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01화 (101/122)

#101

역시 스스로 뒤를 정리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티슈로 닦아내는 것으로 해결을 해보려 했지만, 결국은 손가락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읏…….”

손가락이 들어가는 것도 또 질척한 것이 밀려 나오는 것도 괴로웠다. 차라리 정우가 해준다고 할 때 해달라고 놔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진은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 인상을 썼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가 몸 여기저기를 때렸다. 하진은 한참이나 사투를 벌인 끝에 더는 정액이 나오지 않는 뒤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다 됐다고 생각을 한 바로 그 순간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갑자기 그냥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정우가 있다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미웠다. 정말 미워져 버렸다. 멈칫대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하진은 이제 더는 정우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저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말도 듣고 싶지 않고, 너 내가 만져주는 거 좋아하잖아, 말하는 그 눈도, 목소리도, 손길도 다 싫었다.

“…….”

그냥 투정 부리는 거잖아. 몇 번 더 만져주고, 달래주면 결국 풀릴 거잖아. 그렇게 좋아했는데 하루아침에 마음이 사라진다는 게 말이 돼? 너 아직도 나 좋아하잖아.

정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동자도 손길도 그리고 행동과 하는 말 모두가 결국 그 의미였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이제 좀 풀어. 자꾸 그러면 재미없어. 알았어, 알았어. 한 번 더 사과할게. 이게 뭐 어렵다고. 미안해, 실수였어. 이제 화 좀 풀렸어?

정우에게 진짜가 아니라는 말을 듣기 전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제가 차정우라는 사람에게 내내 마음 졸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거고, 미안하다는 그 설레는 목소리에 결국 두 팔을 벌렸을 것이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나 이제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 그 얼굴을 보고 웃었겠지. 그동안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며 웃지 못해 너무 슬펐다는 듯.

그런 것도 사랑일까. 하진은 샤워부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따뜻한 물줄기가 바닥으로 쏟아지며 하진의 몸을 적셨다. 얼굴로 증기가 덮이고, 작은 물방울들이 눈물 위에 붙어 더 무겁게 만들었다. 눈물은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더욱 빠르게 쏟아졌다. 흐른 길 위로 또다시, 그리고 또다시.

「형이 날 다시 좋아하면 좋겠어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정말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화가 났다.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이 눈물도 슬픔보다는 괴로움에 더 가까웠다.

「형이 다시 나한테 매달렸으면 좋겠어.」

말 잘 듣는 애완견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오고, 또다시 와 매달리는 충성심 강한 애완견. 그런 무조건의 사랑이 사라지자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꼬리를 흔들어야 하는데 흔들지 않으니 어라? 싶어 이제야 살피기 시작했다는 게 너무나도 잘 보였다. 하진은 흠뻑 젖은 얼굴을 손으로 아무렇게나 문지르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거품을 내 몇 번이나 몸을 씻고, 또 씻었다. 욕실이 온통 뿌옇게 변하고, 향긋한 바스 향으로 가득 찰 때까지 머문 하진이 물기를 닦아내고 샤워가운을 걸쳤다. 고작 끈 하나 허리에 묶는 것뿐인데도 손이 덜덜 떨렸다. 그만큼 힘이 빠진 상태였다.

“…….”

길게 숨을 뱉은 하진이 욕실을 나섰다. 밖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침대가 있는 쪽으로 가자 옷을 다 입고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정우가 보였다. 하진은 무심히 닿은 시선을 거두며 제 침대를 바라보았다. 꽤 격렬했던 섹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잔뜩 구겨지고 젖어 있는 게 보였다. 도저히 여기서 자고 싶지 않았다.

“형 방에 가서 잘게. 여기서는 못 자겠다.”

하도 소리를 내서 그런 건지, 울어서 그런 건지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하진은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문지르고, 옷을 입기 위해 가운 끈을 잡아당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도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굳이 묶지 않았어도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허탈해졌다.

“내 침대 써요.”

“넌?”

“난 잠도 안 오고, 안 자도 돼요.”

“아니야. 내가 형 방에 가서 잘게. 편히 자.”

창밖에 닿아 있던 정우의 시선이 하진에게 닿았다. 하진은 저를 노려보는 것 같은 정우를 빤히 보다가 갈아입을 옷을 집어 들었다. 시선의 영역에서 벗어나 다시 습한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도 정우는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쩡한 침대 쓰라는데 굳이 거기를 왜 가는데요.”

“네 배려 받기 싫어서.”

바로 대답하는 하진을 어이없다는 듯 보던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하진은 휴대폰과 카드키 하나를 챙겨 들었다. 당장 정우와 멀어지고 싶었다. 더 같이 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진은 저를 죽일 것처럼 바라보며 제 앞에 다가와 선 정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누르고 있는 만큼, 정우도 뭔가를 꽉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지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눈빛.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애의 치기. 하진은 억눌린 목소리를 내는 정우를 피하지 않았다.

“있으라고.”

“…….”

“하잖아요.”

“싫다고.”

“…….”

“했잖아.”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닿은 시선도 그 시선 사이에 공기를 서로 당기는 침묵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

“좋아요.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 보라고 이러는 거죠. 내가 형 다른 방 가고, 다른 사람 만나고 그러면 미친놈처럼 구는 거 알고 이러는 거잖아.”

“아는구나. 너 미치는 거.”

하진은 구겨지는 정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면 고쳐.”

“…….”

“애처럼 굴지 말라고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었지. 정우야. 애처럼 왜 이래. 너 나 없으면 못 자? 분리 불안이라도 생긴 거야?”

“뭐라고?”

“내가 지금 인규 형 방에 가서 형이랑 네 더러운 생각처럼 뒹굴든 무슨 짓거리를 하든 상관하지 말라는 말이야.”

하진은 그대로 돌아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쥔 그 순간 강한 힘에 확 이끌렸다. 비명이 저절로 터질 만큼 센 힘이었다. 몸을 바로 하려고 해도 도저히 세울 수가 없을 만큼 강하고 거칠었다. 하진은 그렇게 끌려갔다. 그리고 정우의 흐트러지지 않은 침대 위로 던져졌다. 힘이 얼마나 센지 침대 위로 넘어지는 순간에도 침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하진은 순간 찾아든 충격에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머리와 마음이 동시에 마구 흔들렸다.

“가만히 좀 있어요.”

“차정우!”

“씨발, 좀! 좀 가만히 좀 있으라고!”

큰 소리를 낸 정우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얼굴을 한 손으로 덮은 채 치솟은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런 정우를 보던 하진이 몸을 일으켰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어깨를 잡아 다시 침대에 주저앉혔다.

“내가 가면 될 거 아냐.”

“뭐?”

“내가, 내가 간다고. 내가! 내가 꺼져줄 테니까 여기 있으라고!”

“…….”

“난 형 말대로 더러운 생각밖에 못 하는 새끼니까! 내가 간다구요. 형은 여기 남아서 깨끗한 생각 하다가 자요. 됐죠. 어? 됐어요?”

하다 하다 이제 자기가 인규 형 방으로 가겠다는 정우를 올려본 하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하진의 실소를 본 정우가 전혀 웃지 않는 얼굴로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왜. 어이없어요? 나도, 나도 그래요.”

“…….”

“나도 지금 내가 어이없고,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요. 여기 있으라고.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좀!”

“…….”

하진은 제 어깨를 쥐고 누르는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플 만큼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정우의 고개가 아래로 기울어졌다. 숨과 함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목소리는 하진에게 그 어떤 흠집도 내지 못할 만큼 약했다.

“…있어요.”

명령보다는 부탁, 아니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항복 같기도 하고, 포기 같기도 했다. 하진은 손에 든 휴대폰과 카드키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깨를 쥔 정우의 손을 치웠다.

“그럼 빨리 가 줘. 자고 싶어. 형한테는 알아서 잘 말하고. 형 눈치 빠른 거 알지. 나는 뭐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네가 알아서 잘해. 할 말 없으면 솔직히 말해도 되고.”

“솔직히 말하라구요?”

“그래.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난 이제 너랑 같은 방 쓰는 것도 불편한데.”

상처 받은 눈. 순간 정우의 눈동자를 스친 것은 분명 상처였다. 하진은 아주 섬세하게 변하는 정우의 표정을, 그 안을 지배하는 감정을 전부 바라보았다. 단 하나도 허투루 흘리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언젠가 알게 될 거면 알아야죠.”

“그런데 정우야. 나는 몰라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정우를 향해 하진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하는 말이었다. 차정우라는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거니까. 지키고 싶어서 다른 것들을 주저앉혔으니까. 그렇게 중요하고, 그렇게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을 왜 지금은 생각하지 않는 건지 알고 싶었다. 아니,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지금 뭘 잊고 있는 건지 알고 있냐고.

“더 적극적으로 이유를 찾아야지. 어떻게 말해야 인규 형이 의심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

“팀 생각 안 해?”

상처가 스쳤던 눈동자 위로 이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 충격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정우가 팀을 잊고 있었다. 무조건 최우선에 두었던 팀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한편 우습고, 또 한편 전율이 일었다. 하진은 동시에 여러 감정을 느끼며 정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알게 되는 것도 피곤할 만큼 힘이 없었다.

“가.”

“…….”

하진은 우뚝 선 정우를 보지 않고 이불을 들어 올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일부러 정우가 선 쪽을 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자 덜 마른 머리칼에 남은 물기가 베개 커버로 옮겨가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꺼졌다. 먼 곳에 있는 스탠딩 스탠드 하나만 켜진 건지 방 안은 잠들기 좋게 적당히 어두워졌다.

“…….”

발소리가 멀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차정우라는 이름을 떠올리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힘이 없는 소리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 하진의 감긴 눈꺼풀이 움찔댔다. 그리고 문이 닫혔을 때 잠이 전혀 묻지 않는 눈꺼풀이 올라갔다. 그 안에 숨어 있던 눈동자는 욕실에서처럼 젖어 있었다.

“…….”

정우에게 상처 주며 저도 상처를 받았다. 뒤늦게 알게 된 감정들을, 잘못된 것들을 소리 내어 말할 때마다 지난날의 사랑이 얼마나 기형적이었는지 마주하게 되어 너무 아팠다. 그래도 가지고 싶었고, 그래도 이어가고 싶었던 사랑이 이제는 전부 날카로운 것들로 변해 닥치는 대로 모든 것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끝. 정말 끝내고 싶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이 모든 괴로움을 떨치고 싶었다. 하진은 축축하게 젖은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발작 같은 감정이 한 번씩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때는 그냥 울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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