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
이 타이밍에 온 음성 메시지라면 정우가 보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진은 고민했다. 완전히 정리하려면 듣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정말 이대로 평생 정우와의 모든 관계를 끝낼 게 아니라면 들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음성 메시지함을 연결해 귀에 댔다.
몇 번 하라는 대로 숫자를 누르고 나니 녹음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목소리가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머뭇대는 것 같기도 하고,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한 침묵. 하진은 더욱더 숨죽여 그 침묵을 들으려 애썼다.
- 형.
침묵이 깨지는 순간 하진을 눈을 감았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많은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너무 익숙한, 잊으려고 해도 너무 익숙해서 도저히 떨칠 수가 없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모든 것이 다시 원점이었다.
- 형이 전화를 안 받는데 또 걸 자신은 없고, 그래도 이건 형이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남겨요. 안 들어도 사실 괜찮아요. 그래야 형 마음이 더 편하면, 안 들어도 돼요. 내가 편한 게 아니라 형이 편한 게 더 나한테 좋은 거라는 걸 알았거든요.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지하실이나 비상구 같은 곳에서 녹음을 하는 것처럼. 하진은 빈손을 들어 괜히 손톱을 꾹 깨물었다.
- 형이 없는 방에서 일주일을 지냈어요. 형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나중에는 미친놈처럼 혼잣말을 하는데 당연히 답은 없고……. 그때 알았어요. 형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형이 없으니까 당연히 대답이 없는 거라는 걸 알 수나 있지만, 나는 형 옆에 있는데도 대답을 안 한 적이 많았잖아요. 형이 나 보는 거 알고 일부러 시선 안 준 적도 많아요. 내가 그랬어요. 형 외롭게 만들었어요.
같이 있는데 혼자 있는 것보다 외로웠던 적이 많았다. 해서는 안 될 사랑을,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가졌으니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픈 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아팠고, 외로운 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 하루에 백 번도 넘게 전화하고 싶어요. 형이 보고 싶어서 만나 달라고, 한 번만 얼굴 보여 달라고,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조르고 싶어요. 매달릴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 벨 소리 하나가 형한테는 스트레스가 될 거고, 그게 무거워질 거고, 조금 가까워지려다가 형이 더 가라앉아버릴 것 같아서 할 수가 없더라구요.
목소리가 꼭 마음 안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불씨 같기도 하고, 다 타버린 재 같기도 했다. 외롭고 쓸쓸한 목소리. 마르고 긴 등이 떠오르고, 저를 가득 끌어안던 단단한 두 팔이 떠올랐다.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근사한 냄새. 정우에게서는 늘 두근거리는 좋은 향이 났다.
- 일주일 동안 생각을 더 해봤어요. 그동안은 말로 다 해댔잖아요. 생각도 안 하고 형한테 다 쏟아냈어요. 짜증도 말로 내고, 붙잡는 것도 말로 잡고, 사과도 말로만 급하게 하고… 사랑이라는 말도 급하고, 반성도 급했어요. 이런 나를 어떻게 믿겠어요. 형 말이 맞아요.
목소리가 조금 자라 있었다. 키가 자란 것처럼 목소리 안에 담긴 차정우라는 사람이 조금 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진은 고개를 더 뒤로 젖히고 정우의 목소리를 올려다보았다.
- 내가 가지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워서 재보다가 결국 내 것이 완전히 아니게 됐을 때… 느끼는 감정은 아닐까. 그래서 급히 사랑으로 포장한 건 아닐까. 형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계속 생각했어요. 없느니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난 그런 마음 가질 수 있을 만큼 경솔하고, 생각이 어리잖아요.
둥둥 떠다니는 목소리. 하진은 그만 듣고 싶었다. 정우가 한 생각의 결과를 듣기 두렵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역시 형 말이 맞았다고, 그냥 그런 거였다고 이제 다 끝났으니 깔끔하게 일적으로만 지내자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심장이 조여들었다. 끝난 관계라고 해도 굳이 사서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진은 귀에 댄 휴대폰을 조금 떨어뜨렸다.
- 그렇게 막 생각을 하는데 그냥 갑자기 형이랑 하고 싶은 게 떠올랐어요. 내가 형이랑 제일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형 들으면 놀랄걸요.
조금 떨어뜨렸던 휴대폰을 다시 귀 가까이로 댄 하진이 엄지손톱을 꾹 깨물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섹스 같은 말이 떠다녔다. 정우가 저와 그런 관계라도 유지해 줬던 이유는 섹스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떠올리면서도 그것을 떠올리는 자신이 비참했다.
- 자기 전에 형이랑 얘기하는 거요.
하진은 제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정우의 목소리에 내리깔았던 눈을 조금 크게 떴다.
- 우리 자기 전에 아무리 피곤해도 꼭 얘기했잖아요. 피곤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 손 뻗어서 서로 손 잡고… 흔들고, 잘 자라고 하고 우리 그렇게 인사했잖아요.
목이 뻐근해질 때쯤 정우가 내려왔다. 젖혀 있던 고개가 원래대로 천천히 내려왔다.
- 우리가 같이 있던 방에 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밴을 타도 내 옆에 형이 있으면 좋겠고, 그냥 형이랑 같이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결국 시선이 마주했다. 하진이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보지 않았는데도 눈이 마주쳤다. 하진은 정우가 저를 보기 위해 무릎을 굽혀 내려온 것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꼭 그랬다. 아주 오랜만에 하나도 아프지 않고, 편안히 시선을 맞춘 그런 기분이었다.
- 일주일은 좀 짧죠. 앞으로 더 생각할게요. 매일 생각하고, 하루에 한 번만 형한테 전화할게요. 형이 받고 싶지 않으면 안 받아도 돼요.
손톱을 깨물던 하진이 손을 내렸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가만히 닫혔다.
- 형. 하진이 형.
또다시 조금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하진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목소리를 기다렸다.
- 보고 싶어요.
그대로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하진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들으면 안 될 말들을 들어버린 기분이기도 하고, 듣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것 같은 말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참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
너도 그럴까. 이게 맞는 건지, 저게 맞는 건지 매일 고민하며 지낼까. 그 고민의 끝이 보고 싶다는 그 마지막 말이라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하진은 몇 번이고 긴 숨을 내쉬었다. 음성을 듣는 몇 분 동안 한 번도 크게 쉬지 못한 숨이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요.」
여전히 새카맣지만, 조금은 달라진 것 같은 그 어두운 밤을.
***
괴로워도 시간은 가고, 생각이 너무 많아 그냥 다 멈춰버리기를 원해도 시간은 흘렀다. 하진은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눈을 감으면 너무 많은 생각의 소리가 하진을 두드렸고, 결국,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느리지만, 분명 시간이 흘렀다. 확인할 때마다 겨우 오 분, 십 분이 지나 있을 뿐이지만 분명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한 오 년쯤 지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은 휴대폰 화면을 내내 바라보았다. 유난히 일 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더 괴로운 것은 자꾸만 언제고 들을 수 있는 정우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듣고 싶었다. 어쩐지 진심처럼 들리던 그 목소리를. 그런데 쉽게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것은 다시 들었을 때, 그 진심이라고 느낀 마음이 깨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었다.
하진은 괜히 몸을 뒤척여 반대로 누워 휴대폰 갤러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의미 없이 스크롤을 내려 저장된 여러 사진들을 눈에 담았다.
“…….”
스크롤을 내리던 하진은 어느 한 곳에 손을 대어 멈췄다. 같은 사진이 여러 장 연달아 저장된 게 보였다. 정우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하진은 이 사진을 찍을 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상 화보집을 낼 거니까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서 제출하라는 말이 있었다. 정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정우가 별것 아니라는 듯 얼굴을 대고 셀카를 찍어 주었었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 뺨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점점 뜨거워졌었다. 잘 나왔다고 다정하게 웃던 얼굴. 정우가 보내줘서 그 사진을 몇 장이나 저장했었다. ‘우리 정우’에게서 온 사진. 그냥 이런 사진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일인 것 같았었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었다.
“…….”
하진은 제 얼굴 옆에 있는 정우의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까 들린 그 목소리는 지금 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얼굴과 아주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우리 정우, 우리 정우.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 정우라고 내내 부르던 그때로.
「보고 싶어요.」
머릿속에는 정우의 마지막 말이 내내 떠 있었다. 다른 것은 다 진심이 아니어도, 마지막 그 보고 싶다는 말은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아까는 그렇게 느꼈었다.
하진은 그때의 느낌이 달라질까 두려워하면서도 화면 속 정우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음성사서함으로 전화를 걸었다. 녹음된 음성은 단 한 건. 더 이상 부서질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하진은 버튼을 눌렀다. 다시 들려오는 ‘형.’이라는 말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 우리가 같이 있던 방에 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밴을 타도 내 옆에 형이 있으면 좋겠고, 그냥 형이랑 같이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하진이 늘 정우에게 바라던 것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냥 같은 방에 있는 것, 눈을 마주 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밴을 타면 항상 옆자리에 정우가 있고, 고개를 돌리면 그냥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웃을 수 있는 그 모든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 정우를 사랑하고, 정우에게 들켜버린 뒤로 잃은 평범한 것들.
- 형. 하진이 형.
비웃지 않는 목소리. 너무 가라앉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은 그런 목소리. 하진은 제가 아는 정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말에 눈을 감았다. 이 새벽만큼은 그 목소리를 믿고 싶었다. 아침이 되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새벽만큼은 진심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하진은 처음부터 들려오는 정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토록 느리게 흐르던 새벽의 시간 속 몸에서 힘을 빼냈다. 새벽의 믿음은 생각보다 편안하고, 고단함을 뒤덮었다.
그렇게 하진은 정우의 목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