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03화 (103/122)

#103

밤새 잠을 설친 하진은 결국 아침에 가까운 새벽이 되었을 때 몸을 일으켰다. 공연에 섹스까지 해서 피곤하기는 한데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답답한 마음에 자꾸만 뒤척이게 됐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그냥, 없던 시간이 되어도 좋으니 확확 눈에 보이게 지나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시간마저 하진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은 얼마나 느린지 보여주기라도 한다는 듯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느리게 흘렀다.

겨우 아침이 되었을 때, 인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하진은 옷을 갈아입으며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우랑 같이 조식 먹으러 내려오라는 말을 본 하진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정우? 같이 있을 텐데 왜. 아마 습관적인 말일 것이었다. 차정우와 강하진은 세트처럼 늘 묶여 있었으니까. 하진이 있는 곳에는 늘 정우가 있었고, 정우가 있는 곳에도 늘 하진이 있었다. 그래, 그랬었다.

내려갈게요. 짧게 답을 한 하진이 티 위에 가볍게 얇은 남방 하나를 걸치고 카드키를 챙겨 들었다. 형들이 또 따로 잔 거냐고 놀리듯 말할 텐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좀 난감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흔하게 벌어질 일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놀라겠지만, 그래도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면 알리는 게 나았다. 하진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

그리고 문을 연 순간 문 옆 벽에 기대어 선 사람에 심장이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진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인 사람이 정우라는 것을 확인한 하진이 빠르게 마구 뛰는 심장을 누른 채 숨을 뱉어냈다.

사람 놀라게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화라도 내고 싶은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져 마주친 게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어제 방을 나간 뒤부터 계속 이러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진은 완전히 방에서 나가 고개 숙인 정우 앞에 섰다.

“…너 계속 여기 이러고 있었던 거야?”

“…….”

대답하지도 않고, 고개를 들지도 않는 정우를 가만히 본 하진이 다시 물었다.

“밤새 이러고 있었던 거냐고. 네가 어제 몇 시에 나갔는데, 그리고 지금이 몇 신데 여기 이러고 있어?”

인규가 정우와 같이 내려오라고 보낸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습관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정우와 같이 있지 않아서 보낸 메시지였던 것이었다.

“너 인규 형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여기 이러고 있는 거야?”

“…….”

“아니, 그렇다고 여기서 밤을 새워?”

계속 말을 하는데 고개는 들리지 않고, 대답도 흐르지 않았다. 하진은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는 마음에 가만히 선 정우의 팔을 확 잡았다.

“차정우.”

“…….”

답답해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가 든 하진이 놀란 얼굴로 멈추었다. 뭔가를 본 것 같은데 제가 본 게 맞나 싶었다. 아니, 맞을 리가 없는데, 왜 새빨갰던 걸까. 하진은 피가 식는 기분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우가 서 있는 바로 옆 바닥, 연한 색의 카펫이 짙은 무언가로 얼룩져 있었다. 하진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피가 잔뜩 묻은 정우의 손을 보며 입을 벌렸다.

“…너…….”

“…….”

“너 손이… 정우 너 손이 왜, 왜…….”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차마 손도 대지 못한 하진이 조심스럽게 다리를 구부려 앉아 정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을 다친 건지 손바닥이 새빨갛고, 손가락을 타고 내려온 피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진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정우를 바라보았다.

“너 왜 이래, 응? 다쳤어? 언제, 언제 왜 다쳤어. 왜 이러고 있어!”

그제야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하진은 하얗게 질린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방을 나가기 전에 본 정우와 뭔가 달랐다. 다쳐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내 여기 있어 힘이 들어 그런 걸까. 아니, 뭔가 외부적인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다쳤으면 말을 해야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어?”

“형 잘 것 같아서요.”

“그걸 말이라고 해? 자도 깨워야지. 이렇게, 이렇게 피가 났는데 아프지도 않아?”

“아파요.”

“…….”

“아팠어요.”

“지창이 형한테라도 말을 했어야지. 방 어딘지 몰라?”

“형도 아팠겠다 싶었어요.”

“…뭐?”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진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지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찾는데 손이 벌벌 떨려 잘 찾아지지도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지창의 번호를 찾은 하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안 내려오고 뭐 하냐는 지창에게 정우가 다친 것을 알렸다.

“어쩌다가 다친 거야?”

전화를 끊고 심호흡한 하진이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정우와 눈을 맞췄다.

“아직 다 생각 못 했는데.”

“…….”

“벌써 아침이네요.”

“무슨 말이야?”

“형이 왜 이러나 솔직히 이해가 안 갔어요. 형이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물을 때마다 나도 궁금했어요. 도대체 형은 갑자기 왜 이러나.”

“…….”

“그런데 그 생각이 먼저가 아니었어요.”

힘이 빠진 목소리. 하진의 주변만 겨우 맴돌 만큼 낮고 작은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하진은 도대체 정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나, 그거부터 생각하는 게 맞았어요.”

“…….”

“형 말이 맞아요.”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나는 쪽을 한 번 본 정우가 다시 하진을 바라보았다.

“맞았어요.”

놀라서 달려오는 멤버들과 매니저의 목소리가 복도를 뒤덮었다. 하진은 정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저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제 말이 맞다는데, 맞았다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

SNS가 뒤집혔다. 실시간 트렌드는 차정우 손, 정우 손, 정우 아프지, 손 왜 다쳤, GetWellSoonJeongwoo 같은 정우에 대한 말들이 점령했고, 포털사이트 검색어 또한 차정우, 차정우 손, 차정우 부상, 차정우 수술 같은 말들이 가득했다.

지창은 공항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장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디서 다친 건지, 도대체 왜 그런 건지 묻는 심각한 목소리에 지창은 그냥 사고가 있었을 뿐이라며 최대한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정우는 저 때문에 열심히 변명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두기만 했다.

하진은 그런 정우를, 아니 여기저기 수술용 밴드가 붙은 정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아침에 호텔 방문을 열고 정우를 봤을 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건지, 손을 보는 것뿐인데도 소름이 끼쳤다.

매니저 형과 멤버들이 와서 바로 병원으로 이동했다. 한국이 아니라 무엇 하나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 기획사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주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피를 많이 흘렸고, 빨리 병원에 왔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말들이 전해졌다. 정우는 손바닥에 난 상처 세 곳을 봉합했다.

일본에서 아포제를 따라다니는 사생들이 병원에 들어간 정우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면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강하진에 이어 차정우까지 자살 기도를 한 게 아니냐는 말들이 너무나도 쉽게 나왔고, 그 말만 보고 아무렇게나 기사를 써댄 기자들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생각보다 더 크고 자극적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항으로 몰려온 기자들이 마구 사진을 찍어댔다. 기사 검색을 하면 정우의 손 사진이 얼굴 사진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과열된 분위기는 오히려 그 사진이 올라옴으로 식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가 손목이나 다른 곳도 아니고 손바닥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단순한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자체적으로 팬들이 정화를 하기 시작했다.

굳은 얼굴의 지창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정우에게 물으려 했지만, 인규와 해성이 그런 지창을 말렸다. 묻더라도 일단 애가 좀 쉰 다음에 묻는 게 좋겠다고 말리는 멤버들에 지창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아, 형이랑 얘기 좀 하자.”

“…네.”

숙소에 도착해 정우가 들어가는 것을 본 하진이 지창을 따라 지창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우가 아니면 그다음은 당연히 저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별로 당황스럽지 않았다. 하진은 진지하게 묻는 지창을 바라보았다.

“너희 같은 방이잖아. 몰랐다는 게 형은 이해가 안 되거든. 어떻게 된 상황이야?”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하진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핑계를 대도 의심만 깊어질 것이었다.

“싸웠어요.”

“누가?”

“…저랑 정우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지창을 본 하진이 말을 이었다. 또래의 남자 둘이 매일 붙어 지내다가 다툴 수도 있는 건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놀라는 걸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저랑 정우가 정말 너무나도 애틋해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정우가 인규 형 방에 가서 잔다고 나갔는데… 술 마시러 간 모양이에요. 거기서 다쳤고, 방 앞에 있었어요.”

“어디 방 앞에. 너희 방 앞에?”

“네.”

“다치고 밤새?”

“…그런 것 같아요.”

“미치겠네. 왜 싸웠어? 뭔데 그렇게 싸웠어. 아니, 안 그러던 녀석들이 같은 방 못 쓸 만큼 싸웠다니까 내가 이상해서 그래. 믿어지지가 않아, 솔직히. 너희 안 그랬잖아.”

“안 그랬었는데, 어제는 그랬어요. 형들 걱정할 것 같아서 말도 못 하고, 저랑은 싸워서 말도 못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정우 너무 혼내지 마세요.”

왜 싸웠는지 더 묻고 싶은 얼굴로 보던 지창이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너희도 사람이고, 몇 년을 붙어 있고 잘 지냈는데 한 번쯤 싸울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어. 화해는 한 거야? 심각한 거 아닌 거지? 쟤가 막 홧김에 저렇게 된 거는 아니지?”

“…방에서 그런 건 아니에요. 다쳤을 때는 같이 있던 게 아니라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진의 심기도 거스르고 싶지 않은 듯 지창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하진을 다독였다. 하진은 그저 지창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전부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너도 피곤하고 또 놀랐을 텐데 가서 쉬어. 정우 혼 안 낼게.”

“…네. 죄송해요, 형.”

“아니야, 아니야. 그룹으로 모여 살고 그러면 다들 그래. 너희가 이상했던 거지. 다른 그룹은 아주 온 멤버가 다 편 먹고 나뉘어서 치고받고 난리도 아니라더라. 그럴 수도 있지. 심각한 거만 아니면 돼. 됐어, 됐어. 가서 쉬어.”

지창에게 묵례한 하진이 방에서 나와 거실에 죄지은 사람처럼 있는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제 눈치를 보는 형들을 보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진은 소파에 앉은 멤버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미안해요, 형들.”

“아니야, 아니야. 우리한테 뭐가 미안해. 하진이 너도 놀랐을 텐데 좀 쉬어. 우린 대충 얘기 듣고 봐도 놀랐는데, 넌 얼마나 놀랐겠어.”

“…형들도 쉬세요.”

“그래. 얼굴이 아주 하얗게 질렸다. 쉬어. 푹 자.”

“…네.”

괜찮다고 어깨를 두드리고 안아주는 멤버들에게서 벗어난 하진이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

“…….”

벌써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바로 눈이 마주칠 줄도 몰랐다. 하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저를 보는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안 자고 있어. 힘들 텐데.”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혼났어요?”

“아니. 형들도 놀라서 그런 거지 뭐. 이런 적 없었으니까.”

하진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걸었다. 그리고 정우가 걸터앉은 침대 맞은편, 제 침대에 걸터앉았다. 통로가 좁아 긴 두 다리가 닿을 듯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하진은 빛이 쏟아져 들어와 정우의 얼굴을 비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밝고 어두운 얼굴. 너는 지금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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