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수도 없이 생각했던 일이었다. 정우가 저를 사랑하면 어떤 기분일까. 저 사랑을 받는 건 얼마나 벅차오르고 행복할까. 상상만으로도 그 힘든 시간 안에서 웃음이 나던 때가 있었다.
“…….”
하진은 택시 안에서 까만 바깥에만 시선을 주며 생각했다. 정말 좋을 줄 알았는데,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아버린 것 같아 무겁기만 했다. 왜 이제야? 조금만 더 빨랐어도 좋았을 텐데. 완전히 지치기 전이었다면, 저 마음을 잡고 한 번 더 일어나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도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심히 생각은 해 보지만, 지금의 저는 일어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정우의 마음을 굳이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고, 어제 좋았던 게 오늘 싫어지기도 하고, 열렬했던 것에 덤덤해지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해줬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우가 죄를 지은 게 아니듯, 갑자기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정우를 탓할 이유는 없었다. 저도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었고,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닿고 싶어 모든 걸 뒤엎었으니까.
택시는 어둠 속을 가르며 숙소에 도착했다. 웬만하면 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내리려 했지만, 숙소 앞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몰려든 사생들이 여기저기 포진해 있었다. 정우는 마스크를 괜히 한 번 더 만지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주차장 안까지 들어가 달라며 출입 카드를 기사님에게 내밀었다.
차로 달려드는 몇몇 사생들을 보며 혀를 차는 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곧 차단기가 올라가고 택시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확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하진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저렇게 극성맞은 것들이 있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기사님에게 죄송하다고 말한 정우가 택시비를 계산했다. 그리고 하진이 먼저 가서 선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하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소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진은 어두운 거실을 한 번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환하게 켜지는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간 정우가 눈앞에 보이는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등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할래?”
“네?”
“아무도 없잖아. 아까 네가 한 말도 있고.”
드디어 뒤로 돈 하진이 정우를 바라보았다. 잔뜩 굳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정말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하진은 화가 났다.
“이제는 내가 좋다며. 그럼 하고 싶을 거 아냐.”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에요.”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
“좋아하지도 않을 때는 그렇게 꾸역꾸역 해주더니, 좋아하게 된 뒤에는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 좋아하니까, 이제 알았으니까 더 하고 싶어야 하는 거 아니야?”
“…형이 날 이제 안 좋아하잖아요.”
“나도 너처럼 할 수 있어.”
굳다 못해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얼굴에 하진의 마음도 따라 일그러졌다. 그만하고 싶은데 멈출 수가 없었다. 괴롭히고 싶은 걸까. 정말 복수라도 하고 있는 걸까. 생각과 행동이 다른 것은 어쩌면 저일지도 몰랐다.
“…….”
“…….”
마주한 날카로운 침묵과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시선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진은 울리기 시작한 진동에 정우에게 두었던 시선을 내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창의 이름이 뜬 화면을 본 하진이 다시 뒤로 돌며 전화를 받았다.
“네, 형.”
하진이 너 어디야, 로 시작하는 목소리는 온화하지 않았다. 하진은 눈을 감으며, 지창의 말에 대답했다. 뭐 때문에 이러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숙소 들어왔어요.”
- 정우는? 같이?
“…네. 같이 있어요.”
- 트위터에 뜬 그거 뭐야? 너희 싸웠어? 사진에 영상에 난리던데, 어떻게 된 거야? 어? 내가 봐도 싸우는 걸로 보여.
역시 예상한 말이 나오는 것에 하진은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형.”
- 나한테 죄송할 문제가 아니야. 안 그래도 너희 불화설이네 뭐네 말 나오는데 이럴 때 증거처럼 일을 벌이면 어떡해?
“심각한 건 아니었어요. 어떻게 올라갔는지는 제가 확인을 아직 못 했는데… 과장됐을 거예요. 정우랑 그 뒤에 저녁도 먹었고, 다 괜찮아졌어요. 원래 그렇잖아요. 한 부분만 보고, 판단해서… 부풀리고.”
- 그래, 알지. 나는 아는데 그 말을 대중이 믿어주냐는 거야. 일단 숙소 들어갔으면 됐어.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 지금 갈 테니까.
“…네. 죄송해요, 형.”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지창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내린 하진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침대에 앉아 SNS에 접속했다. 실시간 트렌드에는 굳이 눌러보지 않아도 알 몇 개의 말들이 떠 있었다. 둘이 싸운, 부부싸움, 이러다 해체 같은 말들을 본 하진이 그중 하나를 눌러 바로 뜨는 어두운 영상을 확인했다.
“…….”
선명하지 않은 영상이었지만, 그래도 팬이라면 저와 정우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정우와 잠시 벌어졌던 그 순간만을 찍어 올렸고, ‘이제 하다 하다 둘이 대놓고 싸우기까지 하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영상 올라왔어.”
“…….”
“리트윗이 계속 올라가. 곧 삼만도 넘겠다. 어디까지 갈까. 누구까지 보게 될까. 기사도 날 거고, 또 불화니 뭐니 난리가 나겠지.”
“아니라고 하면 돼요. 몇 년을 대부분 하루 종일 같이 다 붙어 있는데 그 정도 트러블도 없는 그룹 없어요. 치고받고 싸운 것도 아니고,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 걸로 문제 안 돼요.”
“불화라면 불화지. 맞잖아.”
“…….”
“꽤 오래되기도 했고.”
“형.”
“진짜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정우를 올려 보았다. 정우의 얼굴에 저렇게 많은 감정이 물드는 것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요즘의 정우는 꼭 노을 같기도 하고, 새벽의 짙푸름 같기도 했다. 늘 굳어 있던 새까만 밤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봐.”
“…….”
“날 사랑해?”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말에 정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진은 그 미성숙해 보이는 눈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다시 소리 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하진은 재촉하지 않았다. 사랑은 재촉한다고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것 같아요.”
“하는 것 같은 걸로 변했네.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그게 아니라.”
침대에서 일어난 하진이 정우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흔들리는 그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난 널 사랑했어.”
“…….”
“분명했어. 내 감정은. 사랑했어. 사랑했고, 정말 사랑했어. 백 번을 물어도, 천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같았어. 차정우 너를 사랑했어. 너를 사랑해서 전부 다 견딜 수 있었어. 네가 있어서 숨을 쉬는 게 좋았고, 아침이 오는 것도 좋았어. 널 좋아하지 않을 때에도 당연히 누렸던 건데, 널 사랑하게 됐다는 거 하나로 그 당연한 것들이 미친 듯이 좋아졌어.”
“…….”
“사랑하는 것 같아? 네 감정은 그런 거야. 약하고 약하지. 흔들리고, 쉽게 변해.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 너는 한 시간 뒤에 또 변할 거고, 흔들릴 거고, 약해질 거고,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날 텐데.”
“…아니, 아니에요. 아니야, 형. 아니에요.”
“그럼 또 나만 혼자 널 사랑할 텐데.”
“…….”
“나 이제 너 때문에 외롭기 싫어. 널 사랑해서 외로운 것보다, 널 사랑하지 않고 외로운 게 더 좋아. 아프지는 않으니까. 가볍기라도 하잖아. 그러니까 정우야.”
“…….”
“그냥 하던 대로 해. 날 사랑 같은 거 하지 마. 쉽게 변하고 뒤집히는 네 마음, 듣기 힘들다.”
하진은 그대로 정우의 옆을 스쳐 지났다. 반쯤 열린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제 팔을 잡아 돌려세우는 움직임에 쉽게 몸이 돌아갔다. 우습게도 상처 받은 것 같은 정우의 얼굴이 보였다. 하진은 입술 안쪽 여린 살을 짓씹다가 그대로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하는…….”
“하자 그럴 때 빼지 말고 해.”
놀란 정우가 그대로 셔츠를 벗는 하진의 팔을 잡아 말렸다. 하진은 그런 정우를 노려보다가 팔을 확 뿌리쳤다.
“생각대로 안 되니까 속상해?”
“…….”
“말하면 될 줄 알았지? 고심하고 고심해서 솔직하게 용기도 내고, 뺏기기 싫고, 놓치기 싫고, 다른 사람이랑 다니는 것도 싫다고 말하면 다 풀어질 줄 알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당황스러운 거잖아, 지금.”
“…….”
“너는 네가 불쌍하지, 지금. 손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왜 내 말을 안 믿어주고 멋대로 해석할까 싶을 거야.”
“…….”
“그런데 나는 내가 불쌍해. 너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한 대 치지도 못하는 내가 불쌍해.”
정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진은 아파 보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미칠 것 같았다.
“뭐야, 너희! 또 싸우고 있는 거야?”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지창의 목소리에 놀란 하진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집중하고 있어 그랬던 건지, 지창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창의 심각한 얼굴을 보니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싸운 거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둘이 그렇게 노려보고 서 있는데 아니야? 이런 분위기 처음 보는데? 너희 나와 봐. 얘기 좀 해야겠다. 하나씩 불러서 해 봤자 안 되겠어, 이제.”
결판을 내자는 듯 거실로 나가는 지창을 본 하진이 먼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뒤따라 나오는 정우를 흘끔 바라보았다. 지창이 어디서 얘기를 할지 정하는 듯 주변을 보다가 식탁으로 가 앉았다. 하진도 정우와 함께 식탁으로 가서 지창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