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하진이 없음에도 스케줄은 몰아쳤다. 팀이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니저는 계속해서 스케줄을 물어왔다. 둘이나 셋이 나가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개인 스케줄이라 멤버들이 모두 바빴다. 정우는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단 하나도 없었지만, 팀과 하진에게 피해를 더 줄 수는 없어 아무 소리 없이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진이 숙소를 비운 지 겨우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7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우는 멤버들이 바쁘게 드나드는 숙소 안에서 내내 텅 비어 있는 하진의 침대를 볼 때마다 버티기가 힘들었다.
“숙소에 있었네?”
“녹화 이제 끝난 거예요?”
“어, 7시간이나 해서 죽겠다. 넌 이제 나가는 거야?”
“…네. 내레이션 녹음 있어요.”
“누군지 몰라도 잘 골랐네. 차정우 목소리 좋은 거 온 세상이 알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말하는 해성을 보고 입술을 올려 작게 웃은 정우가 현관으로 나갔다. 요즘은 멤버들이 다 모여 있는 것도 보기가 힘들었다. 정우는 현관으로 배웅을 나온 해성을 바라보았다.
“형 계속 있을 거예요?”
“밤에 라디오 생방 있어. 몇 시간은 있을 건데 왜?”
“하진이 형 올지도 모르잖아요. 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다시 갈지도 몰라서요.”
하진의 이름을 소리 내는 것조차 너무 무겁고 어려웠다. 이런 말을 하는 저를 해성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 하진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나 나가기 전에 아마 영우 올 거야. 그때면 너도 올 거고. 숙소에 한 명씩은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진이 오면 내가 못 가게 할게.”
“…네. 저도 빨리하고 올게요. 고마워요, 형.”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나도 하진이 필요하거든? 내 새끼 밥 먹여야 하는데 없어서 내가 손이 근질근질해.”
걱정하지 말라며 정우의 등을 탁탁 경쾌하게 두드린 해성이 손까지 크게 흔들며 인사했다. 그런 해성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 정우가 숙소를 나섰다. 저렇게 하진을 아끼고 챙겨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가 하진을 강제로 떼어낸 것 같아서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전화하려고 했는데 내려왔네, 타. 가자.”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휴대폰을 들고 있던 훈이 정우를 맞았다. 정우는 밴에 올라 뒤로 등을 기대었다.
“…….”
시간이 나면 자꾸 하진에게 연락하고 싶어졌다. 제 연락이, 제가 쓴 문장이, 단어 하나가 하진을 괴롭게 만들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뭐라도 자꾸 말을 하고 싶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정말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진과 있는 톡 방에 들어가 말을 쓰다가도 전송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한 일이었다. 하진이 보고 싶어서, 하진의 마음을 풀고 싶어서, 하진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아마 하진은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저를 보지 않아 조금은 편할 거고, 마음을 풀 여유와 안도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제가 있는 한 이곳으로는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제가 보고 싶다고, 하진이 쓴 글자 하나라도 보고 싶다고 자꾸 뭔가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우는 오늘도 길게 문장들을 쓰다가 결국 전부 지워버렸다.
스케줄이 계속 이어지고, 이런 기분으로 계속 일을 하는 게 싫었다. 단순히 일을 하는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멀쩡한 얼굴로 웃는 게 싫었다. 또 그렇게 웃을 때마다 그동안 하진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스케줄을 하는 동안 웃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많이 참아낸 걸까. 저는 이런 순간에도 어린애처럼 굴고 있었다. 아니, 어린애들도 이렇게 무책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목소리 너무 좋으신데요?”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좋은 경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녹음실 안에 같이 있던 전문가와 인사를 나눈 정우가 내내 힘쓴 스태프들과도 전부 인사를 나눈 뒤, 녹음실을 빠져나왔다. 차 대기 중이라고 훈이 보내 둔 메시지를 확인한 정우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다가 옆에 있는 비상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엄습한 고요 속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힘들어야 하고, 아파야 했다. 웃으면 안 되고, 하진이 받은 그 고통 이상으로 괴로워야 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웃음을 연기하고 버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대로 하진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하진의 번호를 누른 정우가 통화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화면에 손을 대었다. 그 잠깐의 닿음으로도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정우는 연결음이 울리는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가 댔다.
“…….”
하진의 집에 다녀온 뒤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거는 전화였다. 받아준다면 정말 너무 좋겠지만, 받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연결음은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하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우는 음성메시지로 넘어간다는 안내음을 들으며 휴대폰을 귀에서 떼었다가 다시 귀에 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버튼을 눌렀다. 들어줄지 들어주지 않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오늘 이 순간의 마음은 하진에게 꼭 말하고 싶었다.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저의 이 말들이 하진에게 또 다른 상처나 무거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형.”
정우의 시선이 어두운 발끝으로 뚝 떨어졌다. 작은 목소리가 텅 빈 계단들을 타고 이리저리 울렸다.
***
하진은 사흘 동안 잠만 잤다. 죽은 게 아닌지 부모님이 한 번씩 들어와 확인을 할 만큼 잠만 잤다. 자더라도 먹고 자라고 엄마가 깨우면, 나가서 정말 간단히 밥 몇 숟가락을 먹고 또 잤다. 사흘 아홉 끼 중에 겨우 두 끼 정도 먹었을 뿐인데도 전혀 배고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잔다고 해서 모든 게 편한 것은 아니었다. 잘 때는 불안한 꿈에 시달리고, 깼을 때는 암막 커튼이 쳐진 방 안 어둠과 내내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소리가 없고, 빛이 없는 방은 낯선 생각들을 불러왔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하진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끊으려고 해도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 하진은 자리를 완전히 털고 일어났다. 씻고도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 또 누워 내내 잠만 잤던 며칠과는 달리 깨끗하게 씻고 방을 청소했다. 필요 없는 책들도 버리려고 묶어두고, 침대 시트도 갈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 엄마가 가져다준 예쁜 화분도 책상 위에 놓았다.
그냥 기분이 가벼웠다. 다시 원래의 강하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동안은 강하진이라는 이름에 늘 무거운 것이 달려 있었다. 가지면 안 될 감정을 가진 강하진, 결국, 사랑받을 수 없는 강하진, 사람을 질리게 하는 강하진. 그리고 저의 이름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턴가 하진에게 가장 중요한 이름은 강하진이 아니라 차정우였다.
“잘 먹으니까 엄마 너무 기분 좋아. 내일은 뭐 해 먹을까?”
“음, 해물찜 먹을까? 그거 우리 가족 다 좋아하잖아.”
“해물찜 너무 좋지. 내일 가서 새우랑 낙지랑 오징어, 게, 또 뭐 들어가지. 아, 조개랑 또… 가서 보고 싱싱한 건 다 사 와야겠다.”
“내일 같이 가요.”
“괜찮겠어?”
“그럼, 괜찮지.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니고, 쉬는 건데 뭐.”
“같이 가면 엄마야 너무 좋지. 우리 아들이랑 간만에 장 보러 가고. 점심은 나가서 먹을까?”
“응. 좋아. 맛있는 거 먹어요.”
엄마가 걱정하는 것도 싫고, 또 이런 것들 때문에 엄마가 제 눈치를 보는 것도 싫어서 하진은 무엇이든 아주 열심히 맛있게 먹었다. 솔직히 아주 잘 먹히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맛있게 즐기고 행복해질 만큼 괜찮아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 생각도 없이 죽은 듯 있고 싶던 지난 며칠과는 분명 달랐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집 안에만 있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 그 생각으로부터 더 많은 억압된 것들이 터져 나왔다. 하진은 결국, 생각하지 않기를 멈추고 어디까지 하나 자신을 놓아버렸다. 엄마를 보며 웃고 있을 때도, 향이 좋은 커피를 내려 방에 들어온 지금도 뭘 떠올리는지 모를 생각은 여전히 머릿속을 아프게 찌르고 다녔다.
이대로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그냥 이대로 평생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뜨겁던 커피가 마시기 좋을 만큼 따뜻하게 식었다. 하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미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
책상 위에 내내 두었던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드르륵 소리를 내는 것에 놀라 화면을 바라본 하진은 ‘우리 정우’라는 이름에 울상을 지었다. 직접 볼 때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도 있고, 바보같이 굴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우리 정우’라는 네 글자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가장 좋은 친구였고,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고 그걸 넘어 존경스러울 정도로 열정적이고 잘하는 연습생 선배이자 우상이기도 했다. 이름을 부르기 어색하던 사이에서 ‘우리 정우’가 될 때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일은 돌아보면 전부 좋기만 한 기억뿐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 정우’가 된 뒤에는 전부 다 행복하지 못했던 걸까. 뒤틀리기 시작한 건 역시 저의 감정 때문이었다. 사랑은 죄가 아니지만, 차정우를 사랑한 건 죄였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냥 지금은 가끔 미칠 것처럼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후회를 또 후회하며 가슴을 눌렀다. 이미 번진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정우는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한편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기해 주기를 바라면서, 정말 포기한 걸까 조금은 불안한 마음. 하진은 저의 이중적인 생각에 질리고 또 질렸다.
“…….”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일주일의 공백을 깨고 울리는 이유가 뭘까. 하진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우리 정우’는 더는 울릴 수 없을 때까지 울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울리지 않았다.
받지 않기를 잘했다, 라는 마음과 받았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진은 휴대폰을 엎어둔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짐짓 무심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전화가 울리기 전처럼 그냥 가만히 어두운 창밖에 무의미하게 시선을 두었다.
그때, 짧게 드르륵, 한 번 진동이 울렸다. 하진은 잠자코 휴대폰을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