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엘리베이터가 유난히 오늘따라 늦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진은 느리게 바뀌는 숫자를 보며 괜히 두 손을 맞잡았다. 또 느릿하게 열리는 문 안으로 지나치게 빨리 올라 1층 버튼을 누르는 동안에도 이상하게 조급해졌다. 나가서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아니, 솔직히 제가 정우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닌지도 알지 못했다. 그냥 지금은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나가는 것뿐이었다.
1층에 도착했다는 안내음과 함께 반쯤 열린 문 밖으로 내린 하진이 서둘러 아파트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문을 확 여는 순간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에 닿아오는 것보다도 먼저 정우가 눈에 들어왔다. 아, 소리를 작게 내며 벌어진 입속으로 뒤늦게 찬 기운이 파고들었다. 겁도 없이 모자와 마스크도 없이 그냥 서 있는 그 얼굴을 보는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형.”
꽉 쥔 문손잡이가 차가웠다. 하진은 저를 보고 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여전히 믿을 수가 없는 건지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정우를 본 하진이 먼저 고개를 숙여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네가 한 말 듣고 나온 거야.”
“…들었어요?”
“응.”
“…전부?”
“응. 전부.”
“…고마워요. 들어줘서. 안 들어줄 줄 알았거든요. 형이 안 들어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형이 들어야 할 이유도 없는 거고, 나도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몇 계단 아래에 선 정우는 어둠 속에 있지만,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였다. 목소리도 너무나 정확했다. 하진은 잡고 있는 문손잡이를 더 꽉 쥐고 생각했다. 여기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둘 다 얼굴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근처 카페를 가야 할지 생각도 해 봤지만, 그곳은 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었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든 자유로울 수가 없어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곳은 한 곳뿐이었다.
“여기서 그러지 말고 올라와.”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얘기할 데가 내 방밖에 없어서 그래.”
“…이제 나랑 얘기해 주는 거예요?”
“미안해, 잘못했어, 전에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내가 나빴어. 이런 말 하고 울 거면 그냥 가. 너랑 그런 얘기 하기 싫어.”
“…안 그럴게요.”
“따라와, 그럼.”
하진은 정우를 향해 문을 크게 열었다. 정우가 하진과 자신의 사이에 있는 낮은 계단을 단숨에 올라 다가왔다. 확 가까워진 정우를 본 하진이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잡고 있던 문을 정우에게 넘겨주고 안으로 휙 돌아 들어갔다.
아직 1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오른 하진이 제 옆으로 들어와 선 정우를 흘끗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기만 한데도 찬 기운이 느껴졌다.
“언제 왔어?”
“좀 전에요.”
“진짜?”
“…세 시간쯤 됐어요.”
“뭐?”
세 시간이라는 말에 놀라 정우를 본 하진이 저를 보는 그 주눅 든 얼굴에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라 좀 이상하다 했지만, 세 시간이나 밖에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내려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문을 열며 뒤에 멀뚱히 선 정우를 돌아보았다.
“들어와.”
“…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엄마가 나오는 게 보였다. 어디를 갔다 오는 거냐고 묻던 목소리가 하진의 등 뒤에 보이는 정우를 향해 높아졌다.
“어머, 정우야!”
“안녕하셨어요.”
“그럼, 나는 잘 지냈지. 저번에 그렇게 보내고 걱정했는데, 잘 왔어. 하진이가 정우 데리러 간 거구나. 얼른 들어와. 밖에 춥지?”
“요즘 꽤 쌀쌀해졌죠. 어머니 감기 조심하세요.”
“이 와중에도 아줌마 걱정해 주는 거야? 고마워. 정우도 아프지 말고.”
“…네.”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줌마가 너무 반가워서 너무 오래 잡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 봐. 먹을 거라도 좀 챙겨 줄까?”
들뜬 엄마의 목소리에 돌아본 하진이 고개를 저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밖에 세 시간을 있었다는 정우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는 됐고, 정우만 따뜻한 차 한 잔 부탁해요, 엄마.”
“알았어. 들어가 있어. 손이 얼음장이네. 가서 몸 좀 녹이고 있어.”
어디 멀리 갔던 막내아들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살가운 엄마를 본 하진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저를 따라 들어오는 정우의 기척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앉아도 돼.”
“서 있어도 괜찮아요.”
“나만 앉아서 얘기하기도 그렇잖아.”
“…앉을게요.”
침대에 앉는 정우를 본 하진이 의자를 돌려 앉았다.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엄마가 차를 가지고 올 것 같아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세 시간이나 거기 그러고 있던 거야?”
“아… 계속 한자리에 있던 건 아니고, 갈까 해서 가다가 다시 오고, 또 가다가 다시 오고 해서… 생각보다 엄청 긴 시간 아니었어요. 한 시간도 안 된 줄 알았는데, 시간 보고 알았어요.”
“왜 다시 왔는데?”
“…형이랑 멀어지는 것 같아서… 가기 싫었어요.”
하진은 저를 바라보는 정우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차정우라는 사람을 안 뒤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왔을 때 바로 메시지를 남기지 그랬어. 그럼 그렇게 세 시간이나 안 기다려도 되잖아.”
“형 나오게 하려고 온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냥… 형이랑 가까이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가까이 오니까 자꾸 가기 싫고,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보고 가고 싶고 그래서…….”
전에는 정우가 어리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 늘 나이보다 어른스럽게 맡은 일을 잘하고, 워낙 실력이 좋아 모든 것을 압도하는 모습만 봤기에 저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늘 정우가 형 같다고 생각했었다. 실질적 막내는 저라는 말을 다른 멤버들이 할 정도로 정말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있는 정우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단순한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어린애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단순한 말들이 거짓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끝까지 안 듣고 안 나갔으면 어쩌려고.”
“…좀 더 있다가 아마 갔겠죠?”
그때 노크와 함께 살짝 문이 열렸다. 벌떡 일어난 정우가 얼른 하진의 어머니가 내미는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그 위에는 향긋하고 따뜻한 차 두 잔과 작은 쿠키들이 놓여있었다.
“그럼 편하게 얘기들 나눠. 난 서재 가서 영화 볼 거니까.”
“아,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해요.”
“아니야. 아줌마 서재에서 영화 보는 거 좋아해. 그렇지, 하진아?”
하진은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괜히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정우는 닫히는 문을 보며 트레이를 하진의 책상 위에 놓았다. 하진이 머그를 들어 정우에게 내밀었다.
“마셔. 추웠을 텐데.”
“…네.”
하진은 어쩐지 어색한 공기에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제 그렇게 메시지 남기는 거 안 해도 된다는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애초에 탈퇴를 염두에 두고 실장님과 말한 게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
그 와중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얼굴로 닿아오는 정우의 시선에 어느 정도 맺힌 생각들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하진은 그런 정우를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계속 봐?”
“보고 싶었거든요.”
“…….”
“정말 보고 싶었어요.”
“…….”
“본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보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요.”
낯선 말들이었다. 정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자꾸만 어색하게 닿아왔다. 저런 말들은 전부 제가 하던 말들이었다. 제가 했던 말들의 온도와 같은 말들을 정우의 목소리로 듣는 게 어색해 자꾸만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지냈어요?”
“그냥 엄마랑 시간 보냈어. 늦잠도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낮잠도 자고, 영화도 하루 종일 보고.”
“기분은 어땠어요?”
“좋았어.”
“다행이다…. 내가 괜히 그때 와서는… 형 기분 망친 것 같아서 걱정했어요.”
너는 어떻게 지냈냐고, 잘 지냈냐고 묻는 게 맞는데 물을 수가 없었다. 이미 정우가 남긴 메시지를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진은 따뜻한 머그를 쥔 채 맴도는 말들을 전부 삼켰다.
“…좀 달라진 것 같아.”
“아… 그래요?”
“전에는 네가 하는 말 들으면 다 변명처럼 들렸어. 지금 생각해 보니 잘못했다, 내가 너무했다, 미안하다,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어. 믿어지지가 않았거든. 이렇게 쉽게 잘못한 걸 알 거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또 너한테 그런 사과 받을 일도 아니었고.”
“…….”
“메시지도 그래서 첫날 처음으로 보낸 것만 듣고 그 뒤로 오는 건 안 들었어. 그냥 다 뻔한 말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솔직히 처음에 보낸 메시지는 듣고, 어? 좀 다른데… 싶었어. 거기에 넘어가고 싶지 않아서 안 들었어. 결국, 잘못했어, 미안해, 다시 기회를 줘… 이런 말일 것 같아서.”
머그를 쥔 손이 떨렸다. 이대로는 떨어뜨릴 것 같아 책상 위로 놓은 하진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오늘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게 뭔데 내가 피하지. 그래, 다 듣고 이딴 거 그만 보내라고 한마디 하자. 녹음기 같은 말 듣기 싫다고 말하자. 그리고 편해지자.”
“…….”
“솔직히 불편했어. 듣고 싶지 않은데, 날마다 쌓이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삭제해 버리지도 못하는 것도 싫고.”
“…….”
“그래서 들었는데.”
“…….”
“넌…….”
“…….”
“보고 싶다는 말밖에 안 하더라.”
침착하려 애쓰고, 가끔은 울먹임이 섞이기도 한 그 목소리는 늘 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보고 싶고, 보고 싶어서 그 마지막은 결국, 집 앞이라는 말에 잘 버티던 마음이 흔들려버렸다.
“그런데 그 보고 싶다는 말이 진짜 같은 거야.”
“…….”
“나도 네가 매일 보고 싶었거든. 보고 있을 때도 보고 싶고, 자려고 눈을 감아도 네가 보고 싶어서 본 적도 많았어. 내가 그걸 알아서 그런 건지… 네 말이 진짜 같더라고.”
“…….”
“그래서 나갔어.”
“…….”
“그렇게 말하는 널 나도 한 번은 보고 싶어서.”
넋이 나간 것처럼 뚫어져라 제 얼굴을 보는 정우를 본 하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하진의 고개가 기울어도 정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봐?”
“내 앞에서 말하는 형이 신기해요.”
“…….”
“다시는, 정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눈에 보이는 형이…….”
“…….”
“꼭 꿈 같아요.”
하진은 이런 말을 하는 정우가 더 신기했다. 정우가 이런 말을, 사랑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그 느낌을 말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상대가 앞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고, 두근대는 마음. 분명 앞에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어서 이게 꿈이 아닐까 되묻게 되는 마음들을 정우가 그대로 소리 내고 있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하진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 좀 더 마실래? 내가 가서 가져…….”
책상 위로 머그 하나가 더 놓였다. 그 소리와 함께 하진은 제 허리를 끌어안는 힘에 숨을 들이마셨다. 허리에 팔이 감기고, 침대에 앉은 정우의 얼굴이 하진의 배 위로 닿아왔다. 분명히 차가운데 순식간에 퍼지는 것은 온기였다.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