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19화 (119/122)

#119

밀어내려고 정우의 어깨 위로 올린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진은 그렇게 정우의 어깨를 쥔 채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배 위로 닿아온 따뜻함은 곧 머리끝까지 퍼져 머릿속에 들어 있던 모든 생각을 데웠다. 애초에 차가운 생각 같은 건 단 하나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형이 꼭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꼭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거기가 원래 형이 있던 자리니까. 형은 원래 나를 좋아했고, 이제 나도 형을 좋아하니까 금방 그 마음 풀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

“지금도 형이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

“그런데 내 옆이 원래 형이 있던 자리였다는 생각은 안 해요.”

“…….”

“그건 형 마음이니까.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거 이제 알아요. 내가 강요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애원한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난 애원이라고 말하면서 형한테 강요했어요. 이제 그만하라고, 하던 대로 하라고.”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게 됐을까. 긴 시간도 아니고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그동안 정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진은 정우 혼자만의 그 시간들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알게 된 거야?”

“…형이 진짜 내 앞에서 없어지고 나니까 머릿속이 텅 비었어요.”

없어진다는 말을 할 때 정우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하진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채 다시는 떨어지기 싫은 아이처럼 매달린 정우를 내려 보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텅 비고 나니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것부터 알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형을 본 처음부터 생각했는데…….”

“…….”

“…형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이제껏 정우에게 들은 그 어떤 말보다도 가장 깊게 닿아왔다. 하진은 정우의 어깨를 쥔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모든 게 좋아서 형이 내 옆에 늘 있었던 게 아니라…….”

“…….”

“사랑이 그런 거였어요.”

“…….”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으니까 그냥 같이 있고만 싶은 거. 볼 수만 있어도 좋은 거. 웃는 얼굴 한 번만 보면 살 것 같은 거.”

“…….”

“강하진…….”

“…….”

“그 이름 하나에 숨이 턱 막히는 거.”

처음으로 정우가 제 마음을 정확히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정우가 말한 사랑은 늘 무언가 조금은 비틀려 있었다. 하진이 그동안 해 온 사랑과는 묘하게 달랐었다. 그런데 지금 정우는 진짜 그 사랑을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형이 나를 참아 주고 있었던 거였어요.”

“…….”

“그렇게 해서라도… 나 같은 놈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하진의 눈동자가 매끄럽게 젖어 들었다. 울 생각은 없었는데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정우가 제 마음을 알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폐허에 따뜻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늘 추웠고, 사방이 날카로웠던 그 폐허의 계절이 바뀌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참았어요.”

“…….”

“그렇게 오래… 어떻게 그걸 참았어요, 형. 난 그것도 모르고… 형이 날 좋아하니까 당연히 겪어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어요. 참는 건 나인 줄 알았는데…….”

“…….”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떨렸다. 어깨를 짚은 손이 떨리고, 목소리 대신 미처 삼키지 못한 울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형이… 형이 나를 더 이상 못 견디는 게 당연한 건데… 내가 그런 형 앞에서 또… 그 상황만 모면하려고 또, 또 형을…….”

턱에 맺힌 눈물 위로 흘러내린 눈물이 섞여 뚝뚝 떨어졌다. 하진은 정우의 어깨 위에 두었던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고 느릿하게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고개 숙인 정우를 보며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차정우.”

“…….”

“울지 말랬지.”

“…미안해요, 형. 안 울려고 했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랬는데.”

“…잘못했…… 아니. 이 말도 하면 안 되는데…….”

눈물이 묻은 속눈썹을 들어 올려 저를 보는 정우를 본 하진이 작게 웃었다. 어쩐지 이 상황이 좀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현실감이 없기도 해서 나온 웃음이었다. 정우는 제 앞에서 맺힌 하진의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어른인 척 어떻게 했어?”

“…그렇게 해야 되는 건 줄 알았어요.”

하진은 가만히 정우를 눈에 담았다. 젖은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감지 않아도 흐르고, 눈을 깜빡일 때면 뚝뚝 떨어졌다. 하진이 그런 정우를 보다가 손을 뻗어 그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러 닦아 주었다.

“세 시간 기다려줘서 고마워.”

“……형.”

“네가 안 기다렸으면 오늘 못 만났을 거 아냐.”

“…….”

“그랬으면 이런 얘기도 못 들었겠지. 다른 날 들었으면 조금 달랐을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에 들어서 다행이야.”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른인 척하는 정우가 아니라 딱 그 나이, 저보다 어린 정우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더 편안했다. 사회생활을 더 혹독하게 해야 하는 그런 직업을 벗고, 강하진과 차정우로 마주한 최초의 순간인 것 같았다.

“전에는 너 울면 그래, 너도 나 운 만큼 울어 봐라 싶었는데… 오늘은 마음이 아파.”

“…….”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진짜예요, 그런 말 안 붙여도 오늘은 알겠어. 네가 정말 많이 생각한 거.”

“…….”

“널 사랑해서 네 말처럼 너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네 아픈 말이나 그런 거 버틴 건 맞는데… 그건 내 선택이었어. 내가 버틴 걸 네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너도 내 마음 곤란했을 거고, 너도 그런 매달리는 날 버텼을 테니까.”

정우의 눈가에 댄 하진의 손가락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진은 젖은 정우의 속눈썹 위를 살짝 문질렀다. 놀란 듯, 낯선 듯 감겼던 눈꺼풀이 다시 올라가며 젖은 눈동자가 마주했다.

“이제 예전 일로 울지는 않을 것 같아. 네가 그렇게 만들어 줬어.”

“…….”

“고마워. 오늘 와 줘서.”

제 얼굴을 감싼 하진의 손을 쥔 정우가 가볍게 그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일곱 시간, 열 시간도 더 기다렸을 거예요.”

“…….”

“…나 오늘은 정말 형 보고 싶었거든.”

말보다 마음이 더 클 때가 있었다. 그 어떤 말을 꺼내도 마음의 울림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때가 분명 존재했다. 지금이 그랬다. 하진은 그냥 가만히 한참이나 정우와 눈을 마주했다.

“…늦었다. 이제 가. 가서 혹시 모르니까 감기약 하나 먹고 푹 자. 밖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감기 걸려.”

“…그럴게요.”

정우는 하진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닫힌 하진의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사실 많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은 저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만히 문손잡이를 쥔 정우가 하진을 돌아보았다.

“…….”

“…….”

하진은 확실히 저보다 어른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는 비슷한 나이에 무슨 큰 차이가 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하진은 달랐다. 품는 마음도 생각하는 그 크기도 전부 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

문손잡이를 쥐고 힘을 주던 정우가 그대로 손에서 힘을 빼내며 돌아섰다. 하진은 저를 향해 돌아선 정우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얼굴 위로 정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주친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제 눈동자가 흔들리면 정우의 눈동자도 따라 흔들렸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데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

“…….”

가까워지는 숨, 시선, 체온. 눈물의 저릿한 향과 더 이상 차갑지 않은 손.

“…….”

“…….”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충분히 맞물릴 거리였다. 하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주 살짝 입술이 닿았다. 건조하고 뜨거운 입술. 아랫입술이 스친 순간 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완전히 입술이 맞물리는 느낌에 정우의 팔을 잡았다. 질척하게 섞인 것도 아니고 버석한 입술이 닿기만 했을 뿐인데 모든 게 엉망이었다.

“…벌써 보고 싶어요.”

입술이 닿은 채 전해지는 목소리에 하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따뜻하게 데워진 눈동자는 더 이상 눈물을 머금지 않았다.

“…또 와도 돼.”

하진의 말에 놀란 정우가 조금 뒤로 얼굴을 떼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놀란 그 얼굴을 본 하진이 다시 분명히 말해 주었다.

“와도 돼. 대신 꼭 미리 말해 줘.”

“…….”

“혼자 기다리지 말고.”

“…네. 그럴게요. 그럴게요, 형. 그럴 거예요. 미리 말할게요. 다 말할 거예요.”

“…이제 가. 너무 늦었어.”

“갈게요.”

아쉽다는 듯 살짝 몸을 뗀 정우가 이번에는 정말 문을 열고 나섰다. 하진이 닫힌 서재 문을 보고는 정우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작게 죽였다.

“영화 보시나 봐. 괜히 엄마까지 나오면 좀… 그러니까 조용히 나가자. 엄마한테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네.”

조용히 소리를 죽여 신발을 신고 나간 정우가 저를 따라 나오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안 나와도 돼요. 밖에 추워요.”

“넌 거기서 세 시간도 있었잖아. 괜찮아.”

“옷 얇잖아요. 감기 걸려요. 그럼 이거 입어요.”

제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는 정우를 본 하진이 얼른 그 팔을 잡아 다시 입혀 주었다.

“1층까지만 갈게. 밖에 안 나가고. 그럼 됐지?”

“…네.”

다시 겉옷을 잘 입는 정우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하진이 1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왜… 안 물어봐? 팀 어떻게 할 건지, 숙소에는 정말 안 올 건지 그런 거.”

“…형이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

“하나 말하고 싶은 건…….”

정우가 고개를 돌려 하진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동자는 그 어떤 거짓도 흔들림도 없었다.

“형이 어떤 결정을 하든 난 받아들일 거라는 거예요.”

“…내가 널 다시 안 본다고 해도?”

“…….”

잠시 대답하지 않던 정우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게 형의 결정이라면 따라야죠. 형도 많이 생각했을 거고, 그게 형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난… 그렇게 할 거예요.”

“아까는 애 같았는데, 지금은 또 어른이네.”

“…형은 어느 쪽이 더 좋아요? 내가 애인 거랑 어른인 거랑.”

1층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울렸다. 하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정우와 1층 현관문까지 걸어갔다.

“그 대답은 열 번 더 보면, 그때 할게.”

“그럼… 나 열 번은 더 만나 준다는 거네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해도…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싶어.”

“…….”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때.”

“…….”

“널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야. 네 마음 진심인 거 알았고, 기특할 만큼 달라진 것도 이제 알아. 아는데… 아직은 신중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그 열 번이 열흘이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물론, 나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이 저를 열 번이나 더 만나 준다는 그 자체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조심해서 가.”

“…네. 들어가요, 형.”

“먼저 가.”

“형 올라가는 거 보고 갈게요.”

“…그래, 알았어.”

하진은 정우를 보며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리고 뒤돌아 걸었다. 뒤에서 정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하진이 닫히는 문 사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미소 지었다. 하진은 완전히 닫힌 문 안에서 입술을 끌어올렸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그 열 번을 벌써부터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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