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숙소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다른 멤버들이야 하진이가 잠시 쉬고 돌아올 거라고 알고 있기에 심각할 일이 없었고, 정우는 그 심각하지 않는 모습들도 신경이 쓰여 견디기가 어려웠다.
마주보기 편안할 때나, 불편할 때나 늘 방에 있던 하진이 없다는 것, 그 자체로도 정우는 마음의 조각들이 흩날리는 것을 느꼈다. 빈 침대, 완전히 식어버린 온기, 이 방 안 그 어디에도 없는 하진의 목소리.
「나 도망친 거야.」
너무나도 지친 목소리는 하진에게 매달리는 것도 미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하진을 명백하게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뒷모습과 목소리에 정우는 지금도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닫힌 문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좋아서 저렇게 웃는 걸까. 도대체 뭐가 기뻐서?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하진이 숙소에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끝없이 몰아치는 부정적인 생각에 정우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하진의 집에서 숙소로 돌아온 이후 정우는 내내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연습실에서 돌아온 멤버들은 정우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서 해가 저물고, 빛이 머물던 자리에 어둠이 내리깔리는 것을 내내 본 정우는 온통 어두워진 방 안에서 눈에 잘 담기지도 않는 하진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제 침대가 흐트러지는 게 싫어서, 하진과 섹스할 때도 대부분 하진의 침대에서 했었다. 흐트러진 하진과 침대. 그리고 엉망으로 풀려 전부 보이는 그 감정들을 전부 내려다보면서도 저는 최대한 흐트러지지 않게 옷매무새를 다듬었고, 감정을 지웠었다.
“…….”
하진의 감정이 다 사라져버리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때로는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저를 좋아한다고 매달리는 하진을 보며 우쭐해진 적도 있었다. 하진이 꼭 제 손 안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반짝거리던 사람이 제 말 한 마디로 웃고 우는 게 어쩌면 좋았는지도 몰랐다. 즐긴 건 아닐까.
저라도 저 같은 놈을 다시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보기만 해도 끔찍할 거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상대라도 해주는 건 하진이 착하기 때문이었다.
「하진이 너랑 못하겠다고 갔어.」
못하겠다는 말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말과도 같았다. 어쩌지. 정말 어쩌지. 정우는 다시 확 열이 오르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아까부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만 떠오르면, 나라는 생각은 나지 않고, 자꾸 눈물만 났다.
“…….”
하진은 혼자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제가 볼 때도 많이 울었는데, 보지 못할 때는 더 많이 울었을 것이었다. 눈물로 젖은 눈을 깜빡이자, 제 앞에서 울어버리던 하진이 떠올랐다.
「…난 너랑 이렇게 여기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아. 넌 아니라는 거 알아.」
같이 있기만 해도 좋다던 그 마음을, 너는 아니라는 거 안다고 스스로 상처를 먼저 내버리며 어떻게든 버티려던 그 마음을.
「형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짓밟던 저의 얼굴이 보였다.
「간단하게 생각해요. 나는 형이 원하는 걸 해주는 거예요. 형은 나랑 있기를 원했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엮이는 거 싫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안 그런다구요. 다른 사람 아니라 형이랑 다 해준다고.」
엄청난 것을 해주는 듯 굴었다. 저를 좋아하는 마음을 손에 쥐고 사람을 마구 흔들었다. 가지고 놀았다. 최소한 지켜야 할 것도 지키지 않았다. 하진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그랬었다. 정우는 저의 그 쓰레기 같은 말들을 해대는 얼굴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면 나는… 해줘서 고마워. 그 말만 하면 되는 거야?」
기대가 사라진 얼굴. 쥐고 있던 것이 쓰레기 같은 놈의 알량한 적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하진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참담해 보였다. 아파 보였다. 그때라도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울지 말고 웃어요, 형.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데 짜증 나게 왜 자꾸 울어.」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되뇌며 충격에 하얗게 질리던 그 얼굴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우는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고통스러워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몸이 바닥으로 기울고 무릎이 꺾였다. 두 무릎이 바닥으로 닿은 순간 고여있던 숨과 함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좋아하는 사람의 뒷모습만 보는 것도 이렇게 힘들고, 지난 저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 모든 말을 듣고, 본, 또 저의 그 행동을 받고, 견딘 하진의 마음은 도대체 어땠을까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
어떻게 버텼을까. 이 방에서, 그런 칼날을 내뱉은 제가 있는 그 방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어떻게 제 얼굴을 보며 그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 정우는 저를 보고 웃던 하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꽉 조이는 심장 위를 움켜쥐었다.
“…….”
내가,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어떻게 그걸 버틴 거지. 겨우 숨만 쉬고 버티던, 그래도 나 같은 것한테 웃어주던 형한테…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정우의 마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완전히 허물어졌다. 요란한 소리처럼 폐허가 된 곳은 몹시 거칠고, 위험했다. 정우는 먼지로 가득한 뿌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피투성이가 된 하진을 바라보았다.
“…….”
몇 번이나 무너진 걸까. 셀 수도 없을 것이었다. 고작 이런 무너짐 따위에 아프다고 징징대고 하진에게 받아달라고 애원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형, 그래도 나는 형이 보고 싶어. 이 방에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형 상처가 아물고, 다시는 다치지 않도록 하고 싶어.
“…….”
빈 하진의 침대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정우는 그렇게 한참이나 울고 또 울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점점 더 멀어만 지는 피투성이의 하진을 보며.
***
사흘 정도가 지나면서 언론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어떻게든 하진이 탈퇴하고, 4인조로 팀을 재정비한 거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만 같았다. 소속사 건물 앞에도 기자들이 모여 있고, 헤어샵 앞에도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례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냈다.
“강하진 씨 진짜 아픈 거 맞아요? 팬들도 탈퇴라고 걱정하던데 정말 아픈 거 맞아요? 아프면 정확하게 어디가 아픈 건지 말해 주실 수 있어요?”
듣지 않으려고 해도 멤버들 근처로 다가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카메라를 대는 통에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정우는 모자를 더 푹 눌러쓰며 걸음을 서둘렀다.
“정우 씨! 두 분 싸운 영상 올라온 뒤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잖아요? 저도 믿지는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우 씨가 하진 씨를 주도해서 따돌렸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더는 들을 수가 없어 멈춰 선 정우가 확 뒤돌았다. 모자챙 아래로 숨은 작은 얼굴 안에서도 살기 어렸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기자가 머쓱한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믿지 않으면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애써 억누른 말이었다. 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도저히 정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정우야, 가자. 참아, 참아.”
기자와 신경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버티고 선 정우를 본 지창이 정우의 어깨를 잡고 등을 두드려 겨우 돌려세웠다. 정우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샵 안으로 들어가 모자를 거칠게 벗었다.
“기자 미친 거 아니야?”
“아니, 내 말이. 말이면 다야? 야, 정우야 잘했어. 나 진짜 멱살 잡을 뻔했네.”
“하나만 걸려라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인 거 알고는 있지만,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하진이가 진짜 탈퇴라도 해야 된다는 거야, 뭐야?”
소파에 앉아 머리를 헝클인 정우가 들려오는 멤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말했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응?”
“하진이 형… 올 거예요.”
“그래, 당연하지. 쉬러 간 거잖아. 하여튼 뭐 일 하나 있다 하면 그거 부풀리고 누구 하나가 뒤집어야 아님 말고, 이러지.”
“…올 건데.”
“그래, 당연히 온다니…… 야, 정우야. 너 왜 그래?”
화가 나서 멤버들과 전투적으로 이야기하던 해성이 놀란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소파에 앉은 정우에게 다가갔다. 그런 해성의 목소리에 다른 멤버들도 정우를 바라보았다.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정우야, 너… 울어?”
“…와야 하는데…….”
“…정우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안 올 것 같아요. 나 때문에, 다 나 때문이야. 형, 어떡해요. 하진이 형 다시 안 오면 정말 이제 어떡해요.”
멤버들은 놀란 얼굴로 정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멍하니 우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습생 시절부터 쭉 봐온 사이지만, 정우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어깨가 마구 흔들리고,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질 정도로 우는 정우를 보는 그 자체로도 너무 놀라고 충격이라 멤버들은 다 같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정우를 바라만 보았다.
“하진이가 안 오기는 왜 안 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정우에게 다가간 사람은 인규였다. 인규가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우는 정우의 옆에 앉아 어깨를 감싸 안고 두드렸다.
“올 거야. 쉬러 간 거잖아. 너 때문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그 어떤 위로가 되지 않았다. 멤버들은 모르고, 저는 알고 있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너 때문이 아니라는 인규의 말에 다시 한번 무너졌다.
“…….”
아니, 형. 나 때문이에요. 전부 다 나 때문이 맞아요. 하진이 형이 잘 웃지 않게 됐던 것도, 잘 먹지 않고 그렇게 살이 빠졌던 것도, 잠을 자지 못해 괴로워한 것도, 약을 먹고 다시 깨어나지 못할 뻔한 것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숙소를 나가버린 것도 전부 다…….
“…나 때문이에요. 전부 다… 미안해요, 형. 잘못했어요…….”
평소 하진과 유난히 각별했던 사이인데 다툼이 있어 심하게 자책한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정우는 멤버들이 하나둘 옆으로 와서 아무 말도 없이 다독여주는 손길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제가 한 짓을 멤버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람으로 보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런 일을 하진은 혼자서 겪어냈다. 그래도 사랑을 소리 냈다. 그 마음이, 저를 볼 때마다 무너졌을 그 사랑이 이제야 다가왔다.
“…….”
강하진이라는 그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이 무너지고, 사랑이 조여드는 것을 겪은 뒤에야, 이렇게 한참이나 지나 너무 늦어버린 뒤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