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하진은 텅 빈 숙소를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우가 실장님을 만나러 간댔으니 아마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사이에, 돌아오기 전에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하진은 큰 가방을 꺼내 옷을 넣다가 짐 챙기는 것을 완전히 관두었다. 집에도 제가 입을 옷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뒤에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집을 나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사무실에서 집으로 갔을 텐데 괜히 숙소에 들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앞으로 택시를 불러 바로 탄 하진이 시트 뒤로 몸을 기대었다. 거의 눈만 내놓았던 마스크를 코 아래로 내리자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매끄러운 눈동자가 한참이나 여러 생각을 머금은 듯 여러 빛을 띠었다.
솔직히 이게 맞는 건지 자꾸 마음이 움직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충전의 시간을 가지자 하다가도, 어떻게 해야 충전할 수 있는지 고민이 되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정우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 뭐가 달라질까. 그리고 멤버들 얼굴은 어떻게 보면 좋을까. 무엇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날카롭게 심장 안으로 파고들어 크기를 키워 가던 저의 그 단순한 사랑의 끝이 이런 복잡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때 어떻게든 막으려 더 애를 썼을 것이었다.
“…….”
그랬으면 막을 수 있었을까. 그만둘 수 있었을까. 최악의 순간에도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답은 한숨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진은 자조했다.
부모님이 사시는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출을 하신 모양이었다. 하진은 안으로 들어가 어쩐지 이제 숙소보다 덜 익숙하게 느껴지는 방으로 들어갔다. 저의 물건들이 전부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조금 마음이 아팠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원래 여기인데 멋대로 이탈한 것만 같아 헤집힌 마음이 자꾸만 흔들렸다.
“…….”
정우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도 다른 멤버들에게는 말을 해야 했다. 이렇게 무조건 숙소를 나와 버리고, 매니저 형을 통해 듣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진은 침대에 앉아 가장 먼저 인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린 뒤, 인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아! 부르는 여전히 다정하고 반가운 그 목소리에 미안함이 울컥 차올랐다.
“형, 연습실이세요?”
- 응. 애들이랑 다 같이 있어. 아, 정우는 지금 실장님 호출 때문에 갔고. 하진이 네 얘기는 대충 들었어.
“죄송해요, 형.”
- 아니야. 나도 그렇고 해성이, 영우 다 그렇게 생각해. 앞으로 우리 더 오래 할 거잖아. 두세 달 쉰다고 그거 달라지는 거 아니고, 나중에 몇 년 더 하면 되지. 당장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보자. 사고 쳐서 강제로 활동 막힌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런 생각 말고 푹 쉬어.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저 정말 형들이랑 잘하고 싶어요. 정우랑도… 다시 잘 지낼 거예요. 그럴 거예요.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형.”
- 우리가 널 이해 안 하면 누가, 아, 깜짝이야! 하진아, 해성이가 바꿔 달래. 아, 놀랐잖아. 갑자기 들이대서.
왜요, 왜 놀랐는데요. 설렌 거 아니에요, 형? 장난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해성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 하진아, 푹 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살도 좀 쪄서 와. 알았지?
“살찌면 운동 몇 배로 해야 하는데, 같이 해 줄 거예요?”
- 아, 그건 좀.
웃음소리가 울리고 그 웃음에 하진도 따라 웃었다. 곧 옆에서 끼어든 영우의 목소리도 연습실을 왕왕 울리며 전해졌다. 하나같이 전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뿐이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하진은 괜히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
귓가에 가득 찼던 밝은 목소리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밀려드는 정적에 하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고 말도 안 하고 와서 있다가 부모님이 들어오시면 무척 놀라실 것이었다. 하진은 부모님에게도 집에 와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에 하진은 울렁이는 마음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 하진아, 엄마야. 무슨 일 있어?
겨우 누르고 있던 마음은 엄마의 걱정이 담긴 그 짧은 말에 무너졌다.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내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울었다. 그냥 울고 싶었다. 멈출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하진은 아무것도 억누르지 않고 한참을 울었다. 더 이상 마음에 쏟아낼 물이 고이지 않을 때까지.
***
정우는 앞에 커피를 놓아주는 실장을 보며 묵례했다. 마시라는 말과 함께 잔을 들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떨리고 초조해 커피 한 모금도 마실 수가 없어 그냥 다시 내려놓았다.
“떨려? 왜 그렇게 불안하게 있어.”
“…형이랑 같이 부르실 줄 알았어요.”
“아, 따로 불러서. 근데 정우야. 너 그거 알아? 너희는 꼭 부르면 서로 얘기를 하더라.”
“…….”
“꼭 한 번씩은 해. 그리고 웃긴 게 강하진한테 일어나는 일의 이유는 너고, 너한테 일어나는 일의 이유는 강하진이야. 이번에도 그렇잖아.”
실장의 말이 맞았다. 남들이 보기에 유난스럽다고 느낄 만큼 각별했고 애틋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고, 더 둘만 느낄 수 있는 그 감정들이 소중했었다.
“데뷔 조 뽑혔다고 말해 줄 때도 자기 된 것보다 더 궁금하단 듯이 하진이 형은요? 정우는요? 물어보고, 그랬던 녀석들이 왜 이래? 너 하진이한테 뭘 잘못한 거야? 하진이 걔가 어지간해서 안 그럴 애잖아. 속 좁은 애도 아니고, 억지 부리는 애도 아니고.”
“…….”
“그리고 너도 안 그러잖아. 쿨하고, 솔직하고, 군더더기 없는 성격이잖아. 연습생 때도 그래서 애들이 다 너 우러러보면서 연습했잖아. 성격까지 A등급이라고.”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정우는 제가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 마음을 짓밟고, 이용할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더 무서운 것은 짓밟는 동안에는 그 행동에 대한 죄책감도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저도 제가 솔직하고, 뒤끝도 없고… 꽤 괜찮은 성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전 이기적이고, 남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 마음쯤이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형이 그걸 알아버렸고, 저한테 실망했어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실장의 시선을 바라보던 정우가 마른 입술 안쪽 여린 살을 몇 번이고 깨물었다. 혼나고 싶었다. 욕을 먹고, 몇 대 정신 차리라고 맞아도 지금은 좋을 것만 같았다.
“그래. 하진이가 실망하긴 한 모양이더라.”
“…….”
“너랑 더는 못 하겠대.”
“…네?”
정우는 실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제대로 들었는데, 더는 못 하겠다는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해석이 되는 그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뭘 얼마나 실망하게 했으면 너랑 못 하겠다고 그래. 하진이 너랑 못 하겠다고 갔어. 나도 골치 아프다.”
“…못 하겠다는 말이…….”
“말 그대로지 뭐야. 짐 싸서 갔다고.”
“형이, 하진이 형이 탈퇴를 한다는 말씀이세요?”
“못 하겠다는 애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구슬린다고 마음 돌릴 수도 없고, 나도 진짜 머리 아파 죽겠다. 야, 정우야. 너 어떻게 생각해? 이제 2년도 안 된 그룹, 그것도 2년 만에 최정상 올라서 난리 난 그룹에서 메인보컬, 그것도 너랑 투톱 센터인 애가 빠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생각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룹은 당연히 끝날 수밖에 없었다. 새 멤버를 넣는다고 해도 팬들의 반발이 심할 거고, 실망한 팬들의 대부분은 떠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가끔 기존 멤버가 빠지고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어색하지 않게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하진은 아포제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멤버였다. 모두가 다정하고 예쁜 하진을 좋아했다.
아니, 그건 지금 제일 우선으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진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했어야 하는 걸까. 멤버로 돌아가자고 할 때 더는 마음을 말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했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마음을 말한 것만으로도 하진에게 짐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형이 정말 나간다고 했어요?”
“왜 자꾸 속 쓰린 얘기를 해. 말했잖아. 너 때문에 못 하겠다고 했다니까.”
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이대로 하진이 팀에서 나가버리면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팀의 존폐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하진이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릴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제가 그렇게도 싫어진 걸까. 팀까지, 정말 이렇게 팀까지 나갈 만큼? 아니, 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제 생각을 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내 말이 그럴 정도였다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저는 아직도 멀었다.
“…….”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진을 만나야 했다. 어디에 있을까. 아까 실장님을 먼저 만나러 갔었는데 그 뒤에 어디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때 짐 싸서 갔다던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정우는 혼란스러워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확 들어 실장을 바라보았다.
“……짐 싸서 갔다고 하셨는데 그건….”
“숙소 나갔어.”
“…네?”
“말 그대로야. 못 알아들어? 하진이 짐 싸서 숙소 나갔다고. 아마 지금쯤이면 가고 없겠다.”
“…안 되는데…….”
다른 사람 말이라면 장난치지 말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장의 말이었다. 정우는 갑자기 쏟아진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무슨 생각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뭘 물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단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 저 먼저 좀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음에 제가 다시 올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급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 숙여 몇 번이고 죄송하다고 인사한 정우가 가보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실장실을 나섰다, 실장이 그렇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좀 과장해서 심하게 말하기는 했는데 지금은 그런 충격이 필요한 때였다. 부디 충격받은 정우가 잘못한 걸 빌든, 울든 어떻게든 용서를 받고 하진이를 데려오기를 바라며, 식어 빠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