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칼을 넘긴 하진이 다시 다가오는 정우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그리고 시끄러운 거실 쪽을 한 번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앞으로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하진의 목소리도 물기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정우는 저를 보지 않고 시선을 내리깐 하진을 바라보았다.

“나랑 그렇게 하고 싶어?”

날카롭게 닿아오는 시선에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

“왜. 내가 너랑 안 한다니까 아쉬워? 말만 하면 매달리고 편했는데, 쉬웠는데 더 이상 그게 안 되니까?”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해요?”

“네가 하는 행동이 그렇잖아. 그거 외에 뭘 어떻게 생각할 수 있어? 너 자꾸 이러면… 나 너랑 같은 방 못 써.”

하진은 말하며 한 번도 정우를 보지 않았다. 저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며칠 만에 사라질 마음도 아니고 접어야지 한다고 딱 접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 놓쳐버리면 너무나도 쉽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아직 견고하지 못한 결심들은 쉽게 무너질 것이었다. 하진은 지금도 괴롭지만, 다시 예전으로는 정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럴 수밖에 없었다.

“못 쓰면요. 형들한테 말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필요하다면 해야지.”

“뭐라고 하게요. 붙어먹다가 틀어져서 더는 같은 방 못 쓰겠다고?”

“뭐라고 할지 못 정했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되겠다. 아니면 네가 대신 말해줄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구는 하진을 보며 실소를 터뜨린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행동까지 달라진 건 솔직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만하면 됐어요. 형 마음 알았고, 이해했으니까 그만 해요.”

많이 봐주고 있다는 듯 말하는 정우를 향해 돌아선 하진이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진지하지가 않았다. 사랑해 주지 않아 단단히 삐져서 이러고 있는 줄 아는 것이었다. 사랑받지 못해 아팠던 마음과는 분명 달랐다.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

“장난 아닌 거 알아요. 내가 형한테 그동안 했던 말, 행동 선 넘었던 거 인정하고, 앞으로 조심한다잖아요. 대화 좀 하자 그래도 안 하고, 피하고 계속 이렇게 분위기 엉망으로 만들 필요까지 있는지 묻는 거예요.”

“너 지금 나한테 어떻게 말하는 줄 알아?”

“…….”

“그래, 힘들었던 거 알아줄 테니까 이제 그만해. 앞으로는 연기하는 척 성의 있게 굴어줄 테니까 봐준다고 할 때 그만해.”

“곡해해서 듣지 말고.”

“곡해까지 할 것도 없어. 네 태도가 딱 그래. 내 눈에는 그렇게밖에 안 보여.”

정우와 저의 온도가 달랐다. 지금 이 상황을, 저의 그 말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서 도저히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같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한 번만 다시 정확하게 말할게.”

“…….”

“앞으로 내가 뭘 하든 상관 안 했으면 좋겠어.”

“…….”

“내가 누구를 만나든,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상관 마. 죄인처럼 몰아가지도 말고, 추궁하지도 마. 무슨 상관이야? 내가 누구랑 뭘 하든.”

덤덤하게 소리 낸 하진이 조금 뜨거워진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더는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

먼저 대화를 끝내고 옆으로 움직인 하진이 침대에 올라 이어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계속 진동이 오는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늘 재밌었다면서 언제 일본에서 돌아오는지, 다음에는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묻는 문혁의 메시지가 계속 오고 있었다. 솔직히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문혁이 좋은 친구인 것은 맞지만, 지금 즐겁게 대화를 할 기분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진은 돌아와서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그래요. 형 마음대로 해요. 마음대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그렇게 해요.”

정우의 목소리가 울리고, 곧 혼자 남겨졌다. 하진은 정우가 나간 문가를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아프지가 않았다. 무너지는 것처럼 아프고 울고 싶어져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뎌질 만큼 무뎌져서 그런 건지, 인이 박여 그러는 건지는 모르지만, 아프지 않아 다행이고, 슬프지 않아 안도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아 조금은 자랐음을 알았다.

***

일본 데뷔 쇼케이스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며 아포제는 도쿄로 출국했다. 한국 공항은 물론이고 일본 공항에도 수많은 팬과 기자가 와 있었다. 일본에서 데뷔하는 기분은 어떤지, 내일 공연은 자신 있는지 묻는 기자들에게 그저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멤버들은 바로 호텔로 향했다.

“머무는 동안 일정이 빠듯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따 인터뷰부터 리허설, 내일은 기자회견, 쇼케이스, 일본 기획사 분들이랑 미팅 겸 식사까지 할 일 계속 있으니까, 긴장 늦추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동안 연습한 거 허사 만들면 아깝잖아. 한 시간 뒤에 바로 인터뷰 장소로 이동할 거야.”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진지한 지창의 말에 긴장과 함께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진은 지창이 내미는 카드키를 받아들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멤버들과 같은 층이었지만, 방은 나란히 있지 않았다. 하진은 정우와 함께 빈 복도를 걸었다. 숙소에서 같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늘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정우와 너무나도 당연하게 함께였다. 불편하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멤버와 방을 같이 쓰겠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당연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카드키를 대고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간 하진은 벽 쪽 침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 쪽으로 간 정우가 모자를 벗어 아무렇게나 놓았다.

“상황 봐서 되면 인규 형 방에 가서 잘게.”

“왜요. 방콕에서처럼 될 것 같아서 그래요?”

“너도 불편하잖아.”

“걱정 마요. 제발 해달라고 매달려도 손 하나 댈 생각 없으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하진을 보던 정우가 욕실로 들어갔다. 하진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침대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시작이나 끝이나 참 어려웠다.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어 더 그랬다. 가짜여도 연애가 끝났는데, 왜 그 순간 마음은 전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왜 연애와 사랑은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왜 사랑하지 않아도 연애할 수 있고, 사랑하지 않아도 섹스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아서 할 수 없는 것은 진짜 사랑 하나뿐이었다. 하진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흐트러뜨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

한 시간 뒤 로비로 내려갈 때까지 정우와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진은 일어 가사를 한 번 더 체크했고, 정우 역시 이어폰을 꽂은 채 하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인터뷰 녹화를 하는 곳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간단히 하고, 인터뷰할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진은 거울을 보며 걱정이라는 듯 인상을 쓴 해성을 바라보았다.

“이상해, 진짜.”

“뭐가요?”

“아니, 똑같이 연습하고, 쉬고, 피곤하고 한데 왜 너희는 다크서클이 안 내려오냐. 난 지금 볼까지 내려왔는데.”

해성이 거무죽죽해진 눈 밑을 과장해서 늘렸다. 그런 해성을 보고 영우가 고개를 저었다.

“지방재배치 해야 할걸. 다시 태어나거나.”

“아, 뭐 그렇게 둘 다 무서워. 수술도 무섭고, 다시 태어나는 것도 무섭잖아. 언제 태어나고 언제 크냐. 겨우 컸는데 지금.”

“야, 더 까매졌어. 저렇게 늘리고 누르고 난리를 치는데 다크서클이 안 생기는 게 이상하지 않아? 멍이야, 멍. 연어색 컨실러도 안 되고 쟤는 연어 붙여야겠다.”

“야, 좋지. 춤추다가 배고프면 먹고.”

“아, 말을 말아야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탄식하는 영우를 보고 웃은 하진이 제 얼굴 가까이 다가와 들여다보는 해성을 보고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깜짝이야. 놀랐어요.”

“너 다크서클 있나 보려고 간 건데 순간 큰일 날 뻔했어.”

“왜요?”

“아니, 진짜 이렇게 예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돈데? 나 순간 두근거렸어. 반한 거 아냐?”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대기실 소파로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해성을 보고 웃은 하진이 소파 한쪽에 앉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또렷하게 닿아오는 시선과 정확하게 마주치는 순간 입술에 묻어 있던 웃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싫은 눈이었다. 못마땅한 시선. 정우의 저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잘못한 게 있는지 되짚어보게 됐다. 습관 같은 일이라 또 지금 제가 뭘 잘못한 게 있는지 뭐가 정우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지 떠올리고 있었다. 하진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인터뷰 이제 시작할 거야. 통역사분께서 잘 통역해 주실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면 돼. 질문은 며칠 전에 준 거 확인했지? 그냥 다 늘 하는 질문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지창의 말처럼 인터뷰 질문들은 틀에 박힌 것들이었다. 데뷔 초에 한국에서도 수십 번 이야기를 했던 것들이라 대답에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하진은 내내 웃는 얼굴로 일본인 리포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일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정우, 하진 이름이 나온 것을 봐서는 저와 정우에 대해 질문을 한 것 같았다. 하진은 통역사를 바라보았다.

“일본에서도 하진 씨랑 정우 씨가 데뷔 전부터 유독 각별한 사이인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라이벌이 될 수도 있었는데, 같이 데뷔하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팬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네요. 연습생 시절, 두 분의 에피소드를 듣고 싶다고 합니다. 하진 씨가 얘기해주시겠어요?”

“아…. 여기까지 저희 사이가 소문나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하진의 말을 통역하자 리포터가 웃었다. 하진은 웃는 멤버들과 같이 웃음이 묻은 얼굴로 옆에 앉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정우의 마이크 든 손을 잡았다.

“에피소드라고 하면 음, 처음 얘기하는 것 같은데요. 정우 씨랑 제가 매일 같이 연습을 했었어요. 둘이 남아서 새벽까지 하고 그랬는데, 하루는 정우 씨가 학교에 일이 있어서 연습을 같이 못 한 날이 있었어요. 당연히 괜찮다고, 학교 일 잘하고 오라고 손도 흔들어주고 보낸 다음에 혼자 연습을 하는데… 집중을 잘 못 했어요. 되던 것도 안 되고, 계속 넘어지고, 박자도 놓치고… 또 밖에서 소리 날 때마다 백 번은 나가본 것 같아요. 정우 씨가 혹시 온 건 아닐까 하구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말 매일 같이하던 정우가 없어서 허전하고, 싫었었다. 밖에서 뭔가 소리가 나면 연습실 문을 열고 빈 복도를 확인했었다. 결국, 그날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에 갔고, 가는 길에 버스에서 조금 울었었다.

“결국, 연습 못 하고 집에 가면서 좀 울었어요. 그동안 연습 열심히 하고 잘해 온 이유 중 반 이상은 정우 씨가 있어서, 같이하는 게 좋아서 그랬던 거구나 그때 알았죠. 아마 이 얘기는 정우 씨도 모를 거예요.”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창피하기도 하고, 그렇게 많이 심하게 의지했다는 것을 알면 정우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마음에만 내내 담아두었던 지난날의 이야기였다.

“부끄럽네요. 말하고 나니까.”

하진은 저를 바라보는 정우와 눈을 마주했다. 정우의 놀란 눈동자가 꼭 예전 같아서 신기했다.

“울었어요?”

정우의 돌발질문에 통역사가 통역을 하고, 일본인 리포터가 흥미롭다는 듯 무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우 씨도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응. 울었어. 너 없어서.”

“왜 말 안 했어요?”

“지금 하려고 안 했지.”

잘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하진은 농담처럼 말하며 시선을 먼저 피했다. 제가 시선을 돌렸는데도 계속 닿아오는 시선에 속이 울렁거렸다. 하진은 인터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한 번씩 닿아오는 정우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도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