하진의 밤은 외롭지 않았다.
***
아침 일찍 직접 구운 쿠키와 아이들을 위해 산 여러 물건들을 가지고 집을 나서는 부모님을 배웅한 하진이 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청소를 했다. 워낙 집이 깨끗해서 따로 막 여러 단계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청소기를 한 번 돌리기만 해도 쾌적한 집은 조금 더 쾌적해졌다.
방 청소까지 다 한 하진은 씻고 나와 점심에 만들 파스타 레시피를 검색했다. 여러 음식을 같이 다 만들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타와 오므라이스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걸 준비할 생각이었다.
일찍 일어나서 그래도 시간이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열 시 반이었다. 하진은 얼른 부엌으로 가 오므라이스와 파스타를 만들 재료를 전부 꺼냈다. 파스타 면이야 정우가 오기 직전에 삶기 시작하면 되니 먼저 오므라이스 안에 넣을 볶음밥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가서 먹고 들어오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누군가가 알아본다면 곤란하기도 하고, 또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 외식보다는 집에서 먹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진은 시간을 내내 확인하며 밥을 볶고, 파스타 소스를 데웠다.
그때, 벨이 울렸다. 면을 물이 펄펄 끓는 파스타 냄비 안에 넣은 하진이 타이머를 맞추고 얼른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정우예요, 형.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진은 문을 열었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린 정우가 하진을 보며 웃었다. 하진이 문을 크게 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들어와.”
“네. 어, 맛있는 냄새 나요.”
“냄새만 맛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럴 리가요. 형이 해주는 거 다 맛있었어요.”
“오늘도 그래야 할 텐데.”
“당연히 그럴 거예요. 아, 형 이거.”
“이게 뭐야?”
하진은 정우가 내려놓은 쇼핑백들을 보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귀에 걸린 마스크를 빼고, 모자를 벗은 정우가 머리칼을 만지며 말했다.
“하나는 커피예요. 어머니 커피 좋아하신다고 해서요. 그리고 하나는 형 거예요. 대단한 건 아니고… 향수인데 형이랑 어울려서 하나 샀어요.”
그냥 와도 되는데, 라는 말을 하려다가 멈춘 하진이 작은 쇼핑백을 열어 안에 든 향수 케이스를 꺼내 들어 포장을 벗겼다. 그리고 손목에 한 번 뿌려 향을 맡았다.
“향 좋다. 나 이런 향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았어?”
“당연히 알죠. 형이랑 같은 방에서 계속 있었는데. 그리고 형한테서 이런 향 나거든요. 따뜻한 향.”
하진은 다시 손목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딱 제가 좋아하고 즐겨 쓰는 포근하고 따뜻한 향이었다.
“고마워. 잘 쓸게.”
“맘에 든다니까 다행이에요. 그런데 형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요. 저도 도울게요.”
“아, 괜찮은데… 거의 다 했어.”
“그래도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아, 그럼 이거 포크랑 스푼만 좀 놔주라. 어, 면 다 삶아졌나 봐. 빨리 꺼야겠다.”
맞춰 둔 알람이 울리는 것에 얼른 다시 간 하진이 서둘러 파스타를 만들었다. 소스까지 만들 자신은 없어서 그냥 집에 있는 파는 소스를 사용했는데, 그러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할 만큼 간을 보니 맛있었다. 하진은 밥을 다시 데우고, 얇게 달걀을 부쳐 넓은 접시에 담아 오므라이스 모양을 만들었다.
“어떻게 다 되기는 됐는데 모양이 좀 이상해.”
“예쁜데요.”
“그렇게 보이면 다행이고.”
정우의 앞에 파스타와 오므라이스를 놓아준 하진이 제 것도 가져와 앞에 놓았다. 겨우 두 가지를 했을 뿐인데 이렇게 시간이 훌쩍 가고, 힘들 줄은 몰랐다.
“많이 먹어.”
“네. 잘 먹을게요, 형.”
포크를 든 하진이 면과 소스를 섞으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얼른 파스타를 잘 섞어 크게 한 입을 먹었다.
“진짜 맛있어요.”
“면은 안 퍼졌어?”
“네, 딱 좋아요.”
“다행이다. 사실 소스는 파는 거야.”
“파는 걸로도 이렇게 맛있게 못 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번에는 오므라이스를 크게 한 숟가락 뜬 정우가 깔끔하게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진을 보았다.
“파는 것 같아요. 진짜 맛있다.”
“많이 먹어. 맛있다니까 이제 좀 맘이 놓이네.”
하진은 그제야 파스타를 한 입 먹었다. 정우가 정말 잘 먹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하지는 않을지 걱정했는데, 걱정한 만큼은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식사를 다 하고는 괜찮다는데도 정우가 설거지를 했다. 하진은 못 말리겠다는 듯 옆에 서서 정우를 바라보았다.
“이건 당연히 제가 해야 되는 거예요. 숙소에서도 그랬잖아요.”
“여긴 숙소 아니잖아.”
“형이 맛있는 거 해 줬잖아요. 당연히 정리는 제가 해야죠.”
“…커피 마실래, 차 마실래?”
“음, 커피?”
“알았어. 커피 맛있게 내려줄게.”
하진이 직접 원두를 골라 커피를 내리는 동안 설거지를 마친 정우가 마른행주로 싱크대를 싹 다 정리했다. 하진은 깔끔하게 정리하는 정우를 보며 따뜻한 머그 두 개와 쿠키, 미니 케이크 같은 달콤한 것들이 담긴 접시를 트레이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마실래? 아니면 방에 갈까?”
“형 방에 가요. 저번에는 정신이 없어서 형 방이 어땠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다시 보고 싶어요.”
“…별거 없는데.”
따뜻함이 묻은 트레이를 들고 방으로 간 하진이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들어오는 정우를 보았다.
“편하게 앉아.”
“형 방은 진짜 형이랑 똑같아요.”
“어떤데?”
“깔끔하고,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또…….”
“또?”
“예뻐요.”
“…….”
“커피 잘 마실게요.”
제가 대답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정우를 본 하진이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사를 할 때는 그래도 먹을 것에 집중을 할 수 있어서 괜찮았는데 이렇게 방에 둘이 있으니 정말 쉽게 어색함이 고였다. 하진은 한 번씩 정우가 하는 말들에 대답을 했지만, 딱히 먼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해 곤란했다. 일상 이야기를 그냥 하기도 그렇고, 팀 이야기를 하기도 그래서 내내 거의 비어가는 머그만 쥐고 있었다.
“아, 형. 그거 봤어요? 인규 형 나온 스타룸이요. 거기서 형 몸개그 해서 난리도 아니었어요. 저도 본방은 못 봤는데 형들이 인규 형 놀리면서 움짤 올라온 거 계속 보고 그래서 봤거든요. 인규 형 거기서 계속 웃겼다고 요즘 진짜 인기 좋아요.”
“아, 나도 말만 듣고 아직 못 봤는데.”
“같이 볼래요?”
“응, 그러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뭐라도 다른 곳에 집중할 게 필요했다. 하진은 책상 위에 충전해 둔 태블릿PC를 들어 방송을 볼 수 있는 앱에 접속했다.
“아, 여기 있다.”
인규가 나오는 화를 찾아 재생한 하진이 얼른 정우의 옆으로 가 앉았다. 정우가 하진의 손에 들린 태블릿PC를 가져가 대신 들었다. 하진은 괜히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그래도 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집중할 게 생겨 다행이었다.
“…벽에 기대고 앉을래? 그게 더 편할 텐데.”
“아, 네.”
허리를 내내 세우고 보기가 불편해 하진은 침대 위로 올라 헤드가 아니라 더 세로로 넓은 벽에 등을 기댔다. 침대로 더 깊게 올라온 정우도 하진의 옆으로 등을 기대고 앉았다. 기다란 다리가 침대 바깥으로 나간 것을 본 하진이 작게 웃음 지었다.
예능은 재밌었다. 하진은 인규가 정말 저렇게 재밌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그 소심함에서 나오는 개그감이 너무 웃겼다. 하진은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인규가 자기 발에 걸려 스튜디오에서 혼자 넘어졌을 때는 눈물이 날 만큼 웃었다.
그렇게 프로그램 하나를 보고 다시 어색함 속에 있기 싫어 또 다른 것을 계속 틀었다. 멤버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런지 다소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하진은 계속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일찍 일어나기도 했고, 또 내내 분주하게 요리하기도 했고, 좀 지루한 프로그램을 내내 집중해서 보려니 자꾸만 눈이 감겼다. 하진은 절대 잠들지 않으려고 계속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밀려드는 잠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진의 고개가 기울었다. 잠들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조차 몽롱하게 흐려질 때쯤 아주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하진은 그렇게 잠들었다.
***
누운 기억은 없는데 눈을 떴을 때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진은 어두워진 방 안에서 조금 놀라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
정우와 점심을 먹었고, 커피에 쿠키를 먹으면서 인규가 나오는 예능을 봤었다. 그리고 재밌을 것 같아 틀었던 다른 프로그램 하나가 생각보다 지루했고……. 그러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정우는 간 걸까.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무심코 뻗은 손끝에 닿은 정우를 느낀 하진이 숨을 흡 들이마셨다.
“…….”
그제야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정우가 보였다. 제 옆에 마주 본 채로 누워 잠이 든 정우가. 깨워야 할까. 지금 몇 시쯤 된 걸까. 가라고 말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하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잠든 정우를 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깼어요?”
그때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감긴 눈이 뜨이고 어둑한 방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아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시선이 뒤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 자려고 한 게 아닌데. 벌써 어두워졌어.”
“형 자는 숨소리 들으니까 나도 졸려서 잤어요.”
“…그랬구나.”
늦었다고 말하기에는 지금이 몇 시인지 알지도 못하고, 시간을 확인하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이상하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진은 정우를 보는 일밖에 못 하는 사람처럼 내내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의 시선도 그런 하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
가까워졌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진은 정우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입술이 닿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한 것처럼 입술이 맞물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간지러운 소리가 나게 입 맞추는 입술에 발끝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하진은 제 입술 사이를 핥는 정우의 혀끝을 살짝 문질렀다. 지금은 키스하고 싶었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은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열리고 뜨거운 혀가 뒤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