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딱히 조식 생각이 없었지만, 종일 스케줄이 빡빡하니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어두는 게 좋다며 직접 데리러 오기까지 한 지창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어 정우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미 내려온 멤버들을 향해 다가갔다. 해성과 영우가 손을 번쩍 들어 하이파이브를 이끌었다.
가볍게 그 손을 차례대로 친 정우가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이 그런 정우를 보며 의자를 빼주었다.
“너희 각방 쓰더니 내외한다?”
“정우가 얼마나 잠을 설쳤겠어. 나도 기절할 뻔했잖아. 하진이가 형이랑 내려와서.”
“배신이야, 배신. 내가 다 서운해.”
“이제 공식 룸메도 바뀌는 건가요, 강하진 씨?”
들고 있던 크루아상을 마이크처럼 하진에게 내민 해성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진이 그런 해성의 장난을 받아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번 공식은 영원한 공식입니다.”
“명언이다, 명언. 나중에 에피소드로 어디 나가면 말해 줘. 팬들 울고 난리 난다.”
“어, 저 지금 에피소드 만든 거예요?”
“부럽다. 예능 나가면 진짜 할 말이 없어. 우리 너무 건전하잖아. 치고받고 싸우기를 했어, 같이 몰래 뭐 하지 말란 짓을 했어. 아, 한 적 있기는 하다. 다이어트 하라는데 젤리 먹기.”
건전하다, 건전해. 인규의 반응에 웃음이 주변을 울렸다. 정우는 음식을 가져올 생각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진한 커피만 한 모금 마셨다.
“뭐 가져다줄까?”
다정하게 닿아오는 말에 고개를 돌린 정우는 저를 보고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매몰차게 방을 나가 버린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생각 없어요.”
“그래도 좀 먹어. 빈속에 스케줄 어떻게 하려고.”
“…….”
내가 먹든 말든 상관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챙기는 척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정우는 짧게 숨을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져다 먹을게요.”
“응. 같이 가자. 나도 빵 하나 더 먹으려고. 겉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하고 진짜 맛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하진을 본 정우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충 시리얼을 담고 우유를 부었다.
“얼굴 좀 펴. 형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아.”
투명한 잔을 들어 우유 옆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따른 하진이 정우에게 작게 말했다.
“내가 한 거 그대로 하네. 이래놓고 복수가 아니라고?”
“팀 깰 거야? 너 자꾸 이렇게 굴면 형들 알게 될 거고,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알잖아.”
“팀 핑계 대지 말아요. 형이 언제부터 팀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팀이 중요했으면 애초에 나한테 그렇게 못 했지.”
“…맞아. 솔직히 너랑 떨어지기 싫어서 데뷔도 하고 싶었어. 팀보다 네가 더 중요했어.”
“…….”
크루아상을 하나 들어 작은 오븐에 넣었다가 뺀 하진이 작은 꿀을 들어 접시 위에 놓으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 팀이 더 중요해. 그렇게 됐을 뿐이야. 너는 원래부터 팀이 더 중요하잖아. 뭐가 문제야? 난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솔직한 심정을 말해보자면 하진이 들고 있는 접시를 빼앗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 빈손을 잡아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매달릴 때까지, 다시 저를 보고 애원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고 싶었다.
“…….”
“웃어. 형들이 본다.”
정우를 보며 입꼬리를 위로 올려 웃은 하진이 먼저 몸을 돌렸다. 그런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우가 어느새 우유에 푹 담겨 눅눅해지려 하는 시리얼 볼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정우 삐졌지?”
“네?”
“하진이가 형 방에 가서 자서 삐진 거 아냐? 냉랭한데?”
“아니에요. 뭐 그런 걸로.”
“하진이 보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티가 나는데.”
아니라고 하는데도 믿지 않는 해성의 말에 스푼을 꽉 쥐었다가 놓은 정우가 애써 웃음 지었다. 결국, 시리얼은 한 입도 먹지 못했다.
***
체크아웃을 하는 날이 아니라 굳이 짐을 챙길 필요는 없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내려오라는 지창의 말을 듣고 방으로 올라온 정우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가방을 들어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올렸다. 그때 벨이 울렸다.
“…….”
누구인지 물어야 하는데 묻지 않고 문을 연 정우는 제 예상대로 앞에 선 하진을 바라보았다.
“왜 왔어요?”
“준비해야지.”
“인규 형이랑 계속 같이 쓰는 거 아니었어요?”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가에 기대어 선 정우를 본 하진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정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화를 내는 거야?”
“누가 화를 내요.”
“너.”
“…….”
“내가 그만두겠다고 한 뒤로 계속 화내고 있잖아.”
단순히 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저도 그냥 ‘화’라는 짧고 너무나도 뜨거운 그 말 하나로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화가 아니었다. 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연약한 무언가가 있었다.
“화내는 건 형이잖아요. 평소처럼 지내면서 마음만 접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거 아니잖아. 형 나한테 화나 있잖아요.”
“계속 여기서 말할까? 누가 듣기라도 하면 좋을 거 없는데.”
하진의 말이 맞았다. 정우는 빈 복도를 한 번 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진이 그 사이로 들어왔다. 문을 닫은 정우가 침대로 가 가방을 놓는 하진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화 아니었어. 아,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이런 마음이었어. 나는 온 마음 다해서 한 사랑이 너한테는 그냥 귀찮은 감정 맞춰 주기, 어르고 달래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좀 충격이었어. 다 알고 있었는데도 또 충격이기는 하더라.”
“…….”
“그런데 이제 좀 화가 나. 화 맞아, 이건. 왜 이래? 물으면 아무 대답도 못 하면서 자꾸 이러잖아, 너.”
대화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기회를 잡으면 말을 이어가야 하는데 하진이 왜? 라고만 물으면 말이 뚝 끊겼다. 정우는 밤새 떠올린 그 많은 생각 중 단 하나도 소리 내지 못했다.
“왜 화가 나는지도 말할게. 나는 말할 수 있어.”
“…….”
“너 날 어떻게 보는지 알아?”
“…….”
“누가 보면 내가 널 배신한 줄 알겠어. 너 그런 표정이야. 내가 질려서 내가 바람이라도 나서, 내가 널 버린 것처럼 굴잖아.”
“…….”
“그런 거 아닌 건 누구보다도 네가 더 잘 알 거고.”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우는 심각한 표정이 풀린 것도 잊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하진의 말이 머리를 때리고 지났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는데, 하진의 말을 듣고 나니 명확해졌다. 버림 받은 기분. 하진이 저를 배신한 기분. 말도 안 되는 것을 아는데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서운한 마음.
“그런 너 볼 때마다 나는 비참해. 화가 나.”
“…….”
“나랑 자는 게 좋기는 했나 봐. 고마워할까?”
“…….”
“네 머릿속에 나는 그냥 계속 그런 인간이지. 그러니까 내가 헤퍼 보이는 거잖아.”
“누가 헤프다고 그랬어요?”
“아니야? 헤프다고 정확하게 말만 안 하면 안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문혁이를 만나도 의심하고, 처음 보는 댄서랑 반갑게 인사만 해도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아니야? 내가 형 방에 가서 잔다고 할 때, 그때도 그랬어. 아니야?”
“그건!”
“그건?”
생각한 것을 말로 하지 못하는 머저리가 된 것 같았다. 아니, 머저리가 맞았다. 하진이 되물을 때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말해봐. 그건?”
“형이 처음에 나한테 그랬으니까.”
“…….”
“나한테 먼저 키스했고, 매달렸고, 만지면 좋아했고, 계속 나랑 자고 싶어 했으니까.”
“너한테 그랬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지쳐버린 모든 감정이 담긴 눈이었다. 정우는 화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정말 지쳐버리고 질려버린 시선으로 저를 보는 하진과 마주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나 너한테 그랬어. 술김이었고, 꿈인 줄 알았지만 그건 다 변명이고… 결론적으로 보면 정우 너한테 그랬어. 너랑 닿고 싶어서, 좋아서, 네가 받아주는 게 너무 기분 좋아서.”
“…….”
“넌 그게 내가 헤퍼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여기저기 그러고 다녔으니까 너한테도 그랬을 거라고.”
그런 게 아니야. 라고 말하기에는 모든 게 잘못되어버렸다. 정우는 하진의 뒤로 보이는 저 창을 깨고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답답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 답답함의 이유가 하진이라면 참아볼 텐데, 그 모든 이유는 저였다. 그래서 참기가 힘들었다.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할게.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하진은 그 어떤 순간에도 덤덤했다. 축 가라앉은 목소리와 표정이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나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어. 그게 가능한 일이라는 거, 좋아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닿고 싶은 거라는 거 처음 알았어.”
“…….”
“그만큼 좋아한 게 처음이니까.”
“…….”
“네가 남자라는 거,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그게 머리에 담기지도 않을 만큼 좋아한 사람 네가 처음이니까.”
“…처음?”
“너 아니면 그런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네가 아니니까. 내가 좋아하는 건 너니까. 그래서 나 너랑만 잤어. 그런데 넌 그런 나를 네 머릿속에서 더럽게 놀렸지.”
감정이 복받쳐 오른 듯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뜬 하진이 다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그런 하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두는 거 힘들 줄 알았는데 네가 이러니까 생각보다 쉬워졌어.”
“…….”
“나…….”
피하고 싶었다. 하진이 하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이제 더는 얘기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너 안 좋아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것을 쏟아낸 것처럼 하진은 후련해 보였다. 정우는 하진에게서 나온 그 무거운 것이 제 마음을 아주 세고 아프게 짓누르는 느낌에 목에 걸린 숨을 탁 뱉어냈다. 몸에 머물던 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기가 빠르게 돌았다. 어지럽기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정우는 말이 끝났다는 듯 뒤돌아서는 하진의 팔을 잡아 다시 돌려세웠다.
“…하던 대로 해요.”
“…….”
“안 그런다고 했잖아.”
“…….”
“그 말은 정말 실수였고, 내가 형을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정문혁도 그렇고 다른 새끼들이 형을 그런 눈으로 보니까.”
“그만해.”
하진은 정우에게 잡힌 팔을 확 빼냈다. 그리고 날카로움이 묻은 시선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만 좀 해.”
“…….”
“같은 말 듣기도 질린다, 진짜.”
그대로 확 뒤돌아 옷을 챙긴 하진이 욕실로 들어갔다.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하진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확 조여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을 다 부수고 싶기도 하고, 창을 깨고 확 죽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저 욕실 안으로 들어가 하진을 잡고 다시 저를 좋아하라고, 원래 하던 대로 하라고 윽박지르고 싶기도 하고, 그러겠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박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 걸음도, 아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믿을 수 없게도 그 말 한마디에 난도질 되고, 우습게도 상처받은 마음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