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02화 (102/122)

#102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정우는 아래로 내려갔다. 원래대로라면 인규의 방으로 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자고 간다고 해야겠지만,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하진이 한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지금 다른 멤버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정우는 호텔 아래 와인 바로 내려가 사람이 없는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

뭔가 생각을 하고 싶은데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그 시작이 잡히지 않았다. 정우는 앞으로 놓이는 가느다란 양주병을 바라보았다. 얼음도 넣지 않고 그대로 잔에 따른 정우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팀 생각 안 해?」

하진의 말에 완전히 찔려버렸다. 잊고 있었다. 정말 잊고 있었다. 팀. 제가 그렇게도 지키고 싶어 했던 팀을 잊고 있었다. 오히려 하진이 팀 얘기를 할 때마다 듣기가 싫었다. 화가 났다. 저와 하진의 이야기를 하는데 왜 자꾸 팀을 끌어다가 놓고 얘기를 하는 건지 짜증이 났다.

“…….”

그런데 그 말들이 전부 제가 했던 말들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팀. 아포제를 지키는 것.

팀을 위해 울고 있는 하진에게 웃으라 말했다. 사람들이 보니까 웃으라고 짜증스럽게 말했었다. 형 때문에 내 꿈을 망가뜨리기 싫다고, 그깟 사랑이 뭔데 이제 막 시작한 내 꿈을 망치려 드냐고 마구 화를 냈다. 무시했다. 솔직히 하진의 사랑이 방해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지금 저는 왜 기쁘지가 않을까.

“…….”

드디어 팀을 지킬 수 있게 됐는데, 왜 이 순간에 팀을 잊은 거지? 정우는 다시 급히 술잔을 채웠다. 급한 움직임에 술이 잔 바깥으로 넘쳤지만, 정우는 그대로 잔을 들어 마셨다. 그렇게 몇 번이나 연달아 스트레이트로 잔을 비운 뒤에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강하진이라는 이름과 차정우라는 이름 사이에 다른 게 존재하는 게 싫었다. 그래, 솔직히 생각하지 못할 게 뭐가 있는가. 앞에 하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생각을 읽는 것도 아닌데. 왜 제가 저한테조차 솔직하게 보이지 못하는 걸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정우는 빈 술잔을 쥔 채 초점이 한 곳에 맞지 않는 시선을 떨구었다.

「너 나 좋아해?」

노골적이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목소리였다. 네가 그럴 리가 없다는 목소리. 네가 사랑을? 너처럼 어린놈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의 물음. 정우는 잔을 더 세게 쥐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말해 봐. 너 강하진 좋아해?

정우는 자신에게 스스로 물었다. 하진의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어도 제가 묻는 그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

빼앗기고 싶지 않아. 다른 놈이 그 마음을 가지게 되면 가서 죽여버릴지도 몰라. 정우는 하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웃고,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면서 몸을 만지면 더 안겨드는 하진을……!

순간 요란한 소리가 났다. 빈 잔은 정우의 손안에서 깨져 형체를 잃고 산산조각이 난 채 흐트러졌다.

한 번씩 바 곳곳을 살피고 다니던 지배인이 소리에 놀라 다가왔다. 그리고 앉아 있는 정우에게 괜찮은지, 무슨 일인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일어로 말하다가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정우는 가까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놀란 얼굴을 한 일본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들리지 않던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제야 손이 뜨거운 느낌이 났다.

정우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바라보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게 더 이상했다. 정우의 덤덤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지배인이 서둘러 정우를 일으켜 세웠다. 정우는 저를 잡은 남자의 손을 놓게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전부 빼내어 쥐었다. 아주 작게 부서지지 않고 크게 몇 등분되며 깨지는 유리잔이라 파편이 묻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짧게 괜찮다고 영어로 말한 정우가 자리를 벗어났다. 지배인이 몇 번이나 쫓아와 말을 했지만, 정우는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손은 아프지 않았다.

「형이 날 다시 좋아하면 좋겠어요.」

「이런 너를?」

경멸에 가깝던 하진의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랐다. 그토록 밀어내고 그 감정 자체를 무시하던 제 입에서 다시 좋아하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저도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하진이 저를 좋아하는 것은 하진이 말했던 것처럼 저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 가만히 있어도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의 이 시간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그냥 그런 너무나도 당연히 흘러가는 일.

“…….”

당연해야 할 일이 당연하지 않아진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해가 떠야 하는데 뜨지 않고,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내내 고여 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노력하지 않아도 하루는 흐르고,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달은 뜨며,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시간을 보냈다.

딱 하나, 하진만 제외하고.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토록 멈추기를 바랐던 하진의 사랑이 정말 멈춰버린 순간, 더 활발히 돌아가야 할 모든 것들이 삐거덕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우는 반쯤 피로 물든 티슈를 든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생각했다.

“…….”

어디로 가야 할까. 아마 하진은 잠들었을 것이었다. 편히 자라고 그 방을 나온 이상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카드키도 없고, 들어가려면 벨을 눌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하진이 잠에서 깰 것이었다. 그럼 다시 인규 형 방으로 간다고 할 거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우는 하진이 있는 방이 아닌 인규가 있는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

결국, 정우는 하진과 저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닫힌 문 옆으로 기대어 섰다. 복도는 조용하고 따뜻했다. 닫힌 문 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제가 내려간 사이 하진이 방을 나간 건 아닐까 순간 날카로운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정말 미친놈이 되어버렸다.

「형이 날 다시 좋아하면 좋겠어요.」

진심 또는 자존심.

「이런 너를?」

진심.

거기서부터 잘못됐다. 정우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고개를 숙였다. 묵직한 감정들이 생각을 짓이기며 쏟아졌다.

“…….”

하진이 떠올랐다. 예쁜 목선, 부드러운 몸과 목을 끌어안을 때 나는 부드러운 향기 같은 섹스의 순간이 아니라 그냥 저를 바라보는 어느 날, 하진의 모습이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면 초점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눈으로 저를 가만히 보고 있던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던 그 얼굴이, 그 눈빛이 떠올랐다. 저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본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하진의 감정의 깊이, 무게, 농도 같은 것은 알고 싶지 않았다. 골치가 아플 뿐이니까. 그저 예쁘게 안겨들 때 나쁘지 않은 딱 그 정도를 원했다.

「이런 너를?」

그래, 이런 나를?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말라고, 부탁이라고 저에게 매달리며 울던 그 얼굴을 보면서도 사랑이라는 게 참 구질구질하다 느낀 제가 이제 와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가지고 있던 게 사라지고 나니 갑자기 사랑이 되어버린 걸까.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생겨나기도 하는 걸까.

「이거 다 내가 너한테 하던 짓이잖아.」

하진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듣고 싶지 않았다.

「네가 다른 사람 얘기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고,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숨도 못 쉬겠고, 네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한테도 해줄까 봐 겁이 나고… 머릿속에 계속 네가 다른 사람을 만지고, 사랑하는 생각이 들고.」

하진이 다른 사람과 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만 봐도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팬이라고 다가와 어깨를 감싸고, 얼굴을 가까이 한 채 웃는 모습만 봐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호텔로 같이 돌아가지 않고 둘이 만나면 어쩌지. 순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거절하는 법도 잘 모르고, 좋다고 가까이 닿아오는 새끼들을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진의 말처럼 별 더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내가 나를 갉아먹는 거야. 일어나지도 않을 상상을 해대면서. 그래서 자꾸 너한테 매달리는 거지. 네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 가지지 못하게 내가 더 잘해야 하니까. 섹스할 때도 지치면 안 되고, 널 더 기분 좋게 해줘야 하고… 부끄러움도 없고, 적극적으로 너 기분 좋게, 나를 보면 네가 섹스라고 하고 싶어지게.」

저를 보면 날카롭게 구는 그 모든 것을 녹이고 싶었다. 하진이 저와 섹스하는 동안만이라도 저에 대한 원망을 잊었으면 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몰아붙였다. 틈을 주면 금세 차가워질 것 같아 내내 뜨겁게 만들려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저와의 섹스가 좋아 한 번이라도 더 먼저 다가오게 만들기 위해 시선도 손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정우야.」

그런데 차정우. 너 왜 그러는데.

「말했지만, 미안한데 그거 사랑 아니야. 착각이야. 가지고 놀기 쉽던 애가 이제 안 대준다니까 화난 거야, 너. 불편한 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아니. 틀렸다. 다 맞는데, 그 말은 틀렸다.

「굳이 잘 보호 안 해도 내 옆으로 알아서 굴러들어오던 거 그래서 잘 가지고 놀던 게 이제 알아서 옆으로 오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놀 수 있게 되니까 너 짜증 나는 거야.」

맞아. 짜증 나. 열 받아 죽어버리고 싶어. 보는 앞에서 머리로 호텔 유리라도 다 깨고 떨어져 죽어버리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아.

“…….”

왜?

하진은 또 그렇게 물을 것이었다. 왜? 그러니까 도대체 왜.

“…….”

다른 사람이 하진에게 손을 뻗어서? 하진이 그것들과 어울려서? 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아서? 아니, 아니……. 이유가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게 정확한 이유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도대체 왜?

긴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밝게 웃는 얼굴. 연습생들 사이로 그 얼굴을 본 순간부터 항상 모든 기억은 시작됐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가르쳐 준 걸 틀리면 혼날까 봐 보며 웃는 그 예쁜 얼굴. 중요한 일이 있어 가야 한다고 하면 서운하게 변하는 얼굴을 볼 때면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어졌고, 솔직히 가야 하는데 가지 않은 적도 많았다. 하진과 연습하기 위해서.

같이하고 싶었다. 같이 있고 싶었다. 다른 놈들이 하진과 실장을 엮어 더러운 말을 할 때마다 화가 났다. 저와 묶어 말을 할 때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왜 그때는 화가 나지 않았을까.

눈을 뜨니 보이는 하진의 얼굴. 저에게 바짝 몸을 대고 입 맞추던 그 얼굴. 참지 못하고 작은 혀를 마주 문지르며 열에 취한 순간. 그것은 불쾌감이 아니었다.

감정을 받아줄 마음은 없었지만, 그 감정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저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지속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지루한 일이기도 했고,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기도 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진은 늘 저를 보고 있었다.

손을 움직이면 알아서 다가와 안겼고, 가만히 보기만 해도 몸이 달아 안겨들었다.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해 달라고 애원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진의 사랑은.

끝내라는 말을 할 때도 진짜 산산조각이 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하진이 약을 먹고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중에 선택한 게 연애를 해주겠다는 가장 최악의 말이었지만, 살아 숨 쉬는 하진을 보고, 입 맞추고 돌아가던 밴 안에서 다행이라는 생각 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

그런데 왜 그랬어? 그 당연한 너의 안도가 무슨 짓을 했어? 네가 무시한 게 뭐야. 밀어내고, 한심해하고, 가지고 놀았잖아. 왜 그랬어?

부드러운 복도가 날카로운 시선들로 변했다. 모두가 저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냅킨을 쥔 손에서 아픔이 밀려들었다. 연거푸 술을 들이켰는데도 취하기는커녕 그 애매한 술기운이 생각을 부추겼다. 평소라면 그냥 피하고 말았을 깊은 곳에 누른 것들까지 다 꺼내어 눈앞에 놓아버렸다.

정우는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너…… 왜 그러는데. 더는 질문의 답을 피할 수가 없었다. 고요한 복도, 움직임과 시간이 모두 멈춘 것 같은 이 순간, 앞과 뒤, 위와 아래, 그리고 바깥과 안.

“…….”

모든 게 하진이었다. 피할 수가 없었다. 정우는 초점 없이 맞은편 벽을 바라보던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결국 ‘왜’와 마주했다. 저절로 답이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 복도를 가득 채우고, 결국 정우의 머리끝까지 채우며, 그렇게 가득. 그 결박 속에서 정우는 대답했다.

처음이라 몰랐던 것, 당연해서 잊었던 것, 꿈보다 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사라질 일이 없으니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 하지만 다 잃어버린 후에야 고개를 든 것.

저의 ‘왜’는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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