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10화 (110/122)

#110

아침부터 실장의 호출을 받은 것은 하진이었다. 정우와 같이 부를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혼자 오라는 말에 하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실장실로 올라갔다. 데뷔가 결정 날 때 빼고는 늘 안 좋은 일로 실장님을 만나러 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앉아, 앉아. 얼굴 좀 풀어. 혼나러 왔어?”

“…혼내실 거잖아요.”

“혼날 일 한 거 알기는 아네. 혼낼 거였으면 둘 다 불렀겠지. 앉아. 혼내서 될 일이면 진작 혼냈어.”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는 하진의 앞으로 따뜻한 커피가 놓였다. 하진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하진을 보며 커피를 마신 실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동안 이런 일들 뭐 한두 번 겪은 거 아니야. 남자애들 모아놔도 생기고, 여자애들 모아놔도 이런 일은 생겨. 엄청 사소한 일로 탈퇴하네, 저거 안 빼면 나는 못 하네 난리 치기도 하고, 진짜 한 번은 해외 공연 간 그 호텔 복도에서 머리채 잡고 싸운 애들도 있어. 투숙객들이 사진 찍었는데, 빌고 지워 달라고 사정하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

“다들 해체 위기까지 여러 번 가고, 또 가고 누르고 또 눌러서 그렇게 오래 해 먹는 거야. 너희라고 별로 다를 거 없다고도 생각해.”

“…죄송합니다.”

“아니야. 난 오히려 신기하고 좀 재밌어. 내가 처음 본 너랑 정우는 절대 이런 일 없을 줄 알았거든. 정우는 널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고, 넌 정우를 무조건 좋아하고 기대고 하는데 플러스가 되면 됐지,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립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거든.”

“…….”

“물론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여유 부리는 거야. 그치? 하진아. 해결될 일이지?”

해결이라는 말에 하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네, 한 마디면 될 일인데 그 말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해결. 도대체 뭐가 해결일까. 두 사람 모두 정확하게 감정을 정리하고 철저히 공적인 사이로만 지내는 것? 아니면 영영 만나지 않는 것?

“누가 먼저 시작했어?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인지는 알아야 하잖아.”

“…저요. 제가 먼저 시작했어요.”

“그럼 정우가 더 화나 있어야지. 지창이 말도 그렇고 다들 네가 화나 있고, 정우가 네 눈치 보는 쪽이라던데.”

“시작은 저였는데… 그 일의 과정 중에 좀 여러 일이 있었어요. 지금 눈치를 보고 그런 상황이 아니라, 정리…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슨 정리? 팀 정리?”

“…마음 정리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팀에 너무 많은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빨리 정리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믿고 여기까지 오게 해 주셨는데…….”

단조로운 목소리로 벌벌 떨며 말하는 하진을 가만히 보던 실장이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힘들구나.”

“…….”

“때려치울래?”

“…….”

하진의 눈이 일렁였다. 실장은 장난기가 전혀 없는 목소리로 하진에게 연신 물었다.

“솔직히 말해 줘. 처음에 너 여기 데려온 것도 나고, 그냥 가만히 뒀으면 편히 대학 다니면서 잘 살았을 애 이 팀에 넣어서 이렇게 힘들게 만든 것도 어떻게 보면 나잖아.”

“…아니, 아니에요.”

“힘들면 힘들다고 해. 때려치우고 싶으면 말해. 너는 생각만 한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해 줄 수 있잖아. 하진아. 솔직히 말해 봐. 팀 그만두고 싶어?”

너무나도 날카로운 말이었다. 가느다랗고 뾰족한 말이 정확하게 심장 가운데를 찌르며 들어왔다. 하진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눈물이 투두둑 온 뺨을 적시며 떨어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요. 정말이에요.”

“그만두고 싶지는 않은데?”

“……정리를 좀 하고 싶어요. 이대로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정리가 안 될 것 같아서… 하다가도 다시 돌아가고, 마음먹었는데… 또 원점이고, 제자리고…….”

숨이 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진은 아플 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 위를 손으로 꾹 누른 채 겨우 고개를 들었다.

“…힘들어요……. 그만두고 싶지 않은데… 포기하기도 싫고, 계속… 계속하고 싶은데 그게, 그게 자꾸 힘들어서, 흔들리고… 의욕이 안 생기고…….”

“탈퇴 생각하는 건 아니라 이거지?”

내내 눈물만 뚝뚝 흘리며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하진을 본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책상 뒤 창가로 가 바깥을 보고 섰다.

“탈퇴는 안 돼. 솔직히 말하자면 너희 이제 곧 2년 차고, 남들은 돈 주고도 못 사는 인기 얻었고, 앞으로 더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여기서 팀 무너뜨릴 수는 없지. 그건 나도 못 봐. 허락 못 해. 네 마음이야 알지, 힘든 것도 알고. 그런데 난 이 팀 만든 사람이고, 만든 것에 책임을 나도 져야 해. 겨우 2년 반짝이자고, 그 연습실에서 인규랑 애들이 몇 년을 죽어라 연습한 거 아니잖아. 그렇지?”

실장님의 말이 모두 맞았다. 저를 위해서도 팀을 지켜야 하지만, 그동안 이날을 위해 버텨온 인규와 해성, 영우를 위해서도 자리를 지키는 게 맞았다.

“법, 소송 뭐 이런 얘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진이 너 지금 관두고 싶은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멀쩡히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애 데려다가 이 자리 급히 준비하게 해서 앉힌 것도 나고, 그동안 너 열심히 해 온 거 누구보다 잘 아니까 최대한 좋게 해결하고 싶다.”

“…….”

“좀 쉬자.”

쉬자는 말에 고개를 든 하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 활동 못 해. 참고 하다가 완전히 펑 터지면 그땐 진짜 붙일 방법도 없고, 언론 막을 수도 없어.”

“…스케줄 있잖아요.”

“스케줄 미루는 게 나아. 팀 분해되고 개판 되느니.”

“…….”

“그동안 너희 너무 못 쉬었어. 일단 하진이 너 건강상의 이유라고 할게. 그거만큼 뒷말 안 나오는 것도 없어.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고.”

“저 때문에 형들까지 쉬는 건…….”

“그래, 그럼 안 되지. 애들 허송세월하는 것도 못 보지. 인규, 해성이, 영우 셋이 방송 하나 들어가게 할 거야. 우리 애들 몇 명 넣어달라고 하는 여행 프로도 있고, 예능도 있는데 한 번 돌지 뭐. 인지도에서도 좋을 거고, 손해될 거 없을 거야.”

막힘없이 대안을 말하는 실장을 본 하진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하진의 앞으로 온 실장이 맞은 편에 앉아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 부르기 전에 다 생각해 둔 거야.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설마 내가 대안도 없이 쉬라고 하겠어?”

“…….”

“둘이 불러서 같이 혼내고 참아, 무조건 참아, 웃어, 뭐 이러면 간단하지. 그런데 그러면 또 터질 거 아냐. 이 기회에 좀 쉬어. 두 달, 정말 길게 석 달까지는 시간 줄게. 그 안에 치고받든 죽이네 살리네 하든 마음대로 해. 대신 어떻게든 해결해. 앞으로 아포제라는 그룹 생활 문제 없도록 만들라는 말이야.”

“…….”

“못 하겠어? 못 하겠으면 그다음은 강제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

“…할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넉넉잡아 석 달이면 정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말 극으로 치달아 감정이 터져 조각이 나 버리든, 상처 위에 또 상처가 나서 감정이라는 게 사라져 버리든 어떤 쪽으로라도 결정이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진은 실장의 휴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 아파서 당분간 아포제 그룹 활동 올스톱 하고, 다른 멤버들은 개인 활동 한다고 기사 낼 거야. 아마 한동안은 시끌시끌할 거야. 강하진 결국 탈퇴네 뭐네 난리가 나겠지. 그 정도는 우리도 생각하고 있고, 너도 감수해야 할 부분이야.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집에 가 있는 건 어때? 그래도 부모님이랑 있고 쉬면 좀 나을 수도 있잖아.”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문제가 있을 땐 마주해서 돌파하는 방법도 있지만, 가끔은 좀 떨어져서 안 보는 게 좋을 때도 있더라. 너희 같은 그룹, 신인 애들의 제일 큰 문제가 그거야. 각자의 시간이 없는 거. 싸워도 얼굴 봐야 하고, 마음 진정되기도 전에 얼굴 보니 또 화나서 싸우고. 아물지는 못하고 덧나고 또 덧나고 그러는 거지. 나중에는 원수로 돌아서는 애들도 많아.”

정우와 그렇게 원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그렇게 최악의 결말은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진은 실장의 말에 차분히 대답하고 말라가는 눈물을 완전히 닦아냈다. 그리고 건강하게 다 나아서 다시 보자는 실장을 바라보았다.

“지창이랑 훈이한테는 이런 쪽으로 갈 거라고 내가 미리 말했어. 인규, 해성이 영우는 부족한 점 없게, 서운함 하나도 안 들게 최고로 밀어줄 거야. 걱정할 거 없어. 너희 때문에 걔네가 피해 보면 안 되잖아. 너희 풀어졌는데 인규랑 해성이, 영우가 나간다고 화난다 그러면 안 되니까 푸시 최고로 해 줄 거야.”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우한테는 내 마음대로 말한다?”

“네?”

“이제 정우 올 거야. 내가 너희 따로 불렀거든.”

“아…….”

“가 봐. 정말 푹 쉬고, 건강하게 보자. 하진아.”

“…네. 고맙습니다. 실장님. 다음에는 좋은 일로 인사드리러 올게요.”

실장에게 꾸벅 인사한 하진이 실장실을 나섰다. 혹시라도 정우를 마주칠까 싶어 긴장이 되었다. 마주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눈을 떠도 정우가 없는 곳으로,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하진은 서둘러 소속사 건물을 나가 택시를 잡아 올라탔다. 그리고 텅 비어 있을 숙소로 향했다.

“…….”

집. 집에 가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긴 휴식에 부모님이 많이 놀라실 거고, 묻고파도 부담이 될까, 혹시 그 물음이 스트레스가 될까 잘 묻지도 못하고 걱정하시겠지만, 그래도 편안히 쉴 수 있고, 방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집에 가고 싶었다. 침대도 하나고, 고개를 돌려도 차정우가 보이지 않는 그곳에 처박히고 싶었다. 그래야 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흐릿해질 테니까.

“…….”

그래야……. 정우의 두드림에 돌아보지 않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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