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휴게실 쪽으로 갈까. 정우는 한 걸음을 내딛다가 멈추었다. 전화가 와서 간 것을 아는데 그 가까이 간다는 것은 엿들으러 간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까지 하는 건데. 고개를 저은 정우가 다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
연습실 문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정우는 온통 휴게실 쪽으로 쏠린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다시 뒤돌아 복도를 걸어갔다.
휴게실 안에서는 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별 감정이 실리지 않은 평범한 목소리라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만약 들뜨거나 기쁜 목소리였다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었다. 정우는 휴게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하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진이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그래, 알았어. 이따 보고 알려줄게. 응. 그래.”
제가 들어와서 통화를 빨리 끝내는 것 같았다. 정우는 휴게실 안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어 이온 음료를 하나 꺼내 마개를 잡았다. 한쪽 손을 다쳐 제대로 쥐지도 힘을 주지도 못해 손이 헛돌았다. 그런 정우를 본 하진이 다가와 병을 가져가 마개를 열어주었다.
“고마워요.”
“이거 마시러 온 게 다야?”
“형이 생각하는 그대로예요. 이건 핑계고.”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랑은 눈도 잘 안 마주치면서 정문혁이랑은 따로 통화까지 하고, 그걸 못 참겠어요.”
다시 한숨을 내쉬는 하진을 본 정우가 들고 있던 이온 음료 병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정우야.”
“…네.”
“그 더러운 상상에서 나를 좀 빼주라.”
“…….”
“네가 하도 문혁이랑 나를 붙여대서 없던 정도 생기겠어. 내가 문혁이랑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짓거리라도 해야 덜 억울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정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 하나에 동요하지 않고 중심을 지키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제가 둘을 붙여 더러운 상상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걸 가감 없이 하진에게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기분 나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짜 하진이 마음이라도 먹은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오목하게 좁아졌다.
“그러길 바라고 하는 말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제발 신경 좀 꺼줘. 내가 뭘 하든 이러지 마.”
“나도 할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어요. 끄고 싶다고.”
더는 이야기를 나눌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하진의 시선은 냉랭했다. 정말 너무나도 냉랭해서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정우는 그나마도 저에게 닿는 시선이 기뻤다.
“그만하자. 여기 회사고, 누가 듣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상관없어요. 난 형이랑 얘기 더 해야겠어요. 지금 아니면 형 나랑 이렇게 있어 주지도 않을 거고, 나중으로 미룰 일도 아니니까 지금 할게요.”
“차정우. 그만 좀 징징대.”
“…….”
“도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다 때가 있는 거야. 나도 너랑 얘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고, 어떻게든 뭐라도 한마디 섞고 싶을 때가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잖아. 지금은 널 보는 것도 불편해. 네가 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통제하려고 들고, 이렇게 감시하듯 따라다니는 것도 싫어.”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더 솔직히 말해 볼까?”
거기서 더 솔직할 게 남아 있다니. 정우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하진을 눈에 담았다.
“줄 때 잘하지 그랬어.”
“…….”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였으면 지금 흔들렸을 텐데.”
“…….”
“단순히 서운하고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지금 네가 나 좋아하는 것처럼 구는 거 좋아서 미쳤을 거야. 나 그만큼 너 좋아했거든.”
“…….”
“팀이고 뭐고 하나도 안 보였어. 너만 보여서 나도 안 보였어. 내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했어. 난 너만 중요했어. 너만, 너 하나만. 네 관심 받을 생각, 내 몸이라도 좋아하게 하고 싶은 생각… 그거밖에 없었어.”
“…….”
“그런데 이제 아니야. 끝났어. 그래서 난 지금 네가 이러는 거 좀 웃기고, 징징대는 것처럼 보여. 사탕 달라고 울지 말고, 네가 알아서 찾아 먹든지 그만 울어. 사탕 사서 껍질 까고 입에 물려까지 줘야 울음 그칠 나이는 아니잖아. 먼저 갈게.”
그대로 휴게실을 나서는 하진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선 정우가 긴 숨을 내쉬었다. 말을 할 때마다 도돌이표라는 것을 아는데, 아니 차라리 그냥 도돌이표라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걸 아는데, 알고 있는데도 하진에게 말 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멀어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했다. 저는 더 오랜 시간 더 많은 날카로운 말들을 했고,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해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하진의 행동을 서운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게 맞았다.
“…그래.”
형이 이러는 건 당연한 거잖아. 너도 형 말 듣기 싫어했잖아. 같은 말만 한다고 계속 지겨워하고 말하는 사람 앞에 두고 쳐다보지도 않았잖아. 그래, 너도 그래 놓고 뭐 이런 거 하나에 매번 다쳐? 정우는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숨을 내쉬어도 꽉 막힌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
새 앨범 작업을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 목을 풀고, 몸을 푸는 것에 의의를 둔 연습이라 아주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진은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갈 준비를 하는 해성을 바라보았다. 오늘 약속이 다 몰린 날인지 인규와 영우도 연습이 끝나자마자 급히 나가서 연습실에는 셋뿐이었다.
“하진아, 나 이러고 가는 건 좀 없어 보이지? 그래도 명색이 아이돌인데.”
“친구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에요? 편하게 가도 되지 않을까요?”
“이게 원래 가까울수록 그런 걸 더 따져. 이것들이 나만 보면 아이돌 된 게 말도 안 된다고, 무대 의상 입고 오라 그러고 그런다니까. 이러고 가면 사이버 데뷔한 거 아니냐고 그럴 텐데.”
해성의 말에 웃은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옷 보이지도 않아요. 형은 일단 얼굴에서 딱 끝나잖아요.”
하진의 센스 있는 말에 감탄한 해성이 손바닥을 폈다. 하진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제 얼굴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흔드는 해성을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어휴, 예쁜 내 새끼. 형 갔다 올게. 밥 많이 먹고, 응?”
“네. 저도 친구 만날까 생각 중이에요. 오늘 빨리 끝나면 말한다고 했거든요.”
“문혁이?”
“네. 맛집 찾았다고 같이 가자고 하더라구요.”
“어, 맛있는 거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인 건데. 문혁이가 너 진짜 좋아하나 보다.”
해성이 볼을 꾹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놓아주는 것에 웃은 하진이 거울 속으로 느껴지는 시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숨기지도 않기로 한 건지 정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다음에는 진짜 제복 입고 가야지. 여기 견장 달렸던 거, 전에 우리 반응 제일 좋았던 그거. 오늘은 일단 술 마시러 가는 거니까 대충 가야겠다. 나 간다.”
멤버들에게 인사한 해성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연습실을 나섰다. 하진은 그런 해성에게 인사하고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정우의 시선을 느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문혁에게는 그냥 다음에 만나자고 할 생각이었다. 맛있는 것을 같이 먹으러 가자는 그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오늘은 별로 누군가를 만나 즐겁게 지내고 싶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갈 거예요?”
다음에 만나자는 말을 치고 전송을 한 순간 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휴대폰을 아래로 내리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혼자라도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대로 숙소에 가면 정우와 단둘이 있게 될 거고, 꽤 불편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하진은 정우가 물은 것에 답하지 않고 가방을 챙겨 그 옆을 지나쳤다. 연습실을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언제 오나 기다리는데 급히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진은 그대로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안으로 처박히듯 들어갔다.
“아!”
순간 너무 놀라 큰 소리가 다 터졌다. 고개를 든 하진이 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고 같이 탄 정우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숙소로 가요.”
“차정우.”
“아니면 같이 가요.”
“뭐? 어디를 같이 가자는 거야?”
“정문혁 같이 만나겠다구요.”
“네가 왜?”
“형이 정문혁이랑 둘이 만나는 게 싫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너 혼자 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린 하진은 또 성큼 뒤에서 다가온 정우에게 붙잡혔다. 하진은 뒤로 확 끌려가듯 움직였다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소속사 건물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밀고 나갔다. 택시가 오면 그냥 바로 타고 가버릴 생각이었다.
“가지 말라구요!”
“놔, 안 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가지 말라구요. 좀 가지 말라고! 전에는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못 만나서 안달인데요?”
어둠 속으로 정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진은 정우가 잡고 있는 가방을 확 놓아버렸다. 그리고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남방을 끌어 올렸다.
“다 잘못했다고? 그렇게 쉽게 나오는 말인지 몰랐네. 가방 가지고 가. 버려도 뭐 어쩔 수 없고.”
그대로 길가에 나간 하진이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정우가 그 뒤로 다가가 다시 하진의 팔을 잡았다.
“절대 못 가요.”
“놓으라고 했잖아!”
팔을 확 뿌리치며 뒤로 돈 순간 플래시가 터졌다. 순간 눈이 부셔 깊게 눈을 감았다가 뜬 하진이 몇몇 모인 팬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바보 같은 소리가 섞인 숨이 길게 흘렀다. 내막을 다 알 수밖에 없는 말들을 한 건 없는지 떠올려 보았다. 딱히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충분히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은 맞았다.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이 정확하게 찍히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저라고 추측하려면 팬들은 얼마든지 할 것이었다.
“…….”
하진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옆으로 다가가 그대로 가리며 저 멀리 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타요, 일단.”
소리 죽여 말한 정우가 앞에 선 택시 문을 열고 하진을 먼저 태웠다.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바깥 자리에 타 문을 닫았다. 몇몇 사생들이 뒤에 오는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로 나간 게 보였다.
“기사님, 일단 빨리 가 주세요. 가면서 어디로 갈지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뒤에서 차가 따라올지도 모르는데 따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러로 뒤를 보며 연예인이냐고 묻고는 종종 이 앞에서 손님을 태우면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는 기사님에게 짧게 그렇다고 대답한 정우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하진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형. 내가 사생 생각을 못 했어요.”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데? 나 막고, 괴롭히고, 화나게 할 생각?”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요.”
“뭐?”
“차라리 그렇게 형 말대로 태도나 일관적이면 좋겠다구요.”
늘 회사 근처에 사생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도 떠올리지 못하고, 늘 최우선으로 여기던 팀도 떠올리지를 못했다. 제가 그랬다. 머릿속에 정말 딱 하나뿐이었다.
“…….”
강하진. 정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냥 뒤에서 오는 평범한 차 같지만, 택시가 차선을 바꿀 때마다 똑같이 따라오는 차가 있었다. 집요하다고 생각한 정우가 기사님에게 숙소 위치를 말했다. 다행히 이런 일을 몇 번 겪어본 분이라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아 정우는 다시 조용해진 하진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숨은 얼굴이 보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내내 보던, 혼자 보는 거지만, 그래도 내내 눈에 담은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처음인 주제에 늦게도 깨달은 사랑이라는 것은 정우를 자꾸만 다른 사람처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