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99화 (99/122)

#99

정우의 손이 들어와 피부에 닿은 순간 하진의 허리가 비틀렸다. 이런 식의 닿음이 오랜만이기도 하고, 이렇게 조용하고 중요한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몸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읏, 미쳤어?”

숨과 뒤섞인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바깥에 누가 있다는 것을 알아 이 순간에도 목소리를 낮춰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진은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더 강하게 밀착해 오는 정우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만, 그만 좀… 흣….”

기대고 있는 화장실 벽이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힘이었다. 저를 벽으로 완전히 가두며 정신없이 귓가와 목덜미를 입술로 머금는 정우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진은 세면대 쪽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에 다시 정우를 말리기 위해 열었던 입을 닫았다.

“그만 못 하겠어요.”

숨과 뒤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쏟아졌다. 하진은 정우의 목소리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와 아랫배로 확 떨어지는 느낌에 몸을 움찔거렸다.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도, 이제는 허리 위로 올라와 유두를 만지기 시작하는 손끝도 전부 너무 뜨거워 머릿속이 깜빡거렸다.

“흐읏…!”

유두를 집어 비트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고 감각이 확 피어올랐다. 하진은 저도 모르게 터진 신음에 뒤늦게 입술을 깨물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정우가 고개를 들어 그런 하진을 바라보았다.

“…….”

“…….”

저를 노려보는 얼굴이 예뻤다. 고급스러운 화장실 특유의 그리 밝지 않은 약간 붉은 빛의 조명이 하진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얼굴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지는 음영조차 예뻤다. 정우는 이렇게 얼굴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마 누구라도 저처럼 할 것이었다. 물론 지금 제가 선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원망과 화가 뒤섞인 눈동자, 노골적으로 떨어지는 불빛에 보드랍게 보이는 솜털, 제 침으로 젖은 입술과 흐트러진 셔츠.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니, 하진은 원래 예뻤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건 변한 적이 없었다.

“…….”

전이라면 그냥 여기서 끝이었다. 하진이 예쁘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예쁘다는 것 하나로 하진의 마음을 받고, 사랑하게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너지는 순간까지 아름다운 이 얼굴이 덤처럼 느껴진 적은 있지만, 그게 모든 것을 지배해 뒤흔든 적은 없었다.

“손 빼.”

“…….”

“대줄 수는 있는데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말을 왜 그렇게 해요.”

“네 행동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돼.”

소곤대는 소리 안에도 날카로움이 묻어 있었다. 정우는 고개를 기울여 말이 흐르는 하진의 입술을 한 번 빨았다. 고개를 돌려 피하는 그 턱을 쥐어 다시 입술을 빨고 또 빨았다. 결국, 혀가 깊게 파고들고 한참이나 뒤섞였다. 밀어내는 것도 포기한 것처럼 가만히 있는 하진을 보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정우는 지난날의 하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회식을 하고 하진이 술에 취해 지금처럼 화장실에서 마주했던 그 날, 하진은 저를 끌어당기고 적극적으로 닿아 왔었다.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저였다. 닿아 오는 입술과 간지러운 혀에 참지 못하고 입속을 잔뜩 헤집었던 기억이 났다.

“…….”

지금과는 달랐다. 하진은 뜨거웠고, 저를 안았었다. 애원하는 목소리, 느릿하고 달콤하게 퍼지던 간지러움.

왜 사라진 다음에 그 빈자리를 알게 되는 걸까. 정우는 저를 먼저 당기지도 않고, 저에게 혀를 먼저 움직여 주지도 않는 하진의 입속을 보란 듯이 더 깊고 거칠게 헤집었다. 목에서 앓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삐뚤어진 승리감에 도취되는 것만 같았다.

무너뜨리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지점을 딱 한 번만 선택할 수 있다면 정우는 얼마 전, 술에 취해 저에게 매달리던 하진과 마주하던 그때로 돌아갈 것이었다. 물론 돌아가서 더 좋을 지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예 연습생 시절로 돌아가 새로운 연습생으로 온 하진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렇게 엮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까도 둘이 대기실 구석에 딱 붙어 서서 웃고, 얼굴 보고, 속삭이고.”

정우의 목소리가 하나씩 무언가를 짚어낼 때마다 하진의 단추가 하나씩 풀렸다. 정우는 작은 단추를 풀어내는 손끝에 필요 이상의 감정을 실었다. 시끄러운 대기실 구석에 둘이 서서 뭔가를 속삭이고 웃던 하진과 그 댄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지. 내가 누구랑 뭘 하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나도 상관 안 하고 싶어요. 형 같은 거한테 관심 끄고 싶다고. 그런데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씨발 안 된다고.”

“왜?”

내리깔린 어둑한 조명이 하진의 목소리를 더 아래로 확 당겼다. 하진의 목소리는 정우의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왜, 왜… 그놈의 왜. 하진은 다 알고 있었다. 왜? 라고 물으면 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춤대고 결국 병신같이 물러선다는 것을.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늘 저에게 왜?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오늘도 제가 답을 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우는 하진의 목 끝에 잠긴 단추를 마지막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셔츠와 재킷 한쪽을 같이 잡고 뒤로 넘겼다.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어깨가 붉은 조명 아래 드러났다.

“너 나 좋아해?”

“…….”

대답은 하진의 입에서 나왔다. 정우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하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뭐? 라고 되물을 힘도 순간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잖아. 이거 다 내가 너한테 하던 짓이잖아.”

“…….”

“네가 다른 사람 얘기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고,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숨도 못 쉬겠고, 네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한테도 해줄까 봐 겁이 나고… 머릿속에 계속 네가 다른 사람을 만지고, 사랑하는 생각이 들고.”

“…….”

“내가 나를 갉아먹는 거야. 일어나지도 않을 상상을 해대면서. 그래서 자꾸 너한테 매달리는 거지. 네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 가지지 못하게 내가 더 잘해야 하니까. 섹스할 때도 지치면 안 되고, 널 더 기분 좋게 해줘야 하고… 부끄러움도 없고, 적극적으로 너 기분 좋게, 나를 보면 네가 섹스라도 하고 싶어지게.”

그쪽으로 생각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싶지는 않아 내내 뒤로 밀고 또 밀었던 말이었다. 말이 안 되는 거니까. 그렇게 제가 좋다고 하진이 매달릴 때는 들지 않던 생각이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든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정우야.”

“…….”

“말했지만, 미안한데 그거 사랑 아니야. 착각이야. 가지고 놀기 쉽던 애가 이제 안 대준다니까 화난 거야, 너. 불편한 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

“굳이 잘 보호 안 해도 내 옆으로 알아서 굴러들어 오던 거 그래서 잘 가지고 놀던 게 이제 알아서 옆으로 오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놀 수 있게 되니까 너 짜증 나는 거야.”

“형 말도 일리는 있어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정우는 피하지 않고 고개를 기울여 하진과 더 깊게 눈을 맞추었다.

“짜증 나는 것도 맞고, 형이 나는 무시하고 다른 새끼들이랑 웃고 떠들고 가까이 있는 거 보기 싫은 것도 맞아요. 그런데 형.”

“…….”

“그건 전에도 그랬어요.”

“…….”

“내가 왜 형이랑 둘이 남아 연습하고 그랬는데.”

“…….”

“다른 놈들이 형이랑 하는 게 싫으니까. 형이 나 좋아한다고 한 뒤에도 난 계속 그랬어요. 형이 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그래서 내가 형 어이없어하는 건 둘째 치고, 유세주 같은 새끼들이 껄떡대고, 선배라는 개새끼들이 한 수 알려주네 뭐네 하면서 형 팔 잡고, 어깨 안고, 허리까지 감쌀 때 내가 그냥 넘어간 적 있어요?”

사랑하는 감정과 하진이 다른 놈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는 감정은 다른 것이었다. 정우는 늘 하진이 다른 사람과 있는 게 싫었다. 단순히 인간적인 호감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마음을 나누려고 하는 자체가 싫었다.

“착각은 뭔 착각이야. 난 원래 그랬어.”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사랑은 네가 하고 싶은 사람이랑 따로 하고, 난 나대로 손에 쥐고 너랑만 섹스하고 너만 보면서 살게 두는 거?”

“형이 날 다시 좋아하면 좋겠어요.”

“이런 너를?”

정우가 방심한 틈을 타 하진은 그대로 정우를 밀어냈다. 벽에서 등을 뗀 하진이 한쪽 어깨 뒤로 넘어간 셔츠와 재킷을 앞으로 당겨 제대로 입었다. 그리고 전부 다 풀린 단추를 위에서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형이…….”

중얼대듯 입술을 달싹인 정우가 단추를 반쯤 잠근 하진에게로 다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버클을 풀며 속옷 안으로 한 번에 손을 밀어 넣었다.

“흐읏!”

발기하지는 않았지만, 살짝 열이 오른 하진의 성기를 쥔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하진이 정우의 어깨를 밀어내다가 밀리지 않자 등을 때리고,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정우는 떨어지지 않았다.

“읏…….”

야릇한 기분은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진은 너무나도 익숙한 정우의 손길과 흥분할 수밖에 없게 만지고 주무르는 그 움직임에 어찌할 도리가 없이 흥분했다. 성기가 저릿해지고, 아랫배가 당겼다. 우습게도 구멍이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박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끔찍한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덜미에서 얼굴을 들어 올린 정우의 시선이 닿아왔다. 눈을 일부러 맞추지 않았다. 곧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문 그 위로 정우의 혀가 부드럽게 닿아왔다. 하진은 다리 사이를 만져주며 입술을 핥는 이 상황과 또 저희의 관계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움에 고인 숨을 탁 뱉어냈다.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정우의 혀가 미끄러지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형이 다시 나한테 매달렸으면 좋겠어.”

“하읏!”

정우의 손가락 하나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꽉 다물린 뒤로 파고든 순간 하진의 고개가 젖혀졌다. 정우는 하진의 매끈한 목을 혀로 핥아 올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반쯤 빠져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푹 깊게 들어간 순간 진동 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하진의 안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으, 읏…….”

“어쩌죠. 지금 간다고 밖으로 나오래요.”

“…….”

안을 휘젓듯 손가락을 꽂고 움직이던 정우가 손가락을 빼내며 몸을 떼어냈다. 하진이 그대로 정우의 뺨을 후려쳤다. 꽤 날카로운 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한 번만 잡아달라고, 떨어지면 죽는다고 내내 소리치면서 매달렸잖아. 그렇게 오래 매달려 있는 동안 제발 떨어지라고 밀어놓고 뭐? 매달렸으면 좋겠어?”

“…….”

“그때 죽어버릴걸. 그랬으면 네가 찾아와서 알량한 희생도 안 했을 텐데.”

하진은 잔뜩 흐트러진 옷을 매만지고 문을 열었다. 정우의 뺨을 친 손이 화끈거렸다. 손은 멈춰 있는데 계속 정우의 얼굴을 때리는 기분이 났다.

“나와. 언제 끝날지는 몰라도 끝나기 전까지는 팀에 최선을 다해야지.”

열린 문 안에서 나오지 않는 정우를 돌아보지 않고 말한 하진이 먼저 세면대로 가 차가운 물을 세게 틀었다. 그리고 정우의 목소리와 온기, 그리고 아직 가시지 않은 쾌감이 묻은 손을 담갔다.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아주 말끔히 씻겨 사라지기를 바라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