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06화 (106/122)

#106

택시는 한참을 달렸다. 기사님은 계속 미러로 뒤에 따라오는 차들을 살피며 능숙하게 골목으로 들어가 차들을 하나씩 따돌렸다. 집요하게 끝까지 따라오던 차도 결국은 떨어져 나갔다. 정우는 숙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사생들의 집요함을 떠올렸다. 그 차들은 아마 포기하지 않고 숙소라도 가 있을 것이었다. 정우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소에 잘 올 일이 없는 역이 보였다.

“기사님, 이쪽에 세워 주시겠어요? 나중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럴래요? 아, 징그럽게도 따라붙던데 유명한 사람들인가 봐요.”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하면서 묻는 기사님에게 가수라고 간단히 설명한 정우가 하진의 손을 잡고 택시에서 내렸다. 하진은 내리자마자 그 손을 빼내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왜 내린 거야?”

“걔네 분명 숙소 앞에 갈 거예요. 좀 이따 들어가요. 형들 올 때쯤.”

“그럼 따로 있다가 들어가자.”

정우는 하진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잘 와 본 적도 없는 이런 낯선 곳까지 와서 같이 있는데 굳이 따로 있다가 가자는 말에 손끝이 다 차가워졌다. 정말 하진이 이대로 가버리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어떻게든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나랑 그렇게 같이 있기가 싫어요?”

“…좋을 것도 없잖아. 불편한 게 사실이고.”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같이 있어요. 같이 택시 타는 거 다 봤는데 따로 들어가도 이상하잖아요. 아까 그 장면만 보고 싸웠네 뭐네 떠들 텐데… 같이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하진을 본 정우가 얼른 주변을 살폈다. 큰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고, 옆으로 여러 식당이 보였다.

“…저녁 먹을까요? 아니면 카페 갈까요?”

숨기지 않고 깊게 숨을 내쉰 하진이 정우 너머로 보이는 간판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밥 먹자.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같이 있는 건 역시 싫다고 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밥을 먹자는 하진의 말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정우는 얼른 카페에 두었던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저기 갈까요? 전에 형들이랑 다 같던 적 있었잖아요. 강남점. 방도 있고 해서 편할 것 같은데…….”

정우가 말한 식당을 본 하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정우가 얼른 그런 하진을 따라 움직였다.

들어간 식당은 꽤 가격이 나가는 깔끔한 일식집이었다. 전에 멤버들과 강남에 있는 지점에서 초밥을 먹은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홀과 방 어느 쪽을 원하는지 물었다. 정우는 둘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을 원한다고 말했다.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방이 몇 개 남아 있다며 안내를 받았다.

방으로 들어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리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메뉴를 보았다. 하진은 유심히 보지 않고 가장 위에 있는 디너 세트를 잠깐 보다 말았다.

“난 디너 초밥 세트면 될 것 같아.”

“네. 여기 디너 초밥 세트 둘 주세요.”

직원에게 주문한 정우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약속한 거 아니었나 봐요.”

정우는 고개를 드는 하진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 부드럽지 않은 시선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너는 늘 네 멋대로야.”

“…….”

“네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

“아까도 그래. 만나러 가도 물론 아무 상관 없지만,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너 어떻게 했어? 강제로 못 가게 하려고 했잖아. 팔 잡고, 당기고 가방 뺏고.”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정우의 말에 하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래요. 말로 해야 하는 거 아는데, 안 되면 말아야 하는 것도 아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알면 고쳐야지.”

“…….”

“남이 싫어하는 거 알면 더더욱.”

남. 정우는 하진이 지금 말한 남이 바로 하진을 칭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이라고 딱 선을 긋는 말에 따끔대던 마음 위로 불이 붙었다. 그것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정우의 마음 위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아프게도 태우기 시작했다.

“…안 그럴게요. 노력할게요.”

“…….”

“형이 싫어하는 일 안 할게요. 그러니까 형.”

“…….”

“한 번만 봐줬으면 좋겠어요.”

“봐달라고? 뭘? 너를? 전부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아니, 아니에요. 없던 일 될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렇게 봐달라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모습, 달라지는 모습 형이 봐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꼭 사고 친 학생이 반성문을 들고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진은 그런 정우를 보며 연신 따뜻한 차만 마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입술이 자꾸만 말라 아프기 때문이었다.

“노력한다고 다 달라지는 거 아니더라. 나라고 노력 안 했겠어? 나도 수도 없이 노력했어. 노력이라는 말은 쉽지.”

“…….”

“네가 무슨 노력을 한다고 이러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

“…왜냐고 왜 이제 안 물어요? 형 전에는 내가 형한테 이런 말 하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었잖아요.”

“네가 답을 찾았다고 하니까.”

“…….”

“꼭 답을 들으려고 묻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난 그 답 듣고 싶지 않아. 무서워.”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옆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어 다시 가득 채운 하진이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 숨에는 참 여러 가지 감정이 묻어 있었다.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데?”

“그래도 생각을 많이 하기는 했구나. 뭘 잘못했는지 이제 알기는 아는구나…….”

“반성은 너 혼자 해. 나한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진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그 말들은 계속 정우의 마음을 할퀴고 지났다. 제가 이렇게도 말에 쉽게 상처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정우는 새삼스레 놀랐다.

“나 보여주려고 하는 반성이 무슨 의미가 있어? 달라지고 싶으면 너 혼자 노력해. 내가 네 부모님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그냥 같은 팀 아는 형, 좀 친했던 사람, 그러다가 어색해진 사람인데 그런 나한테 아무리 이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형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그래요. 형한테 사과하고 싶고, 형 마음 조금이라도 돌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 형한테 이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날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지?”

하진을 괴롭히려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풀고 싶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풀고 나아지고 싶었다. 지금은 미안하다고 내가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 같은 말 한마디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 딱딱하게 굳은 것들을 녹이고 싶었다.

“넌 여전히 네 생각밖에 안 해.”

“…….”

“요즘 널 보면 화도 나지만. 너한테 미안하기도 해.”

“…….”

“너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어서. 하지 말라는 너한테 매달리고, 계속 원하고, 사랑해 달라고 구걸하던 날 보면서 얼마나 답답하고 싫었을까.”

“…싫었던 게 아니에요. 난 그저 그때는 팀밖에 안 보였어요. 지키고 싶었고, 우리 관계가 달라지면 팀이 흔들릴 거라 생각했어요.”

“그럼 나랑 자지도 말았어야지.”

하진의 말이 맞아서 할 말이 없었다. 저는 하고 싶은 걸 전부 했다. 팀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하에 원치 않는 관계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원하는 쾌락은 부족함 없이 누렸었다. 팀을 지키려고 정말 그랬었던 거라면, 하진과 동료, 형 동생 그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라면 섹스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게 맞았다.

“네가 찾은 답이 뭔지 말해 봐. 그거 말하고 싶어서 계속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

“…….”

“해도 돼. 들어줄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과도 해야 했고, 뭐가 미안한지 하나씩 다 말도 해야 했다. 제가 지금 느끼는 이 모든 감정들을 하진은 이미 몇 배로 더 강하게 느꼈고,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팠었다는 걸 이제 안다고, 다 말을 해야 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거 정말 우습지만, 믿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형을 좋아한다고, 처음부터 좋아했었다고 말해야 했다.

“…형이 왜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싫은지 생각해 봤어요. 형이 날 좋아한다고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이제 끝났다고, 더는 날 안 좋아할 거라고 하니까 왜 내가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건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

“…안 믿어도 괜찮아요. 나도 솔직히 말하기가 부끄럽거든요. 뭐 이렇게 쉽게 말이 바뀌나 싶기도 하고, 내내 모르다가 이제 아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형한테 신뢰 얻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말하기가 좀… 그런데…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아니라고, 그만두라고, 그런 감정이 뭐 얼마나 대단해서 그렇게 질질 짜냐고 비웃고 무시하고 한심하게 여기던 제가 떠올랐다. 아마 하진이 지금 제 말을 들으면 똑같이 생각할 것이었다. 착각이라고, 어이가 없다고, 이제 와서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고.

“…형 말처럼 형은 나한테 너무 당연했어요. 그전에도 그랬지만, 날 좋아한다고 한 뒤로는 내가 아무 짓도 안 해도 형은 그냥 알아서 내 옆에 있었고, 나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고… 사랑받으려고 애쓰고, 매달리고… 내가 어떻게 해도 좋아하고.”

그저 몸만 원한다고 날카로운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였었다. 얼굴 보며 섹스하는 게 불편해 엎드리게 하고 박아대도 군소리가 없었다.

“그래서 형은 나한테 너무 당연했어요.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게 맞아요.”

“…….”

“형 병원에 갔던 날… 그런 식으로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형이 나랑 연애하면 다시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은 안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의미로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 그렇게 나왔어요. 적선하듯, 나를 희생하듯 그렇게.”

“그거 알아? 난 알면서도 그 말이 좋았어.”

“…….”

“푹 잠이 들거나 아니면 죽거나 둘 중 하나겠지 생각했는데, 살기도 살았고 네가 연애까지 해준다고 그래서 너무 좋았어. 그랬는데 넌 그 연애라는 거 싫어했잖아.”

하진은 계속 싫어했다고 말하지만, 정말 정확하게 싫었던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게 싫기는 해도 그 일로 하진을 싫어하고, 정말 미워한 적은 없었다는 말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노력할 필요도, 깊게 생각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

“내가 아무 노력도 안 해도 형은 숨 쉬는 것처럼 내 옆에 있었고, 날 사랑했으니까.”

“…….”

“…그런데 형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순간부터 달라졌어요. 당연했던 게 사라지고, 있어야 할 곳에 형이 없고, 날 보지 않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말하고… 웃고, 연락하고… 만나고…… 나랑은 같이 있으려고 하지도 않고…….”

하진은 뒤로 갈수록 작아지고 떨리는 정우의 목소리에 제 눈을 보지 못하는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어떻게 생각했는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데 은근 그 안에 봐주지 않아 서운했다는 뉘앙스의 투정이 섞여 있어 한숨이 저절로 흘렀다.

“같이 있는 거 싫어했잖아.”

“싫어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

“…계속 자고 그러는 건 안 될 것 같은데 형이랑 같이 있고, 눈 마주치고 하면…….”

“하면?”

“……하고 싶어지고 솔직히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

“…그래서 자꾸 형 탓으로 돌렸어요. 그래야 내가 무결해지니까.”

얘를 어쩌면 좋지. 하진은 잠시 모든 감정을 잊고 정우를 마주했다. 차정우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처음 보는 어린 모습이었다. 겉모습이야 이미 데뷔 전부터 완성이 되어 또래보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생각도 깊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분명 미성숙한 부분이 있었다.

“형이 나를… 안 봐주는데… 겪어보니까 형 마음도 이랬겠구나 싶어서…….”

“겪어보니 어떤데?”

“…서운하기도 하고… 무시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나를 안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불안하고, 초조하고… 힘도 빠지고…….”

살짝 내려갔던 고개가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본 하진이 마시기 좋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지 않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정우의 얼굴에서 바닥으로 뭔가가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하진은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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