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하진은 방문 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냥 다시 방으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실제로 몇 번이나 걸음을 돌려 복도를 걷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우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도 싫고, 서로 닿지 않는 대화를 반복하는 것도 싫었다. 정우에게 더 이상 그 어떤 실망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제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오늘 이 순간을 잘 넘겨야 했다. 하진은 심호흡을 한 뒤 용기를 내어 벨을 눌렀다. 곧 누구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하진이에요, 형!”
문이 열리고 놀란 눈을 한 인규를 본 하진이 씩 웃고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갑자기 방으로 들이닥친 하진을 보고 인규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인규를 돌아보았다. 당황한 인규가 얼른 그런 하진에게 따라붙었다.
“가방은 또 뭐야? 그냥 온 거 아니야?”
동공이 마구 흔들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인규를 보고 웃은 하진이 빈 침대 앞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 형이랑 노래 맞춰 볼 거 있잖아요. 아까 안무 수정되면서 그 오른쪽에서 같이 안무하는 것도 있고.”
“아… 맞다.”
그제야 안도하는 인규를 보며 하진 역시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놀랐잖아.”
“왜요?”
“갑자기 가방 들고 오니까. 정우랑 대판 싸운 줄 알았어.”
“싸울 수도 있죠.”
“너희가? 말도 안 된다.”
가방 안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낸 하진이 침대에 걸터앉아 인규를 바라보았다. 손님이라도 온 것처럼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낸 인규가 뚜껑을 열어 하진에게 내밀었다.
“형 눈에는 저랑 정우가 평생 싸울 일 한번 없을 걸로 보여요?”
“당연하지. 너희 같은 애들이 어디 있어.”
늘 들어온 말이지만, 인규에게 진지하게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진은 너무 차가워 무슨 맛인지 잘 알 수가 없는 주스를 마시며 인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연습생 들어오기 전에 정우는 진짜 말 그대로 친한 애가 없었어. 대충 다 잘 지내기는 하는데 곁을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야 하나. 보통 연습생 하다 보면, 아니 어디서든 같이 다니는 사람이 생기잖아. 해성이랑 영우처럼 다 친하지만 유독 친한 그런 사람.”
“그렇죠.”
“정우는 그런 애가 없었거든. 그런데 하진이 너랑은 내내 붙어 다녔잖아. 신기하더라. 그런데 싸울 리가 있어? 너도 정우 좋아하지만, 정우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맞아요. 그러니까 놀랄 거 없어요, 형. 아까 저 보자마자 형 눈 엄청 커졌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
“진짜 놀랐다니까. 얘네가 치고받고 싸운 건가 싶고.”
인규의 말에 웃은 하진이 옷을 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시던 주스를 책상 위에 놓았다.
“저 여기서 좀 씻을게요.”
“그래. 아, 너랑 연습할 거 있는 걸 잊고 있었네. 그래도 정우 서운하겠다. 가방까지 가져오고 그래. 여기서 자게?”
“잘 수나 있으면 다행이죠.”
“하긴.”
웃으며 노래를 트는 인규를 본 하진이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혼자 남자 그제야 심장이 마구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인규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는데 그래도 잘 넘어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가요. 가고 싶으면 가라고. 당장 꺼지라고!」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저에게 꺼지라고 소리치던 정우가 떠올랐다. 확 내뱉은 뒤 그런 말까지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듯 난감해했지만, 이미 뱉은 말이고, 들어버린 뒤였다. 진심으로 한 말이든 화가 나서 한 말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
긴 한숨을 내쉰 하진이 세면대 물을 틀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인규와 진짜 해야 할 연습이라도 있어 상황을 모면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냥 계속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는 걸까.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구는 정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제가 한 사랑이 얼마나 정우에게 가치 없는 것이었는지 자꾸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사랑을 키워가는 것은 멈췄고, 끝났지만 그래도 정우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계속 봐야 할 사람이고, 정우를 미워하면서 지난 저의 감정들을 쓰레기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진은 아직도 많은 것을 견디고 노력하고 있었다.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자꾸 핀트가 어긋난 말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화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노력이 끝나도 또 결국, 노력해야 하는 것은 저뿐인 것만 같아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말해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제가 관두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끝이 나는 순간 감정은 사라지지 않아도 저는 더 이상 표현을 하지 않을 거니 그냥 그렇게 정우와의 관계는 정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우가 이상했다. 잘됐다고,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진작 그러지 그랬냐고 안도할 줄 알았던 정우가 자꾸만 저에게 이상한 말들을 해댔다.
「뭘 사과받고 싶은지 말해요. 할 테니까.」
그게 아니라고, 난 너한테 사과받고 싶은 게 아니라고 계속 말을 하는데도 정우는 계속 사과라는 말을 했다. 사과로 해결이 될 문제도 아니고, 되돌릴 문제도 아닌데 정우는 내내 똑같았다. 그래서 화를 내는 정우와 마주할 때마다 자꾸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감정의 본질과 지금 이 상황의 중심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정우가… 미웠다.
“…….”
그래서 방을 나왔다. 미워서 나와 버렸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같이 있으면 또 쳇바퀴를 돌릴 것 같아서 인규의 방으로 왔다. 하진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
너도 답답했으면 좋겠어. 네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화라도 계속 냈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팠으면 좋겠어. 나를 볼 때마다 불편했으면 좋겠어.
“…….”
하진은 그대로 차가운 물을 얼굴에 확 끼얹었다. 몇 번이나 끼얹어 손과 얼굴이 얼얼해진 뒤에야 다시 긴 숨을 뱉어냈다. 그래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제발 더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진에 대한 생각을 전부 뽑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처박고 싶었다. 하지만 숨을 쉴 때마다 하진이 떠올랐다. 키스해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고, 그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던 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씨발, 진짜.”
정우는 들고 있던 물병을 아무렇게나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물이 반쯤 남은 물병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저를 뺀 모든 사람에게 웃어주는 하진이 떠올랐다. 해성과 영우, 인규는 물론이고 지창과 훈, 거기에 이름도 모를 그 생전 처음 보는 댄서에게까지 웃어주고, 손을 잡아주면서 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제가 한 그대로 하고 있으면서 복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이게 복수가 아니면 도대체 뭐가 복수란 말인가. 정우는 자꾸만 깎여나가는 마음에 손도 대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연습이라도 하자 싶은데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댄서가 하진의 뒤에 몸을 붙이고 서 있던 게 떠올랐다. 허리를 두 손으로 쥐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막던 그 손, 손, 손.
“…….”
서로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웃던 그 얼굴이 연이어 정우의 머리를 치고 지났다. 팬이라면서 하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또 다정하게 같이 서서 사진까지 찍어주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전부 다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만 좀 하자, 그만 좀.”
멈추려고 해도 멈춰지지 않는 생각에 저절로 말이 다 흘러나왔다. 정우는 그대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맥주를 꺼내 마개를 열었다. 단숨에 반 캔을 비우는데도 하나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상관인데. 강하진이 누구랑 뭔 짓을 하든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 그만 좀 해.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씨발!”
정우의 손에 요란히 구겨진 캔이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우는 그대로 무너지듯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제가 하진에게 이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 그걸 모르겠는가. 애초에 사랑한 적이 없고, 달래기 위해 가짜 연애 제안을 한 게 저인데. 그렇게 다 알고 있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떨치려고 해도 내 것을 남에게 빼앗긴 것 같은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
인규의 방에 가서 둘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두드리고, 마음에 열이 오르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저는 각종 최악의 상상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 미친 건 아닐까.
「…그러지 마…….」
애원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우는 그 목소리의 시점을 찾으며 생각을 움직였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벌벌 떨리는 몸이 떠오른 순간 창백해진 하진의 얼굴이 머릿속을 밝히며 나타났다.
하진은 애원했다. 정말 이대로 정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아 겁이 나 미칠 것 같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몸이 벌벌 떨렸다.
「…그러지 마, 정우야…….」
샵에서 현이진을 만났던 날이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휴게실로 들어와 제 앞에서 마구 말을 쏟아냈었다. 왜 지금 그날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걸까. 드디어 미친 걸까.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과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든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야지, 안 되겠다.」
고저 없는 목소리. 울고 있는 하진을 보며 제가 했던 말이었다. 무표정하기도 하고, 지치고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제 얼굴이 하진의 얼굴로 변했다. 정우는 숨도 쉬지 못하고 머릿속 장면을 바라보았다.
「너랑 자자고 평생 누굴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이제 널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하진이 제가 되어 말했다. 제가 하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저에게 하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강하진이라니. 그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완전히 뒤엉킨 장면 속 제가 중얼댔다.
「…죽고 싶어.」
제 목소리와 하진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형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생각만 해도… 죽고 싶어. 정말 죽고 싶어…….」
아니, 제가 한 말이 아니다. 저런 말을 하진에게 한 적이 없는데, 왜 생각 속 저와 하진의 위치가 바뀐 걸까. 아니야, 내가 한 말도 생각도 전부 다 아니야. 가위에 눌린 것처럼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정우가 숙였던 고개를 확 든 순간 마지막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며 울렸다.
「죽어, 그럼.」
상상만으로도 사지에 몰렸다. 저는 상상이지만, 하진은 현실이었다. 제가 하진을 사지로 몰았다.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보고 그게 싫어 다가와 고개를 젓는 하진에게 죽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진은 정말 죽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
하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 것을 빼앗긴 기분? 그래서 그렇게 울며 애원했던 걸까. 제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묻고 싶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정우는 멍하니 앉아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벌어진 상체가 쏟아지듯 앞으로 기울어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긴 숨이 쏟아지고, 그렇게 새벽은 깊어졌다. 시간도, 감정도 그리고 생각도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정우는 내내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내내 텅 비어버린 침대의 옆에서 고요한 방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소란스러운 마음과 마주했다.
어떤 소리부터 들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최초의 소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