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마음은 급한데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올라오는 것을 참지 못한 정우가 미친 듯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연습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인규와 해성, 그리고 영우가 놀라서 확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분명히 보이는 세 명의 사이에서 하진을 찾고 또 찾았다. 있는데 내가 못 보는 건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하진은 없었다.
“많이 혼났어?”
“아니요… 저 형. 하진이 형은요? 어디 갔어요?”
“하진이? 몰랐어? 하진이 집에 갔잖아.”
집에 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짐 싸서 갔다는 실장의 말이 겹쳐졌다. 정우는 확 뜨거워지는 눈동자를 감추며 눈을 깊게 감았다. 심장이 불안함에 너무 빨리 뛰어서 막 머릿속까지 쿵쿵 같이 울려댔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 형들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진이 형… 집에, 그러니까… 집으로 간 거예요? 형 부모님 계신?”
“그런 거 아닐까? 우리도 그건 모르지.”
“…저 좀 가볼게요.”
닫히는 문 뒤에서 어디를 가는 거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정우는 하얗게 질려 비상구 문을 열고 마구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박자 늦게 귓가를 치며 울리는 급한 발소리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모자도 쓰지 않고, 마스크도 하지 않은 채 소속사 건물을 나가자 앞에 있던 외국인 팬들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정우의 이름을 부르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정우는 그대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올랐다. 그리고 숙소로 향했다. 바보 같은 일이지만,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숙소로 가는 동안 초조함에 뒤로 기댈 수조차 없었다. 정우는 앞으로 몸을 숙인 채 조수석 헤드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고만 있었다. 차가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일렁이고, 식은땀이 났다. 너무 속이 아파 토할 것 같기도 하고, 몸을 더 아프게 만들고 싶기도 했다. 사고는 정지되었고 손끝은 차가웠다. 숙소에 도착해 카드를 꺼내 돈을 지불할 때에도 한 곳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
매일 들어가고 나오는 숙소 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조차 힘들었다. 정말 눈으로 보면, 정말 봐 버리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정우는 몇 번이나 숫자를 누르다가 멈추고, 또 누르다가 멈추는 것을 반복했다.
“…….”
하지만 이대로 제가 머뭇대면 하진이 더 멀리 가 버릴 것만 같았다. 빨리, 조금이라도 빨리 상황과 마주하고 파악해야 했다. 정신을 차려야 어떻게든 하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정우는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숫자를 정확하게 누르려 애썼다. 그리고 잠금이 해제된 문 안으로 들어가 고요한 숙소 안을 눈으로 훑었다.
“…….”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말 하진의 온기는 없었다. 정우는 현관에 멈춰 선 채 바로 앞에 보이는 저와 하진의 방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늘 저곳에 있었다. 제가 들어오면 나와 웃으며 반겨주고, 문을 닫으면 다가와 안겨 왔다. 저 닫힌 문 안에서 참 많이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같아 보이는 닿음의 의미가 참 달랐다. 하진에게는 사랑이었지만, 저에게는 입막음용이고, 단순한 쾌락이었다. 그렇게 비참했을 저 방에서도 하진은 저를 보고 웃었고, 먼저 다가왔고, 닿아왔다. 하진은 그랬다.
“…….”
그런데 이제 하진이 없었다. 방에 있지 않으려 하고, 뒤돌아 나가고, 고개를 돌리면 어느 순간부터는 등만 보이던 하진이 이제 아예 저 방 안에 없었다. 정우는 빈손을 꽉 쥐었다. 정말 손이 텅 비어 있었다. 더 이상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도 남지 않았다. 하진이… 가 버렸다.
“…안 되는데…….”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겨우 그 입술만 간질일 정도의 연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우는 겨우 안으로 들어가 열린 방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
하진의 침대 위에는 큰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옷과 다른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다 챙겨서 가려다가 전부 놓고 간 모양이었다. 짐이 여기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한 모든 기억이 묻은 것들을 놓고 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방에 있던 그 어떤 물건도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아 챙기다가 결국 그냥 가 버렸을 하진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것 같아? 네 감정은 그런 거야. 약하고 약하지. 흔들리고, 쉽게 변해.」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흔들렸다. 약하고 약한 마음. 쉽게 흔들리고 변해버리는 그런 마음. 하진은 더 이상 저를 믿지 않았다. 제 말도, 마음도, 무엇도.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 너는 한 시간 뒤에 또 변할 거고, 흔들릴 거고, 약해질 거고,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날 텐데.」
바로 이 방에서 하진이 말했었다. 너는 변할 거라고, 흔들릴 거라고, 약해지고 결국은 물러날 거라고. 정우는 하진이 딛고 섰던 그 자리에 두 발을 둔 채 덩그러니 놓인 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나는 이제 물러날 곳이 없어요. 형이 없잖아. 나는 이제 형을 찾으러 나아갈 수밖에 없어.
「그럼 또 나만 혼자 널 사랑할 텐데.」
같이 있으면서도 하진은 내내 혼자였을 것이었다. 이 방에서 하진을 수도 없이 외면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자 날카로운 것이 심장을 확 찌르고 들어왔다. 정우는 벌어진 하진의 가방을 쥐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만 하는데도 숨이 가빴다. 정우는 어느 한 곳에도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보다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하진의 번호를 눌렀다. 몇 자리를 누르자 밑에 하진의 이름이 떴지만 그것을 누를 정신도 없어 결국 끝까지 숫자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제발…….”
제발, 제발 하진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랐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진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듣고 싶었다. 들어야만 했다.
“…받아요, 형. 제발 좀 받아.”
불안한 마음이 끝없이 입술을 물들이며 주변을 맴돌았다. 연결음이 한 번, 두 번,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흘렀지만, 결국 하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심히도 흘러나오는 녹음된 안내 멘트에 정우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하진의 목소리는 내내 들을 수 없었다. 정우는 휴대폰을 든 손을 떨구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휴대폰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생각대로 안 되니까 속상해?」
보고 싶었다. 보고 싶고,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목소리는 전부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겨우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아픈 목소리뿐이었다.
「말하면 될 줄 알았지? 고심하고 고심해서 솔직하게 용기도 내고, 뺏기기 싫고, 놓치기 싫고, 다른 사람이랑 다니는 것도 싫다고 말하면 다 풀어질 줄 알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당황스러운 거잖아, 지금.」
하진의 말이 다 맞는지도 몰랐다. 저는 그 순간에도 자만했다. 화가 났어도 어느 정도는 풀리지 않을까.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래도 조금씩 풀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말하다 보면, 나도 형을 좋아한다고, 사실은 사랑하고 있었던 건데 몰랐다고 말을 하면 그래도 조금은 기뻐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기적이고 이기적이었다. 하진을 위한다고 했으면서 결국 떠올려 보면 결국, 다 저를 위한 말이었다. 말하고 싶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이제야 알았다고 알리고 싶어서.
「너는 네가 불쌍하지.」
어쩌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내가 불쌍해. 너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한 대 치지도 못하는 내가 불쌍해.」
차라리 몇 대 속 시원하게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결국, 그것으로 이 일을 가볍게 만들려는 이유였다. 정우는 아플 만큼 뜨거워진 눈을 꽉 감았다. 뜨거움이 눈물인 것은 두 뺨이 젖은 뒤에야 알았다.
「정우야.」
지친 목소리.
「이제 그만하자.」
그게 끝일 줄은 몰랐다. 잔뜩 지친 얼굴로 애원처럼 말하던 그 얼굴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정우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다시 주워들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몇 번을 걸어도, 하진은 받지 않았다.
안내 멘트가 몇 번이나 나올 때마다 정우는 넘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쏟아냈다.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가 확 넘쳐 쏟아질 때면 어깨가 떨리고 온 감정이 조각났다.
“……형….”
또다시 죽는 건 아닐까. 이 방에 축 늘어졌던 하진이 떠오른 순간 정우는 젖은 눈을 떴다. 그리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제가 이기적으로 굴어서, 그만하라고 해도 그만하지 않아서, 하지 말라는데 자꾸 하고, 다가오지 말라는데 또 다가가서 아예 그럴 기회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건지도 몰랐다.
“…….”
정신이 없었다. 정우는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연습생 시절에 하진의 집에 같이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이사 갔다는 말은 못 들었으니 아마 아직도 거기 살고 계실 거고, 하진이 집에 갔다면 거기 갔을 것이었다.
얼굴을 봐야 했다. 하진이 살아 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정우는 택시에 올라 등도 기대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감정들이 와르르 발밑으로 쏟아졌다.
“…….”
아는 사람들이 진짜냐고,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문자와 톡을 해오는 것에 정우는 포털 사이트를 확인했다. 실시간 검색어에 강하진 탈퇴, 강하진 건강 이상, 아포제 같은 말들이 떠 있었다. 정우는 가장 위에 뜬 단독이 붙은 기사를 눌렀다.
[단독] 아포제 또다시 멤버 간의 불화, 탈퇴설 잡음. 소속사 ‘단순 건강 문제, 왜곡 보도 자제 부탁’
인기 아이돌 그룹 ‘아포제’에 또다시 멤버 불화설이 터졌다. 소속사인 한영엔터테인먼트에서 아포제 멤버 강하진의 활동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가요계 관계자는 ‘보통 탈퇴 전, 그것을 숨기기 위해 건강 문제로 활동을 중단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며, ‘진실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비관했다.
이에 팬들은 ‘헛소리 말아라.’, ‘아포제는 영원하다.’, ‘5포제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며 변치 않는 응원을 하고 있다. 이에 한영엔터테인먼트는 ‘휴식기도 없이 연습생 시절부터 쭉 달려온 하진의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치료에 전념하고, 쉬는 것뿐.’이라며 ‘왜곡된 보도를 자제하고, 하진이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응원을 부탁한다.’며 제기된 탈퇴설을 일축했다.
정우는 기사를 눈으로 훑어내렸다. 정말 하진이 아파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 이름도 모를 가요계 관계자라는 사람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전이라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다고 어이없어했을 텐데 지금은 타인의 말 한마디에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
진동이 계속 울렸다. 그중에는 정문혁도 있었다. 하진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말이었다. 정우는 정문혁의 이름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알림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 많은 울림 속에 가장 보고 싶은 이름이 없었다. 정우는 애가 타 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 또 그때처럼 모든 걸 끝내려고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손끝이 차갑게 식고,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