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말이 쇼케이스지 사실 데뷔 콘서트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만큼 무대 효과도 많고, 동선도 까다로워 리허설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같은 곡을 몇 번이나 체크해야 했고, 내내 준비한 것들이 무대 사정과 잘 맞지 않아 즉석에서 수정되는 것들도 있어 조금만 집중하지 않아도 대열이 흐트러졌다.
“다들 수고 많았어. 너희가 잘해서 그래도 빨리 끝났다.”
빨리 끝났다는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굳이 토를 달 기운도 없어 멤버들은 연출가와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전국 투어를 돌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힘든데 고작 리허설을 마친 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그동안 연습한 거 남아 있기는 해? 추가되는 거 너무 많아서 솔직히 기억 안 나.”
대기실로 들어간 해성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하진은 그런 해성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다 틀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수정을 해버려서 그동안 연습한 건 도대체 뭔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아니, 연출 욕심이야 이해하는데 그래도 그렇게 다 바꿔버리면 내일 무대는 어떻게 하라고.”
“그러게. 걱정이다.”
너무 바뀐 게 많아서 외우지 못할 것 같다고 잘 이야기를 해서 이 정도였다. 하진은 너무 복잡하다는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짓던 연출가를 기억했다.
“잠도 못 자겠다. 아까 찍은 거 보고 연습해야지.”
“형들이 특히 바뀐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랩 할 때도 그렇고.”
“내 말이. 저 형이 나 미워하나 봐.”
하진은 해성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땡큐, 그래도 하진을 향해 씩 웃은 해성이 마개를 돌려 열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일본 댄서들이 인사를 하러 온 건지 대기실 밖에 조금은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서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했지만, 대충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었다. 하진은 호스티지 무대에서 저와 잠시 맞춰 보았던 댄서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팬이고, 춤을 같이 맞춰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며 수줍게 휴대폰을 꺼내는 댄서를 본 하진이 그 뜻을 알아채고 얼른 옆으로 섰다. 그리고 댄서 얼굴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화면 안으로 얼굴이 담긴 순간 몇 번 화면이 깜빡였다. 인트로를 같이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해 아쉽다며 서운한 얼굴을 하는 댄서를 본 하진이 그 얼굴을 따라 아쉬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는 댄서의 손을 잡아 흔들고는 내일 보자고 인사했다.
“야, 하진아. 아까 너랑 도입한 그 친구가 완전 네 팬이래. 너 본다고 잠도 못 잤다던데.”
“아, 정말요?”
“역시 월드베스트 강하진.”
연출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중이었다는 것도 잊은 채 금세 즐거워진 분위기 속, 정우는 쉽게 웃을 수가 없었다. 하진과 춤을 맞춰 봤던 그 댄서가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아까부터 떨쳐지지가 않는 너무나도 분명한 감정이 계속 마음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생각은 차에 타서도 계속되었다. 정우는 마스크를 끌어 올린 채 내내 어두운 창밖을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귓가에 멤버들의 목소리가 다가와 들어오지 못하고 부딪쳐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아까 그 하진이 팬이란 친구 하진이랑 사진 찍을 때 표정 봤어? 화면을 봐야 되는데 하진이 보느라 막 눈이 옆으로 움직여.”
“아, 맞아. 얼굴 빨개져서.”
하나도 들어오지 않던 말들이 갑자기 흡수되기 시작했다. 저런 말들까지도 들리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왜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은 이렇게 쉽게 들어오는 걸까.
“…….”
아무리 다른 말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것을 뺏긴 기분. 그것만큼 지금 이 기분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내 것이 아닐 리가 없는데,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해버린 기분은…….
“…….”
참담했다. 다시는 하진의 앞에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둘의 사진이 담겼을 그 휴대폰을 깨버리고 싶고, 당황해서 보는 그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공연이고 뭐고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 무대 위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진에게 박아버렸어야 했다. 좋아서 저에게 매달리는 걸 모두에게 보였어야 다시는 누구도 하진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었다.
“…….”
정말 별 미친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정우는 뻑뻑한 눈을 깊게 감으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최악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도, 또 자꾸 떠오르는 하진과 그 댄서의 여러 장면도 전부 다 최악이었다.
생각은 호텔에 도착해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겉옷을 벗고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하진을 본 정우가 귀에 걸린 마스크를 빼내며 다가갔다.
“그렇게 아쉬웠어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도입 안무 아까 그 새끼랑 못 한 게 그렇게 아쉬웠냐구요.”
“왜 말을 또 그렇게 해? 아쉽다고 한 적도 없는데.”
“아쉽다는 말에 그런 얼굴 했잖아요.”
“…그럼 그 상황에 나는 별생각 없다고 해?”
“짜증 나.”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 정우가 하진에게 성큼 다가와 어깨를 두 손으로 확 뒤로 밀었다. 그대로 밀린 하진이 침대 위로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왜 이러는 거야? 아파, 놔줘.”
“말해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
시선도 맞추지 않는 하진을 노려보던 정우가 그대로 하진을 뒤로 눕히며 올라탔다. 그리고 턱을 쥐고 돌려 강제로 눈을 맞췄다.
“뭘 사과받고 싶은지 말해요. 할 테니까.”
“…사과받고 싶은 생각 없어. 너 잘못한 거 있어?”
“…….”
“넌 날 사랑하지 않은 거고, 난 널 사랑했던 거야. 둘 다 잘못 아니잖아. 네가 무슨 행동을 했든 나는 그거라도 좋았어.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씨발, 그럼 뭘 어쩌라는 건데요. 사과할 필요 없다면서 내 앞에서 화난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어쩌라고, 그럼. 계속 이렇게 당하라고?”
마음에 담긴 것을 쏟아내듯 말하는 정우를 가만히 올려보던 하진이 입을 열었다.
“…잘 풀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걸 알려면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얘기도 안 해주고, 딱히 할 말도 없다면서 화난 사람처럼 굴고.”
“…….”
“어떻게 해야 하냐고?”
“…….”
“그냥 하루하루 살아내는 수밖에 없어. 너도 나랑 그때 얘기하기 싫었을 거 아냐. 같은 말만 해대니까. 들으면 답답한 소리만 하니까. 그만하라는데 말도 안 듣고 계속 사랑 타령이나 해대고, 박아달라고 다리나 벌려대는 내가 우스웠을 테니까.”
“…….”
“나도 지금 너랑 얘기하기… 싫어.”
하진이 말한 그대로였다. 하나도 다른 게 없었다. 제가 요즘 생각하는 것들을 하진이 그대로 너무나도 정확하게 말해버렸다. 정우는 멍하니 제 밑에 눌린 채 말하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사과 타령만 하는 너랑 얘기하기 싫어.”
“…….”
“뭘 어쩌라는 거냐고?”
“…….”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야.”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다가 들어와 정우의 심장 안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목소리도 아니고, 차갑지도 않은데 그대로 베인 심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심장이 베이는 기분은 또 처음이라 이게 뭔가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픈 말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켜 줘.”
“…….”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하진의 눈동자는 떨리지 않았다. 정우는 그런 하진을 놓아주지 않고 더 세게 어깨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할 거면… 빨리해.”
귀찮은 일을 빨리 해치우려는 것처럼 말하는 하진의 목소리에 정우가 그대로 고개를 내려 그 입술을 물어뜯듯 머금었다. 거친 키스에도 하진은 딱히 입술을 벌리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혀를 문지르지도 않았다. 정우는 그 입속을 파고들어 거칠게 엉망이 될 만큼, 아니, 엉망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키스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이유는 몰라도 상처가 난 마음이 다시 한번 저릿했다.
“…….”
전에는 키스를 해주면 제 목을 끌어안고 간절히 매달렸었다. 혀를 문질러주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붙여오고, 잔뜩 달아오른 혀로 열심히 제 혀끝을 문지르고 타액을 삼켜댔었다. 한참을 해주고 떼어도 아쉽다는 듯 반쯤 풀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면 다시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 저와 키스할 때의 하진은 늘 뜨겁고 말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뜨겁지도 않고, 말랑거리지도 않았다. 하진은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키스는 저 혼자 하고 있었다. 정우는 젖은 입술을 떼어내며 제 밑에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저처럼 입술이 잔뜩 젖어 있기는 한데, 내내 입을 틀어막아 숨을 몰아쉬기는 하는데… 달아오르지도 않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전이라면… 정우가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건가, 혼자 착각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진짜 네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나도 몰라요. 나도 모른다고. 물어봤자 나도 몰라서 뭐라고 할 답이 없다고.”
“아까워?”
“…….”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할 때마다 쉽게 한 번씩 쓸 수 있는 편한…….”
“그만 해요.”
하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정우는 하진의 몸 위에서 확 떨어져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그런 말까지는 듣고 싶지 않았다.
“네가 가지기는 싫은데, 남이 쓰는 건 싫은 거잖아.”
“그만하라고.”
“그럴 리는 없지만, 아까운 기분이 계속 들어서 혹시라도 그게 사랑은 아닐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
“그거 사랑 아니야.”
듣고 싶지 않았다. 괜히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하진의 모든 말들이 심장으로 들어와서 뾰족하게 바뀌며 마음 안쪽을 난도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 들으면 그만인데, 자존심이 상해 막 내뱉는 저런 말에 왜 마음이 이렇게 아픈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규 형 방에 가서 잘게.”
“…….”
“형이 우리 사이 걱정 안 하게 잘 말할 테니까 걱정 마.”
하진의 말에 다시 하진을 보며 뒤돈 정우가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누가 그딴 거 걱정한다고 그랬어요? 가요. 가고 싶으면 가라고. 당장 꺼지라고!”
“…….”
꺼지라는 말까지는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정말 할 생각이 없었는데 저를 두고 가버린다는 말에 화가 났다. 정우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깊게 감았다.
“그게 아니라.”
“…쉬어, 그럼. 내일 보자.”
가만히 정우를 바라보던 하진이 그대로 옷이 든 제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 정우는 문을 열고 나가는 하진의 뒷모습을 보다가 서둘러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닫히는 문을 열려고 손을 뻗은 순간, 문은 닫혔다. 철컥, 잠금장치가 맞물리며 굳게 닫히는 문을 가만히 본 정우는 허공에 머문 제 손을 바라보았다.
“…가지 마.”
타이밍을 놓치고 늦게 나온 말과 함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정우는 그대로 천천히 뒤돌아 침대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텅 빈 두 침대가 낯설었다.
「아까워?」
피하지 말고 그 말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정우는 제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하진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아까운 걸까. 정말 아까워서 이러는 걸까.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할 때마다 쉽게 한 번씩 쓸 수 있는 편한…….」
좋아하지는 않지만, 욕구 해소를 위해 쉽게 쓸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던 건 아닐까. 우습게도 절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절대 아니라고 바로 말하기에는 하진과의 섹스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잃고 싶지 않은 게 섹스인 게 아닐까.
「네가 가지기는 싫은데, 남이 쓰는 건 싫은 거잖아.」
가지기가 싫은 게 아니라 가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뭐가 다르냐고 묻겠지만, 그건 분명 달랐다. 그토록 기다린 꿈이 이루어진 그 지점에 같은 팀의 멤버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하진을 좋아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방법이 틀렸을지는 몰라도, 가지기 싫다는 말 앞에서는 마음이 조여들지 않았다.
“…….”
남이 쓴다는 말도 듣기 싫었다. 기분이 더럽고, 불쾌한 말이었다. 남이라는 말도 하진을 물건처럼 쓴다는 말도 다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문혁도 그 이름도 모를 일본인 댄서도, 유세주와 그 외에 하진과 가까이 닿고 싶어 하는 모든 인간이 다 싫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아까운 기분이 계속 들어서 혹시라도 그게 사랑은 아닐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그런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정우는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쪽의 생각을 불쑥 떠올렸다. 하진의 말을 전부 반박하고 싶다 보니 나온 생각이었다.
「그거 사랑 아니야.」
그럼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반박이랍시고 툭 터뜨린 생각이 다시 정우를 가리키며 돌았다. 정우는 저를 가리킨 생각의 날카로운 화살표와 마주했다. 그제야 제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
반박에 열을 올리다가 나온 오기 어린 오해 또는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희미한 진심.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우가 그대로 확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속에 아주 오래 있다가 나온 것처럼 숨이 차고, 머리가 아팠다. 처음으로 저도 모르게 떠올린 사랑은 그렇게도 온몸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정우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눈을 깊게 감았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