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지창이 형한테 말했어. 싸웠다고.”
“…….”
그런 말을 했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보는 정우와 눈을 맞춘 하진이 작게 한숨지었다.
“둘러댈 말도 딱히 없고,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한 상황이었잖아.”
“…….”
“잘 모르겠다고 해도 이상하고, 다쳤는데 말도 못 하고 내내 그렇게 밖에 있던 너를 어떻게 설명하겠어.”
“잘했어요. 형 말처럼 계속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도 이상했고.”
“형보다 내가 더 궁금해. 도대체 왜… 그러고 있었던 거야?”
“말했잖아요. 형 잘 것 같아서 깨우기도 그렇고, 다른 형들 방에 가기도 그렇고.”
“그게 지금 말이 되는!”
낮게 흐르던 하진의 목소리가 잠시 커지며 끊겼다. 하진은 확 일어난 마음을 누르며 심호흡했다.
“피가 그렇게 나고, 길게 찢어진 게 세 곳이나 되는데… 내가 깰까 봐 내내 그러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 그걸 나한테 이해하라는 거야?”
“이해 안 해도 돼요.”
“뭐?”
“나 원래 형이 이해 못 할 짓 많이 했잖아.”
“…….”
“그리고 벨 눌러서 형 부르고, 나 다쳤어 할 분위기 아니었잖아요.”
정우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인규 형 방으로 가서 자겠다는 저를 주저앉혔고, 대신 정우가 나갔었다. 분위기야 뭐 말로 굳이 할 필요도 없이 최악이었고. 저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쉽게 벨을 누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아침까지 된 줄 몰랐어요.”
“…….”
“생각도 다 못 했는데 형이 나와서 나도 놀랐어요.”
“무슨 생각?”
“형 생각.”
“…….”
“답을 찾으니까 형 생각이 났어요.”
“생각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안 나온다.”
아직도 정우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 없이 창백했다. 하진은 이런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어디였지. 어디였더라.
“그리고 답 같은 거 안 찾아도 돼. 중요한 거 아니잖아.”
“…….”
“이제 그런 거 나한테 안 중요해. 난 마음 정리하는 중이고, 아니… 덕분이라고 하면 좀 놀리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네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정리되는 중이야. 거의 다 됐어.”
“형.”
“정우야.”
“…네.”
“너 진짜 쉽게 변하는 거 알아? 어제랑 또 다르네.”
하진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화를 내고 나간 정우가 이렇게 다치고, 또 한풀 꺾인 사람처럼 구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분명 어제 방을 나가기 직전의 정우는 이러지 않았고, 그 모습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도 전에는 태도라도 일관적이었는데.”
“…….”
“너랑 이런 얘기 더 하고 싶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야. 지창이 형한테는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형이 이해할 수 있게 얘기했으니까 너도 이제 편히 쉬어. 아무래도 난 나가 있는 게 좋겠다.”
뭔가 더 이야기할 게 있어 보이는 정우를 본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을 나갔다. 정우가 찾은 답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전혀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지금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고, 괜히 마음만 복잡해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에 다 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일에는 풀어야 할 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답을 찾지 못하면, 그 답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었다. 뒤늦게 찾아봤자 그것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
“…….”
하진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단숨에 반병을 비웠다. 너무 차가워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속도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물 마시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어질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진은 조용히 의자를 빼고 앉아 식탁 위로 무너지듯 엎드렸다.
***
또다시 방에 혼자 남은 정우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 않은 것 같은데 멤버들은 도대체 이렇게 다쳤는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거냐며 화를 냈다. 아니, 화보다 걱정이었다. 울먹이던 해성과 영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우는 이제야 욱신대는 손바닥에 인상을 썼다.
하진에게 답을 말하지 못한 게 신경 쓰였다. 아니, 신경 쓰인다는 말로 될 일이 아니었다. 말했어야 했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답을 찾았다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게 그렇게 힘든 말인지 처음 알았다.
걱정이 묻은 얼굴이었지만, 하진은 전과 달랐다. 전과 다른 게 당연하지만, 솔직히 그 모습이 낯설었다. 다친 손보다 그런 하진의 시선이 더 아팠다.
다른 멤버들이 앞에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도 하진은 그 뒤에 있었다. 전이라면 가장 먼저 저에게 와서 말을 걸고, 손을 뻗었을 하진이 가장 멀리 있었다. 사소한 일인데, 그 사소한 장면에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
저는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이 그런 짓을 했었다. 차라리 하진처럼 한 걸음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면 솔직하게 보이기라도 했을 텐데, 저는 가장 가까운 곳을 내내 지키며 하진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여전히 아무런 문제도 없는 척을 하며 비수를 꽂았다. 스케줄 전에도 끝난 뒤에도 휘청거리는 하진을 비웃었다. 그깟 사랑 때문에 감정 컨트롤도 하지 못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하진의 얼굴은 늘 외롭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그 외로움도 비웃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여 가까이 다가가 그 어깨에 팔을 두르고, 웃으며 이름을 부르고,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워 올려보며 잠시 스치는 설렘마저 난도질했다. 제가 그랬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진은 그것들을 견뎠다. 그런 저에게 울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안겨들었다. 괜찮다고 눈물을 닦고, 그러면서도 또 기대했다. 기대하지 말라는 성의 없는 말에도 눈동자는 늘 기대를 품었다.
그게 싫었다. 하진 때문에 나쁜 새끼가 되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하진의 마음을 그렇게 짓밟기로 한 이상 제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과 시간들을 살아가며 직접 하진의 그런 세세한 마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시선과 말을 접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정우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저를 보는 하진을 눈에 담을 때마다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기대를 뿌리 뽑아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말했고, 더 사지로 몰았다.
“…….”
그랬는데, 내가 그랬는데 어떻게 그게 사랑일 수가 있지. 사랑이라면 어떻게든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멈칫하고, 머뭇대고, 후회에 미쳐 주저앉아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사랑인데, 사랑하는데 그렇게 하나도 모를 수가 있지. 도대체 어떻게. 얼마나 병신 같으면, 얼마나 멍청하면, 얼마나 사람 같지도 않으면.
정우는 자신을 마구 욕했다. 하지만 곧 그 난도질에도 의미를 잃었다. 제가 저를 이제 와서 난도질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
하진이 저를 경멸하고 있었다. 원망, 불신, 불편, 불쾌. 하진은 저를 사랑했던 기억조차 송두리째 뿌리 뽑아 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그 변화의 원인이 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겨도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말할 수 있을까. 다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올까. 이대로 방문을 열고 나가 이야기 좀 하자고 이 방으로 데리고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해질 것이었다. 역시 그런 놈,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놈, 어리고 한심한 놈.
하진이 저의 이런 말과 행동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쉽게 변한, 날마다 다른 저의 이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저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정우는 굳게 닫힌 문과 텅 빈 하진의 침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랑 이런 얘기 더 하고 싶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끝. 하진은 끝을 말했다. 회피가 아니라 선을 그었고, 그 선 밖으로 걸음을 옮겨버렸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았다. 정우는 순간 확 조여들며 고통스러운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상처가 눌리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바닥에 붙여둔 수술용 밴드의 하얀 거즈 위로 피가 물들었다. 놀랍게도 마음이 더 아팠다. 우습게도 마음이 이겼다. 정우는 실소를 터뜨렸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
지창과 멤버들은 며칠 쉬라고 했지만, 정우는 끝까지 괜찮다고 말하며 연습실에 나갔다. 다음 앨범 준비도 해야 하고, 내년에 할 투어 준비도 하려면 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진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대화를 할 기회를 잡고 싶었다. 이렇게 같이 있지 않으면 아예 대화를 할 조금의 기회의 틈조차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한국 미니에 실릴 곡들 준비하는데 정말 몇백 곡이 들어왔어. 한 번만 불러 달라고 난리가 났어. 정 안 되면 리얼리티나 너희 팬서비스 영상 풀 때 뒤에라도 깔아달래.”
“몇백이요? 대박.”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우쭐하지. 어디 나가도 그냥 다 난리가 나고, 외국 나가도 뒤집어지고, 손 하나 다쳤는데 실검 장악하고 그러니까 엄청난 위치에 오른 것 같지? 맞아. 너희 그런 위치야. 맞는데, 그래서 더 조심하고, 더 열심히 하고, 더 간절해야 해.”
보컬 트레이너의 말에 다소 풀어졌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트레이너는 정자세로 벌을 서듯 선 멤버들을 한 번씩 보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지금부터 그 몇백 곡 중에 정말 추리고 추리고 또 추려서 남긴 스무 곡 들을 거야. 가이드까지 전부 해둔 곡이고, 이 중에서 신곡 네 곡 들어갈 거야. 네 곡 들어가는데 왜 스무 곡이나 골라서 힘들게 하냐, 하겠지? 들어보면 알 거야. 너희 보컬 느낌, 랩 느낌, 안무 스타일에 따라 만든 곡이라 스무 곡 고른 것도 기적이야. 말은 이 정도면 됐고, 바로 시작한다.”
말이 좋아 스무 곡이지 열 곡이 넘어가자 슬슬 집중도가 떨어졌다. 다 각자 개성이 있기는 하지만, 곡들이 섞이다 보니 다 비슷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멤버들의 집중도가 떨어진 것을 본 트레이너가 열 번째 곡이 끝났을 때 음악을 정지했다.
“삼십 분 쉬자.”
트레이너가 연습실 밖으로 나가자 긴 한숨들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해성은 휴대폰 메모장을 보며 바닥으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난 세 번째 다크, 여섯 번째 블루, 아홉 번째 컴플리트 좋던데.”
“삼육구 하세요?”
“헐, 진짜. 헐, 이영우 소름. 그걸 아냐? 넌 몇 번인데.”
“난 이사팔.”
“도움이 안 되는 새끼.”
“네네.”
작게 웃음이 번졌다. 정우는 옆에 앉은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하진이 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은 어떤 거 골랐어요?”
“난… 세 번째 다크랑 여섯 번째 블루랑 여덟 번째 디졸브. 정우 너는?”
“어, 저도요.”
정우는 제 휴대폰 메모 앱을 하진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정말 3, 6, 8 숫자 세 개가 적혀 있었다. 하진은 그 화면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정우를 바라보았다.
“똑같네. 통했나 봐.”
“원래 형이랑 저 취향 비슷하잖아요.”
“그랬지.”
맞아, 응, 이런 대답이 아니라 그랬지. 과거형으로 답이 나오는 것에 정우는 마른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금세 거두어지는 시선을 다시 저에게 돌리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때 하진의 휴대폰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화면에 뜬 문혁이라는 이름을 본 정우가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을 나갔다.
“…….”
뭐야. 친구 전화 받는데 굳이 연습실은 왜 나가지. 정우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그런 하진을 따라 연습실 밖으로 나갔다. 저 앞에 휴게실로 들어가는 하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