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94화 (94/122)

#94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녹화는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간단한 일어로 리포터와 인사를 나눈 뒤 통역사와도 인사를 나누고, 대기실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나 아까 눈물 날 뻔했잖아.”

“하진이 말 듣고?”

“네. 형도 그랬어요?”

“응. 하진이 연습실 처음 오던 날 생각나더라. 더 잘 챙겨줘야 했는데 우리가 못한 걸 정우가 다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둘이 애틋하지.”

“그래도 우리는 하진이 좋아했잖아요. 애가 밝아. 노래도 춤도 뭐 하나도 모르는데 밝아, 일단. 다른 애들 눈치를 안 보는 건 아닌데 보면서도 밝아. 그냥 밝아.”

하진과 틀어진 후, 전혀 웃을 일도 웃고 싶은 순간도 없었는데 해성의 말에 작게 웃음이 났다. 넓은 연습실,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면서도 슬쩍 눈치 보는 얼굴. 사소한 친절 하나에도 쉽게 풀어지던 웃음과 가까이 와서 앉으며 조심스럽게 묻던 목소리.

「학교 일? 그럼 오늘 못 오겠네…….」

「미안해요, 형.」

「아니야! 뭐가 미안해. 나 혼자 열심히! 하고 있을게. 정우 너 내일 나 보면 깜짝 놀랄걸?」

「너무 잘해서?」

「응!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걸.」

한 번씩 예전 생각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고, 너무 달라져 버린 관계에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처럼 괴롭지는 않았었다. 정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기를 반복했다.

매일 같이 연습하다가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던 날, 못내 아쉬워 뒤를 돌아보면 하진이 계속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웃으면서 손을 크게 흔드는 것을 보며 몇 번이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

울었을 줄은 몰랐는데 울기까지 했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놀랍기도 하고, 그냥… 마음이 아팠다.

“자자, 다들 너무 잘했어. 시작이 좋아. 이제 바로 리허설 하러 갈게. 일본 안무팀이랑 맞춰 보는 게 시간 좀 걸릴 거야. 차로 가자.”

지창의 말에 멤버들이 모두 문 쪽으로 움직였다. 정우는 해성과 같이 가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해성이 뒤에 있는 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우야, 빨리 와.”

마지못해, 정말 마지못해 돌아보는 시선이 닿아왔다. 정우는 하진과 눈을 맞췄다. 시선이 깊게 맞물리기 전에 하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쇼케이스를 하는 공연장으로 이동을 하는 동안에도 단 한 마디의 말도 섞이지 않았다. 정우는 차에 타자마자 창 쪽을 보고 눈을 감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자는 것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까지 피하고 싶다는데 굳이 나서서 상황을 헤집을 이유는 없었다. 정우는 기꺼이 하진의 외면에 동참했다.

신나게 이야기를 하던 멤버들도 공연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전부 잠들었다. 오 분만 참으면 되는데 그걸 못 참고 잠들어서 더 피곤하기만 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해성과 인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으로 하진을 살폈다. 역시 조금도 잔 적이 없는 것 같은 멀쩡한 얼굴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형, 댄서분들이랑 말하는 것도 통역해 주시는 거죠? 우리 진짜 하나도 모르잖아요. 인사밖에 몰라요.”

“걱정 마. 오늘은 회사 직원분이 해 주실 거야. 내일 쇼케 때는 아까 통역해 주신 분 오셔서 해 주실 거고.”

관심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멤버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정우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저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는 하진이었다. 제가 했던 것을 그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복수는 아니라는 말에 실소조차 터지지 않았다.

무대를 처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뷔’라는 말이 다시 붙으니 유난히 더 긴장되는 게 사실이었다. 멤버들은 다른 나라에서 단독으로 진행되는 데뷔 쇼케이스라는 말에 큰 부담을 느꼈다. 그래서 평소보다 웃음도 사라지고, 몸에 힘도 더 들어갔다.

“사실 메인 무대가 호스티지란 말이지. 내일 아침 방송이랑 홍보영상으로 다 호스티지가 나갈 거라 최대한 곡이 확 살면 좋겠거든. 너희도 알겠지만, 호스티지는 도입부터 섹시하잖아. 하진이 눈 가리고, 정우가 뒤에서 안대 풀어주고, 눈 가린 손 치워내고 거기부터 그냥 둘이 케미가 살잖아. 팬들도 제일 넘어가는 부분이고. 그래서 거기를 잘 살리면 좋겠거든.”

여러 무대를 같이 하면서 이제는 친해진 연출가도 평소보다 더 진지해 보였다. 한 번 삐끗하면, 성공은커녕 불명예스러운 퇴장을 해야 하는 해외시장의 첫발이라 그런지 더 긴장된 얼굴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도입을 세 가지 정도 생각을 해 봤거든. 이건 그냥 막 결정하기가 그래서 다 한 번씩 해보고 제일 좋은 걸로 정하면 좋겠는데, 어때? 정우랑 하진이 한 번 해줄래?”

연출가의 말에 인규와 해성, 영우가 사이드로 빠르게 흩어졌다. 정우는 하진의 뒤로 가서 스태프가 주는 부드러운 끈을 받아들었다.

“첫 번째는 원래 하던 대로 하는데, 정우가 하진이 눈을 끈으로 묶어서 가려주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 인트로를 더 섹시하고, 강렬하게 가면 무대가 잘 살 것 같거든. 인트로 준비한 거 있잖아. 반주 나오면 발소리 하나, 둘, 셋 갈 때 끈을 들고, 그렇지. 그렇게 묶어 주면 비명 나오고… 어, 좋다. 섹시해. 분위기 좋은데.”

연출가의 목소리와 홀에 울리는 반주가 사라지면, 말도 안 되는 정적이 정우와 하진 주변을 맴돌았다. 정우는 실크로 된 끈으로 하진의 눈을 가려 묶은 채 손을 내렸다. 정우의 손이 하진의 목덜미를 살짝 스친 순간 하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두 번째는 하진이 독무처럼 댄서랑 하면 어떨까 싶어. 아까 여기 안무팀에 보니까 정우처럼 키 크고, 딱 눈에 뜨이는 친구 있더라고. 정우가 하면 어쨌든 두 사람한테 집중이 되는데, 한 명이 댄서면 하진이한테만 집중이 되니까 더 극적일 것 같기도 해.”

손을 든 연출가가 스태프에게 아까 그 친구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무대 위에 있던 스태프가 무전기에 뭔가 말을 하며 얼른 뒤로 뛰어 들어갔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댄서 한 명이 나와 하진의 옆에 섰다. 일본 기획사에서 나온 직원이 연출가의 말을 통역해 주었고, 댄서는 정우에게 끈을 받아들고 하진의 뒤에 섰다. 정우는 옆으로 물러선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 와, 이쪽도 그림 좋다. 조명 좀 하진이 쪽으로 더 집중해 주시구요. 네, 좋습니다.”

큰 손이 하진의 눈을 가렸다. 가리는 척이 아니라 완전히 닿은 손에 하진의 몸이 조금 더 뒤로 기울었다. 정우는 완전히 겹쳐진 두 몸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뒤로 기대고, 이름도 모를 남자는 그런 하진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앞으로 밀어 받쳐 주고 있었다.

“…….”

떼어내고 싶었다. 가서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장 꺼지라고, 거기는 내 자리라고 알리고 싶었다. 다시는 하진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 잘한다. 분위기 죽인다. 조금 더 섹시하게 가볼까? 뒤에서 하진이 허리를 잡았다가 올라와서 귀를 막고, 그러다가 눈을 가리고, 입을 막는 거야. 완전히 인질이 된 채 시작하는 거지.”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흥분해 목소리를 더 크게 내는 연출가를 바라본 정우가 입술 안쪽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

낯선 손이 하진의 허리를 잡고, 두 손이 하진의 귀를 막고, 눈 위를 덮었다. 그리고 결국 하진의 입술 위를 덮으며 손이 닿은 순간 정우는 확 뒤돌았다. 뒤에 서 있던 해성이 그런 정우의 어깨를 감쌌다.

“아, 진짜 이 분위기 뭐야. 숨을 못 쉬겠어.”

해성이 몸을 돌리는 탓에 다시 하진 쪽을 보고 선 정우가 인상을 썼다. 뭔가 실수가 있었던 건지 뒤를 돌아 올려 본 하진이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눈을 맞추고 같은 온도의 웃음을 짓는 순간 마음이 확 조여들었다. 이딴 걸 생각이라고 한 연출가도 이딴 공연도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자, 그럼 지금 한 거 정우가 한 번 해보자. 완벽한 인질, 포로, 딱 좋은데.”

자기가 생각하고도 마음에 들었던 건지 흥분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연출가가 정우에게 손짓했다. 정우는 해성이 부드럽게 등을 밀어주는 것에 걸음을 옮겼다. 공손하게 인사한 댄서가 옆으로 비켜났다. 정우는 하진의 뒤에 서자마자 하진의 허리를 두 손으로 확 움켜쥐었다.

“흣…!”

하진의 몸이 움츠러들며 작게 숨이 터졌다. 정우는 그대로 하진의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쥔 채 몸을 밀착했다. 다른 새끼랑 할 때는 잘만 하더니 저랑 닿으니 긴장한 것 같은 하진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 잡고, 올려서 귀 막고… 그렇지, 눈 가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둘 입 위를… 야, 역시 원조는 다르네. 아, 소름 끼쳤어, 지금. 정우야, 너 눈빛 지금 너무 좋았어. 쟤가 냉정한 분위기가 잘 사네. 되게 서늘하다. 화난 건 아니지?”

연출가의 농담에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애써 미소 지으며 손을 내려 다시 하진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몸을 붙이고, 고개를 내려 하진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하, 하지…….”

“가만히 있어요. 싫으면 아까 그 새끼가 안아 준다고 생각하든지.”

“뭐?”

“그럼 얌전할 거 아냐. 아니, 좋아하려나.”

늘 하던 것처럼 뒤에서 하진을 끌어안은 채 정우는 작게 하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입가에 묻은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역시 원조 못 따라가겠다. 정우랑 하진이가 좀 전에 한 버전 그대로 가는 거로 하자. 정우 내일도 그 표정 부탁해. 하진이가 너랑 있어야 좀 더 긴장하네. 연기하는 건가. 댄서랑 할 때는 좀 더 편해 보이거든. 그런데 너랑 하니까 애가 연기력이 늘어. 너희 뭐 있지?”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정우가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며 하진의 허리를 한 번 느릿하게 쥐었다가 완전히 손을 떼었다. 하진이 자유로워진 순간 확 몸을 돌려 정우를 노려보았다.

“왜요. 뭐 문제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그런 하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 죽더라.”

“뭐?”

“나랑 상종 안 하기로 마음먹은 거면 열 받게 하지 말아요. 여기서 박아버리기 전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웃어요, 형. 보는 눈이 많아요.”

씩 웃은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우의 말대로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하진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정우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둘이 다시 한번 인트로 하고, 호스티지 시작하자. 의상까지 입고 하면 진짜 이거 레전드 찍겠다.”

멤버들이 각자의 위치로 가서 자리를 잡는 사이로 정우가 하진을 데리고 움직였다. 다시 앞으로 하진을 세운 정우가 손을 올려 하진의 허리를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을 줄 때마다 하진의 어깨와 목이 움찔댔다.

아까 그 댄서가 잡았을 때도 이랬을 거라 생각하니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정우는 출처 없이 갑자기 터져 나온 감정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에 뒤집어써 버렸다. 머리끝에서 터져 온몸을 적시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감정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 시작하자. 조명 꺼 주세요. 시작하면 2번만, 확인 한 번 할게요. 네. 맞아요. 좋습니다.”

그렇게 무대 위에 조명이 꺼진 순간, 정우는 홀로 켜진 제 뜨거운 감정과 마주했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의 느낌, 다른 멤버가 하진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볼 때의 감정.

“…….”

내 것을 빼앗기는 기분. 그것은 인정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명백한 질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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