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09화 (109/122)

#109

“그래, 터놓고 오늘 얘기 좀 하자. 다른 애들한테는 말 못 해도 나한테는 할 수 있잖아. 나 너희 매니저고, 이 팀 잘못되면 안 되니까 가운데에서 중재해야 되는 사람이야.”

“죄송해요, 형.”

죄송하다고 말하는 하진을 보고 손을 내저은 지창이 식탁 위에 놓인 생수 한 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는 거 아니고, 너희 왜 그래? 안 그러던 놈들이 그러니까 내가 당황스럽잖아. 해성이나 영우는 원래 티격태격하는 놈들이니 걔네가 싸웠다면 내가 이해하겠어. 그런데 너희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요.”

“뭐?”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의견이 안 맞는 부분이 생겼어요. 심각한 일은 아니고, 민감한 부분인데 그게 안 맞으니까 좀 그 얘기가 나오면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일이 뭔데 그래? 아니, 그래. 말 못 할 일이니 둘이 그러겠지. 그래, 그렇다고 치고, 정우야. 넌 왜 그래? 하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편들던 놈이 왜 그래, 도대체.”

지창의 물음에 정우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진과 저 사이에 있었던 그 모든 일 중에 단 한 순간도 지창에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가 형 기분을 안 좋게 했어요. 형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전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다가…….”

“아니, 진짜 알 수가 없네. 안 그러던 녀석들이 이러니까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그런데 이번 일은 내 선에서 끝낼 수가 없어. 아까 실트 완전히 뒤집혔어. 해체니 뭐니 난리도 아니었고, 그거 실장님께도 다 보고됐어.”

아포제라는 그룹은 오 실장이 만든 그룹이었다. 한영기획의 명운을 걸고 만든 만큼 아포제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은 하진과 정우도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놀랄 일은 아니지만, 실장님에게까지 이 불편한 거짓말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당장 부르라는 거 일단 내일로 미뤘어. 너희도 좀 진정하고, 둘이 잘 얘기 좀 하라고. 실장님이랑 있을 때도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할 거야? 나는 너희 편 무조건 드니까 이렇게 넘어가도 실장님은 철저히 소속사 편이야. 대중의 눈이고, 매니저가 아니라 우리 그룹 제작자의 눈이야. 그래, 앞으로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그런 말 하려고 부르실 것 같아?”

지창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다 맞았다. 지창까지는 어떻게 내내 같이 다닌 정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오 실장은 아니었다. 다정한 분이지만, 단순히 다정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문제였다. 그룹의 존폐가 입에 오르내리는 이 상황에서 좋은 말과 다정한 달램이 주 내용이 아닐 것이라는 건 굳이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너희 무슨 5년이 됐어, 10년이 됐어. 아직 2년도 안 됐는데 벌써 이런 말 나와서 좋을 게 뭐야?”

답답해 죽겠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기는 지창을 본 하진이 고개를 숙였다. 지창에게 미안하지만, 정말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실장님을 만난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과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었다.

“다 비슷한 또래 애들끼리 매일 보고 살면 그래, 틀어질 수 있어. 다른 팀 애들은 치고받고 난리도 아니라잖아. 그래, 다 이해해. 워낙 가깝고 친하니까 사소한 걸로 서운하고 그럴 수도 있어. 하진이 네가 그럴 정도면 이유도 있을 거고. 그런데 하진아, 정우야. 우리 일 크게 만들지 말자.”

“…….”

“팀 여기서 끝낼 생각인 거 아니잖아.”

“…걱정하시는 일 없게 정우랑 잘 얘기할게요. 오늘 일은 제가 조심성이 없었어요. 순간 찍힐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형 말대로 싸울 수 있잖아요. 풀려면 시간도 필요한 거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잘할게요. 죄송해요, 형.”

어떻게 말을 해도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하진을 보며 한숨을 쉰 지창이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해성과 영우가 싸운 거라면 차라리 쉽게 해결하겠는데, 절대 싸울 일도 없고 이렇게 틀어질 일도 없을 것 같던 정우와 하진이라 더 대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무모한 애들 아닌 거 아니까 이 정도만 할게. 어리기나 해야 손잡고 화해하라고 떠밀지. 무튼 실장님은 내가 못 막았어. 내 선에서 해결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혼나기만 했다. 해결한다는 사람이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오냐고.”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는 분위기에 지창은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쥐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말하라고 안 할게. 근데 누가 잘못한 거야? 일의 시작이 있을 거 아냐.”

지창의 물음에 내내 묵묵히 있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이에요.”

“뭔가 그럴 것 같기는 했는데 정말 너야? 아니, 뭘 얼마나 잘못했으면 이 착한 하진이가 이래.”

“…제가 형한테 크게 잘못했어요.”

이렇게 어르고 달랜다고 풀릴 일이었다면, 진작에 둘이 알아서 풀었을 것이었다. 지창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과 정우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렸다.

“기사 수습은 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들 지금 당겨서 겪는다고 생각하고.”

“…….”

“들어들 가. 같은 방 쓰는 것도 불편하겠지만, 그렇게라도 한 번 더 얘기하고 마주치고 해. 난 너희가 잘들 풀고 넘어갈 거라고 믿는다. 어? 형 믿을 거야.”

애써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애쓰는 지창을 보고 작게 미소 지은 하진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저를 따라 들어오는 정우를 돌아보았다.

“정우야.”

“…네.”

“이제 그만하자.”

“…….”

“너도 다 정리해 줬으면 좋겠어. 형 말대로 여기서 팀 끝내기에는… 너무 이르고, 나 그렇게 무책임하게 굴고 싶지 않아. 너 때문에 너랑 하고 싶어서… 너랑 있는 게 좋아서 데뷔하고 싶었던 거 맞지만, 지금은 그게 전부는 아니야. 팀… 깨고 싶지 않아. 우리 때문에 형들 계속 피해 보는데… 그럼 안 되는 거잖아.”

“정리…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낮게 깔린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진은 말을 하려다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시 입술을 닫았다. 다른 건 몰라도 어떻게 정리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았더라면 이렇게 될 때까지 정우를 사랑하며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냥 안 된다고만 생각해. 기대도 하지 말고, 희망 같은 것도 가지지 말고 그냥 다 부정적으로 생각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그냥 너무 버티기가 힘들어서 놓고 싶어져.”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요.”

“…….”

“난 형이 날 다시 사랑해 줬으면 좋겠지만, 사실 기대는 안 해요. 희망도 없다고 생각해요. 당연하잖아요. 내가 한 게 있는데. 형은 착했고, 다정했으니까 나 같은 놈한테도 기대라는 걸 하고, 그렇게 따뜻하게 굴어 줬지만, 난 아니잖아요.”

하진은 정우의 목소리 끝에 매달린 나약함 같은 것들이 아래로 축 늘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봤던 그 모든 정우들 중 가장 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딴 말을 하고, 그딴 짓을 하고 해도 형은 나한테 왔잖아요. 그랬던 형을 돌아서게 만든 게 난데, 내가 어떻게 형한테 기대를 하고, 희망을 가져요. 내가 한 짓이 있는데.”

“그럼… 이제 와서 그런 말은 왜 한 건데?”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요.”

“…….”

“형이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래도 내가 지금 말 안 하면, 보이지를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정우가 하는 말이 뭔지 하진은 알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뜨거운 감정으로 들끓어서 혼자서는 잠도 잘 수 없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그 순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에게 불쾌함으로 닿을 것을 알면서도 소리 내지 않으면, 다가가지 않으면 내가 전부 녹아 사라질 것 같은 그 절절한 순간이 분명히 저에게도 있었다.

“밀려나도 좋기만 한 거예요.”

날카로운 말을 들어도, 너의 음성이라 좋기만 했던 순간이 있었고.

“형이 말할 때마다 아픈데, 아픈 것도 좋은 거야.”

하진은 아픔이 좋은 이유도 알고 있었다.

“형이 나를 봐 주니까.”

그 순간에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봐 줬으니까.

“지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요.”

“…….”

“형이 나 봐 주잖아.”

“…….”

“날 보고 있잖아.”

마주했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하진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며 뒤돌았다. 정우의 저 모든 말들을 거짓이라고, 화를 풀기 위해 지어내는 말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비슷한 게 많았다.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찰나를 정우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실장님이랑은 내가 다 얘기할게요. 괜히 형까지 혼날 거 없잖아요. 다 내가 잘못한 건데.”

“…됐어. 그렇게 피할 일 아니야.”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하진은 갈아입을 옷을 챙겨 방을 나섰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주저앉았다.

정리되기는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울 수 있는 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팀이 겪는 그런 갈등, 돈 문제나 파트 문제, 스케줄 문제 같은 걸로 사이가 좋지 않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을 텐데, 이건 정말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밀려나도 좋기만 한 거예요.」

혼자인데. 분명 혼자인데, 정우의 목소리가 샤워부스 안으로 울리는 것만 같았다.

「형이 말할 때마다 아픈데, 아픈 것도 좋은 거야.」

한 번쯤 알아줬으면 했던 저의 마음이었다.

「형이 나 봐 주잖아.」

네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그만하라고 선을 긋고, 지긋지긋하다고 웃음을 거둬도 포기할 수가 없던 그 마음. 그 이유.

그래도 네가 지금 날 보고 있으니까.

“…….”

그것만으로도 잠시 다 잊을 만큼 행복했으니까.

“…….”

정말 바보 같은 사랑이었다. 나를 갉아먹는, 내가 몽당연필처럼 작아지는 줄도 모르고 점점 커지는 상대를 올려 보며 결국은 뛰어도 닿을 수가 없던, 그런 바보 같은 사랑. 그런데…….

「날 보고 있잖아.」

정우가 그걸 알고 있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줄도 몰라서 그냥 작아진 몸으로 제자리에서 뛰기만 하던 저의 그 마음을 그대로 알고 있었다. 직접 겪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바보 같은 사랑의 마음을.

“…….”

젖지 않은 샤워부스 바닥에 앉은 채 하진은 무릎을 모아 끌어안으며 젖기 시작한 얼굴을 파묻었다. 습관처럼 자리 잡은 기대감이 자꾸만 눈가를 찔러댔다. 진짜일지도 몰라. 정우가 그날의 나처럼 나를 사랑할지도 몰라. 끈적한 미련은 금세 온몸을 집어삼켰다. 하진은 몸을 더 웅크리며 숨죽였다. 이유를 모를 눈물이 멈출 때까지, 아주 한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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