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17화 (117/122)

#117

정우는 하루에 한 번씩 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는 시간은 스케줄이 있어 매일 똑같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밤 열 시에서 자정 사이였다. 그냥 하진과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고단할 수도 있고, 아깝게 흘러갔을 수도 있고, 그저 편안하게 행복했을 수도 있는 하루의 끝에서 목소리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하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제가 하진이어도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정우는 하진을 아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서운하지도 않고, 받아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전화가 꺼져 있지 않고, 신호가 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우는 날마다 메시지를 남겼다. 하진이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서 남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혼잣말이 되어버려도 말하고 싶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조금은, 정말 조금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형은 오늘 뭐 하고 지냈어요? 나는 오늘 스케줄이 없어서 집에 있었어요. 형들은 다 나가고 없어서 뭘 할까 하다가 혼자 대청소했어요. 빨래도 다 찾아서 돌리고, 청소기도 돌리고, 창도 닦고, 아, 우리 방 침대 시트도 갈았어요. 이렇게 말로 하니까 별로 한 게 없어 보이는데 해가 져 있더라구요.”

하진의 빈 침대를 보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겨우 잠깐 잠이 들어도 하진이 사라지는 꿈을 꾸며 깨어났다. 그때마다 보이는 텅 빈 하진의 침대는 정우를 향해 등을 돌렸다.

“형 그거 알아요? 우리… 서로 알게 된 뒤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거 처음이라는 거.”

제대로 된 휴가가 없을 만큼 바쁘기도 했지만, 휴가에도 하루 이틀 집에 다녀오는 것을 빼면 늘 같이 있었다. 늘 같이. 이렇게 보름을 떨어져 있던 적이 없었다.

“이러다가 한 달 되면 어쩌지.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웃긴 건 시간이 빨리는 가는데… 엄청 무겁고 길어요. 보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는데 또 돌아보면 까마득해요. 형 못 본 만큼 또 지나면 한 달인데, 그때는 어떻게 될지 솔직히 좀 무서워요.”

까마득한 시간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 하진을 볼 수 있을까. 보름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두 달, 세 달, 그러다가 일 년, 이 년이 되는 건 아닐까 솔직히 두려웠다.

“…그래도 형이 오늘은 어제보다 덜 아팠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 할 자격 없지만, 진심이에요.”

정우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발밑으로 또다시 종일 쌓인 감정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이 방 안에 가득 찰 만큼 쌓여버렸다.

“오늘도 보고 싶어요.”

메시지의 끝일 뿐이지만, 하진과 관련된 ‘끝’은 늘 심장이 내려앉았다.

“잘 자요, 형.”

그 마침표를 끝으로 비로소 정우의 하루도 저물었다.

***

날마다 오는 음성메시지는 하진에게 작은 부담이었다. 들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매일 밤 오는 음성 메시지를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어 더 좋고, 위태롭지 않아 더 좋았다. 하진은 휴대폰을 늘 베개 밑에 엎어두고 종일 엄마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잘 먹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살이 안 찌지.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그런가 보다.”

“엄마, 나 집에 오기 전보다 살쪘어. 여기 배에 있던 희미한 근육이 이제 안 잡힌다니까.”

하진은 티셔츠를 아주 살짝 올려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살은커녕 납작하기만 한 배를 본 엄마가 안쓰러운 눈을 했다.

“에이, 엄마. 나 엄청 잘 먹잖아. 혹시 알아. 내일 아침에 갑자기 살쪄 있을지.”

“그랬으면 좋겠다.”

“더 잘 먹을게요. 그리고 나 스트레스 안 받아. 요즘 얼마나 편한데.”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앉아 차를 마시는 하진을 본 엄마가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정우랑은 화해했어?”

“화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싸우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싸웠다기보다는 좀 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번에 정우 왔을 때 보니까 정우도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 말만 하면 울라 그러는데 엄마 마음이 안 좋았어.”

정우가 편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은 생각하면서도 제가 나쁜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우가 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편하지 않다는 건 그만큼 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 편하다면, 관계를 개선할 마음이 없다는 거고, 더는 정말 그룹 활동도 같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정우는 더 불편해야 했다. 제가 편하지 않은 것처럼.

“엄마가 괜히 정우 얘기 꺼냈다, 그치. 미안해.”

“아니야. 뭐 어때. 엄마도 그동안 많이 궁금했을 텐데 당연한 거지. 아, 엄마 어제 저거 어떻게 됐어? 저번 주에 혼자 한국 가는 거라고 오해하고 끝났잖아.”

“응, 맞아. 어제 그래서 쟤가 공항에 갔어. 갔는데 진짜 혼자 있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나가지고…….”

하진은 괜히 엄마와 같이 본 드라마로 화제를 돌렸다. 하진의 질문에 금세 드라마에 빠진 엄마가 열심히 어제 본 내용을 하진에게 말해 주었다. 하진은 엄마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 이어 나오는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가 말해 준 내용들은 전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가볍게 그냥 지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정우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무슨 내용인지 결국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보고 방으로 들어온 하진이 단정히 정리된 침대를 한 번 바라보았다.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하진은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우리 정우’라는 글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

처음 한 번은 들었지만, 그 뒤로는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남겨진 일곱 개의 메시지도 듣지 않았다. 하진은 울리는 진동 속 정우의 이름을 보며 생각했다.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미안하다는 말? 잘못했다는 말? 생각해 보니 다 네가 잘못한 일이라는 말? 나를 좋아하는 거였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다시 너를 좋아하면 좋겠다는 그런 말을 하려고 매일 이렇게 전화하는 걸까.

“…….”

아주 길게 한참이나 울리던 진동이 멈추었다. 부재중 전화가 되어버린 ‘우리 정우’라는 이름을 바라보던 하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음성메시지 도착 문자를 바라보았다.

“…뭔데 도대체.”

말해 달라고, 나랑 얘기 좀 해 달라고 그럴 때는 잘만 입 다물고 있더니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데. 도대체 매일 무슨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건데? 하진은 불쑥 치솟는 화에 음성 메시지함으로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제가 피할 이유는 없었다. 다 듣고 다시는 이런 말들 보내지 말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여덟 개의 신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진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 들은 그 긴 음성메시지 같은 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안해, 잘못했어, 사과할게, 진심이야, 한 번만 만나 줘. 이런 말들이 다시 반복될 것만 같았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으니까.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 형, 오늘 날씨가 좋았어요. 스케줄이 있어서 나갔었는데, 코끝이 쨍하니 쌀쌀하면서도 날씨가 좋아서 형 생각이 났어요. 쌀쌀한 거랑 형 생각나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구요? 음, 사실 요즘 난 형 생각밖에 안 해요. 형이 싫어할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하는데도 그냥 형 생각이 나요. 형이 싫어하는 일 더는 하면 안 되는데, 나도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우가 꼭 앞에 앉아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코끝이 쨍하고, 맑았던 얼마 전의 하늘이 떠올랐다. 그날 밤 녹음된 목소리라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 오늘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아프지 않은 날이었기를 바랄게요, 형. 잘 자요.

다가오는 말들은 하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들이었다.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 형,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요? 오늘은 하루 종일 머리가 아팠어요. 약을 먹었는데도 지끈거려서 아무것도 제대로 못 했어요. 상담이 있는 날이었는데 잠을 못 자서 그러는 것 같다고, 자는 걸 신경 좀 써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나와서 지금까지 형 침대만 봤어요. 겨우 며칠 잠 좀 설쳤다고 이렇게 머리가 아픈데, 형은 어땠을까.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사라지고, 한참이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메시지는 그렇게 이어지는 한참의 침묵으로 끝이 났다.

“…….”

그다음 메시지도, 또 그다음 메시지도 전부 정우와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 오늘은 이랬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심장이 마구 떨려 눈을 보기도 힘들어졌던 그 다정한 목소리가 내내 흘러 들어왔다. 하진은 어제 온 일곱 번째 메시지를 들었다.

- 형 그거 알아요? 우리… 서로 알게 된 뒤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거 처음이라는 거.

서재에서 엄마와 있던 정우를 본 지 보름 정도 된 것 같았다. 정우의 말처럼 연습생이 되고, 그 연습실에서 사람들을 만난 후, 정우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게 처음이었다. 늘, 정말 늘 같이 있었다. 정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내내 정우만 보고, 정우만 떠올렸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오늘은 어제보다 덜 아팠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 할 자격 없지만, 진심이에요.

그토록 날카롭던 정우의 진심이 이렇게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 오늘도 보고 싶어요. 잘 자요, 형.

정우를 보고 싶지 않았고, 떨어져 있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정우가 저를 보면서 계속 사과해야 하는 이유를 떠올리고, 또 생각이 날 때마다 그것에 대해 사과하는 게 싫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이래서 미안하고, 저 일은 저래서 미안했다는 그 고해성사 같은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정우의 사과와 이제 알았다는 그 사랑의 고백은 하진에게 위로가 아니라 상처를 들쑤셔 더 큰 상처를 내는 폭력과도 같았다. 떨어지기로 결정한 것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더는 아프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우의 보고 싶다는 말과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말은 못다 한 사과를 마저 할 시간을 달라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애원하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싫었다. 사과를 받으면 받을수록 상처는 덧나고 아물던 자리는 다시 푹 파였다.

“…….”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르게 들렸다. 그 보고 싶다는 말이 사과하고 싶으니 한 번만 만나 달라는 말로 들리지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말버릇일 애정의 표현, 다정하고 애틋한 그리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정우의 보고 싶다는 말이 그렇게 닿아왔다.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하진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듣기 전 예민하게 찡그렸던 미간은 진작 풀렸고, 예상과는 다른 목소리와 메시지에 마음과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 오늘은 형 집 앞에 왔어요. 삼십 분만 앞에 있다가 갈게요. 그냥 오늘은 형이랑 가까이 있고 싶어서 왔어요. 형 없는 방이 무서워서 나왔는데……. 어디를 갈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형 있는 데로 가고 싶어서… 왔어요.

멍하니 내리깔렸던 시선이 들리고, 하진은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 보고 싶어요, 형. 멀리서라도 좋으니까 형 얼굴 한 번만 봤으면 좋겠어요. 잘 있어요?

메시지가 끝나고 하진은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음성메시지가 왔다는 문자에 찍힌 시간에서 23분이 지나 있었다. 하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7분 남았다. 아니, 이제 6분.

“…….”

5분이 남았을 때, 하진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갑자기 어디를 가냐고 묻는 엄마에게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마구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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