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스케줄은 정해진 대로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겉보기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멤버들은 웃었고, 그런 멤버들을 보는 사람들은 즐거웠다. 한국 최고 아이돌의 데뷔 무대라며 열도가 흔들렸다. 데뷔 쇼케이스 전 열린 기자회견 역시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쇼케이스 또한 빈자리 하나 없이 모든 객석을 채운 채 시작되었다.
팬들은 아포제의 손짓 하나 웃음 하나에 열광했다. 앵콜까지 마치고 들어간 뒤에도 팬들의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티슈를 받아 땀을 닦으며 대기실로 들어가자 스태프들이 환호하며 폭죽을 터뜨렸다. 또 한 번 데뷔한 것을 축하한다며 케이크를 내미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불을 끄고,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정우는 그 사이에서 모든 것을 함께했지만, 진심으로 즐거울 수 없었다.
“자자, 회식하러 가야지. 기획사분들 다 오실 거야. 불편하겠지만, 한 번은 인사해야 하는 자리니까 오늘만 잘하자. 늦게까지 붙잡지 않는다고 했어. 식사만 하고 호텔로 가자. 자, 다들 이걸로 입어. 이름 써져 있어.”
땀을 말리기가 무섭게 지창의 말이 들려왔다. 하진은 스타일리스트가 내미는 옷을 받아들었다. 평소라면 공연 뒤에 편하게 입었을 텐데 중요한 자리라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정장을 차려입어야 해서 찝찝했다.
“아, 맥주나 한잔 원샷 하고 자고 싶다.”
“나도.”
“뭐야, 넌 타이 없어?”
“내 건 없는 옷인데.”
“아, 내가 그거 입을걸.”
“안 되거든. 옷에 내 거라고 적혀 있었거든. 그리고 넌 나보다 어깨 좁아서 이 옷 입으면 때깔도 안 나거든.”
“뭐래. 말이면 단가. 애잔하다, 이영우. 어깨로 나를 이기려고 하다니. 그래, 뭐 말은 자유지. 마음대로 해. 내가 그 옷 입으면 어깨 봉제선 터져.”
“내 어이가 터지겠지.”
다소 유치한 말장난을 하며 옷을 갈아입는 해성과 영우를 본 하진이 셔츠 맨 윗단추를 잠갔다. 타이까지 한 세트였으면 더 불편했을 텐데 제 옷에도 타이는 없어 다행이었다.
“…….”
다 입고 거울을 본 하진은 거울 안으로 비치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대충 타이를 만지고 있는 게 보였다. 아침에 호텔에서 말로 부딪친 이후 내내 저런 표정이었다. 기자회견을 하거나 공연을 할 때 웃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좋아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팬들은 속을지 몰라도 하진은 속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이제 제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무대를 무사히 마쳤으면 됐지, 이제 그 이상 정우의 기분을 살피고 눈치를 볼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하진은 먼저 시선을 거두고 저를 향해 손을 뻗는 영우에게 다가갔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야, 하진아. 저기 저 친구. 아까 이름 뭐랬지?”
“어… 유이치라고 한 것 같아요.”
“아, 맞다. 유이치 저 친구가 아까부터 너 몰래 보고 난리도 아니야. 너밖에 안 봐. 네가 고개 돌리면 안 보는 척하고. 봐, 지금도 흘끔흘끔.”
“안 그래도 아까 메신저 아이디 있냐고 물어봐서 알려줬어요.”
하진의 말에 영우가 놀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대기실을 나섰다. 정우가 그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걸으며 들리는 소리를 가만히 담았다.
“아까 손짓, 발짓 다 해서 물어봤는데 데뷔 첫 무대부터 너 좋아했대. 한국말도 배우는 중이래. 한국 놀러 오는 게 꿈이래서 오랬어, 내가.”
축 아래로 떨어져 있는 정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우를 붙잡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메신저 아이디를 알려줬다는 하진도 마음에 안 들고, 하진과 그 댄서를 가깝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은 영우의 말도 마음에 안 들었다.
“나라마다 친구 한 명씩 있으면 좋을 것… 어, 정우. 왜 뒤에서 혼자 외롭게 와. 이리 와, 이리 와.”
말하다가 문득 뒤를 본 영우가 혼자 오는 정우를 보며 얼른 손을 뻗었다. 정우는 그런 영우에게 이끌려 자연스럽게 영우와 하진 사이로 들어갔다.
“아니, 나 지금 그냥 말하다가 뒤에 본 건데 모델인 줄 알았어. 아무리 명품이어도 그렇지 무슨 협찬 받은 슈트 핏이 이래?”
대화 주제가 금세 달라졌다. 정우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오를 때까지 이어지는 영우의 말을 들으며 대답했다. 하진과는 단 한 마디도 말이 섞이지 않았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일부러 서로 피하는 것처럼 섞이지 않는 것에 웃음도 나지 않았다.
“뭐 너희가 워낙 공식 그런 자리에서 잘하니까 당부할 건 없는데, 술 많이 마시지 마. 조해성, 이영우. 특히 둘.”
“아, 형. 억울해요.”
“취해서 실려 나갈 자리 아니다.”
“아, 저 공과 사는 구분 잘해요.”
“또 한 번만 취해서 지창쓰 그래라. 바닥에 버리고 간다.”
지창의 말에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우는 소리 내어 웃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차 안에서 마주친 눈동자가 꼭 빛을 머금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하진이었다. 정우는 시선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은 빈 공간을 바라보다가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차라리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더럽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무엇 하나 명확한 게 없이 엉망으로 물드는 이런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리는 차 문을 열고 그냥 확 뛰어내리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뛰어내리면 이 답답함이 사라질까.
“…….”
답은 ‘아니.’였다.
***
삼십 분 정도 이동해 도착한 곳은 아주 깔끔하고 조용한 식당이었다. 홀 자체가 없고 전체가 방으로 되어 있는데 각자 들어가는 복도도 다 따로 쓰는지 지나가는 사람을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 미리 나와 있던 한국인 직원을 따라 들어가 일본 스케줄을 도와주는 기획사 쪽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야말로 예의를 차리고 앉아 묵묵히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가볍게 술잔이 돌았고, 각자 놓이는 전통 일식을 맛보았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리가 불편해서 식사를 잘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자리는 두 시간 정도 이어졌다. 처음에는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궁금한 것을 나누기도 했지만, 결국, 멤버들은 불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 끝날까요.”
해성이 속삭이며 멤버들에게 말했다. 인규가 지친 얼굴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든 순간 손이 미끄러지며 컵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아…!”
순간 놀란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하진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얼른 방을 나섰다. 옆에 앉아 있던 정우가 조용히 일어나 그런 하진을 따라 나갔다.
식당 구조가 정말 특이했다. 일부러 프라이빗한 모임을 가질 수 있게 만든 건지 같은 방 사람이면 몰라도 다른 방 손님과 이 복도에서 마주칠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정우는 조용한 복도 끝, 화장실로 들어가는 하진을 따라 들어갔다. 페이퍼타월을 빼내 젖은 바지와 재킷 끝자락을 닦는 하진이 보였다. 하진은 갑자기 들어온 정우에 놀라 물기를 닦는 것도 멈춘 채 바라보았다. 정우가 올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답답해서요.”
“…….”
벽에 기댄 정우가 고개를 슬쩍 기울여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을 눈으로 훑었다. 방 분위기와 똑같이 전통 일본 느낌이 나게 꾸며둔 화장실은 몹시 조용하고, 화려했다.
“이제 나랑은 아예 말도 안 하기로 했어요?”
“…….”
묵묵히 물기를 닦아낸 하진이 세면대 물을 틀고 손을 씻었다. 정우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하진을 노려보았다.
“형.”
“…….”
“왜 이러냐고 물었죠. 솔직히 모르겠어요. 형이 이제 나 안 좋아한다니까 짜증 나는 것밖에 모르겠어.”
거품을 내 몇 번이나 손을 씻은 하진이 다시 페이퍼타월을 한 장 뽑아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정우의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우가 그대로 나가려는 하진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제 앞으로 세웠다.
“형이 나 개무시하니까 나도 형이 하지 말라는 짓 하고 싶잖아요.”
“놔.”
“가봤자 답답하고 재미도 없는데 여기서 키스나 할까요?”
“뭐?”
“형 나랑 키스하는 거 좋아하잖아.”
“…장난하지 말고 놔.”
그대로 하진의 팔을 더 확 당겨 가까이 오게 만든 정우가 제 눈을 피하지 않는 하진과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가까이 있는데 이상하게 애가 탔다.
“또 뭐에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쉿. 정우가 작게 조용히 하라는 소리를 냈다. 하진은 영문도 모른 채 하던 말도 맺지 못하고 입술을 닫았다. 예민한 눈으로 문 쪽을 한 번 흘끗 본 정우가 서둘러 하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하진의 손을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뭐 하는!”
“여기 화장실 우리 방에 있는 사람밖에 못 와요. 그런데 지금 누구 오고 있다고.”
“오면 뭐. 같이 여기 있는 게 들키면 안 될 일이야?”
자신을 노려보는 하진을 돌아본 정우가 화장실 가장 끝 칸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진의 손을 당겼다.
“여기서 같이 나오는 건 들켜서 좋을 게 없는 일이지.”
그대로 하진을 데리고 들어가 문을 닫은 정우가 닫힌 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화장실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계속 같은 소리로 말할 것처럼 굴더니 안에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진을 본 정우가 그대로 하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키스하는 걸 들키는 건 더 좋을 게 없을 거고.”
“말했지. 나 이제 너 안 좋아한다고.”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는 너무나 간지러웠다. 내내 잡고 있던 하진의 손을 그제야 놓은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혹시 알아요?”
“…….”
“키스는 아직 좋아할지.”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하진은 정우의 어깨를 밀었지만, 정우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하진의 목덜미를 쥔 손을 부드럽게 움직여 주무르면서 입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뒤엉킨 혀는 하진의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깨를 밀어내던 손에서도 힘이 빠지고, 고개를 돌려 피하려던 고개도 몇 번이나 붙잡혀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목덜미를 주무르고 쓸어내릴 때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정우는 저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혀끝을 문질러주고, 혀 아래를 건드릴 때마다 내고 싶지 않은 소리가 자꾸 목을 두드리며 흘러나올 것만 같아 소리를 삼켜야만 했다.
또 누군가가 들어온 건지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하진의 신경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확 몰렸다가 다시 온 열기를 쏟아붓는 정우에게로 움직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진은 담을 수 있는 힘을 다해 정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뒤엉켰던 혀끝이 풀리며 타액이 길게 늘어지다가 끊겼다.
“…….”
“…….”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정우가 다가왔다. 아니, 달려들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조금 더 깊고, 거칠게 맞물리는 입술에 하진이 그대로 밀려 완전히 벽과 정우의 사이에 갇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없이 탐닉하듯 키스하는 정우를 밀어내야 하는데 다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재킷이 열리고, 셔츠 위로 허리를 잡아 오는 정우의 손에 뜨거운 숨이 확 넘쳤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뜨거운 숨을 집어삼키며 셔츠 밑으로 손을 확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