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92화 (92/122)

#92

일본에서 오면 전화해! 문혁의 목소리가 주차장으로 흘러나왔다. 하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문혁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수석 문을 닫았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까만 차가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정우는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다가 팔을 빼내는 하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화 왜 안 받아요.”

“오는지 몰랐어.”

“무슨 짓거리를 하느라 전화 오는지도 몰라.”

낮게 깔린 정우의 목소리에 하진은 화가 난 것 같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보안이 철저히 된 공간이라고 해도 어디든 보는 눈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서 얘기해.”

먼저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누른 하진이 열리는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하진을 노려보던 정우가 성큼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말해요. 무슨 짓거리를 하느라 못 받았는지.”

휴대폰을 꺼내 본 하진이 화면에 뜬 어마어마한 숫자의 부재중 통화를 확인했다. 전부 정우에게 온 것이었다. 예전이라면 분명 기뻤을 흔적들이 지금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어.”

“언제부터 무음으로 해뒀다고.”

“오랜만에 친구 만난 거잖아. 방해받기 싫어서.”

“방해?”

“…응. 방해. 그리고 딱히 오늘은 중요한 연락 올 곳도 없었고.”

하진은 마스크를 내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능숙하게 얼마 전 바꾼 패스워드를 눌러 문을 열었다. 하진이 들어가자 거실에서 게임을 하던 멤버들이 빠르게 하진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으로 열렬히 인사했다.

“왔어?”

“빨리 왔네? 나 지금 죽을 것 같으니까 이따, 이따… 아, 형! 좀 봐줘요, 안 돼, 아!”

“피곤하겠다, 쉬어. 하진아.”

시끌시끌한 형들을 향해 간단히 대답한 하진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으로 따라 들어와 문을 닫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반응하는 마음이 미웠다.

“갑자기 정문혁은 왜 만나요?”

“그때 방콕에서도 못 보고, 일본 가서 며칠 있다 온다니까 그전에 만나자고 해서 나갔어. 이유도 없는데 계속 못 나간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오늘은 나가고 싶기도 했고.”

“내가 만나지 말랬잖아요.”

“…그래서 그때는 안 만났잖아, 결국.”

“형 보는 그 새끼 눈 이상하다구요.”

“말 함부로 하지 마. 내 친구한테 새끼니 뭐니. 듣기 좀 그래.”

귀에 걸린 마스크를 완전히 빼낸 하진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몇 번 털었다. 그리고 씻기 위해 갈아입을 옷을 꺼내려 서랍을 열었다.

“지금 그 새끼 편드는 거예요?”

“함부로 말하지 말랬지.”

“왜. 붙어먹고 나니까 욕먹는 거 못 참겠어?”

하진은 옷을 꺼내려다 말고 정우를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뭘까. 섹스 파트너를 빼앗긴 것 같아 이러는 걸까. 정우가 다른 사람들과 저를 성적으로 엮어 말할 때마다 수치심과 함께 정우를 향해 있던 곧은 마음이 자꾸만 무너져 그 바닥을 드러냈다.

“…넌 정말 나를 그렇게밖에 생각 안 하는구나.”

“…….”

“이해 못 하는 건 아냐. 네가 나랑 한 건 섹스밖에 없으니까, 다른 사람도 다 나랑 섹스하고 다니는 줄 알겠지.”

“…….”

“그리고 네 말대로 붙어먹으면 안 돼? 왜? 그거 이제 그냥 내 사생활이야. 너랑 상관없는 일.”

선을 긋는 하진의 말에 이번에는 마음이 뒤집혔다. 정우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다시는 저런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다.

“전화는 왜 했어? 뭐 급하게 할 말이라도 있었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와 불빛 아래 놓인 하얀 얼굴이 화가 나는 와중에도 예뻤다. 빛을 모아 담는 것 같은 속눈썹도, 노려보는 눈동자도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도 전부 사람을 돌게 했다. 저 모든 것을 문혁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서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다시는, 다시는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끔찍한 생각을 하면서도 하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우는 빛을 머금어 투명히 안까지 보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하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형한테 할 말이 뭐가 있겠어요.”

“…….”

“머릿속에 섹스밖에 없는 새끼가 나라며.”

“…….”

“맞아요. 형이 정문혁이랑 뒹굴까 봐 계속 걸었어요.”

하진이 뒤로 밀렸다. 반쯤 열린 서랍이 닫히고, 그대로 몸이 완전히 밀착된 순간 정우가 하진의 몸에 닿았다. 정우의 손이 하진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비틀어 빼내려는 순간 조금 더 힘이 실렸다. 강압적으로 고개를 들게 한 정우가 강제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내렸다.

“…….”

“…….”

가까운 곳에서 속눈썹이 문질릴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순간, 너무 가까워 초점이 어긋났다. 이 순간에도 끝까지 저를 노려보는 그 눈에 심장이 뻐근해졌다. 정우는 그대로 하진의 입술을 머금었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혀를 넣어 미처 숨지 못한 혀끝을 문지르자 하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오니 미약한 술 냄새가 났다. 정우는 달큰하게 느껴지는 그 기운을 혀끝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술 마셨네.”

쏟아지는 숨을 전부 집어삼키듯 하진의 입술을 머금은 정우가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혀가 뒤엉키고, 문질릴 때마다 하진은 정우를 밀어냈다. 정우는 하진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집요하게 그 입술이 도망친 쪽으로 가 다시 머금었다. 결국, 포기한 듯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하진의 입술을 깊게 파고든 정우가 한참이나 그 달큰한 숨을 머금으며 키스했다.

“다른 새끼랑 술 마시지 마. 취하면 무슨 소리 해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섹스하고 싶어, 키스해 줘, 만져 줘. 좋아, 더 해 줘.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노골적인 말들을 해오며 매달리던 하진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을 다른 누가 본다고 생각하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열이 몰렸다. 정우는 다시 거칠게 그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한참이나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고여 있던 숨이 흘러나왔다. 하진은 잔뜩 젖은 입술로 내내 제대로 쉬지 못하던 숨을 내쉬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을 오므리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아…….”

겨우 눈만 내리뜬 채 숨을 고르는 하진을 바라보던 정우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뜨거운 숨이 흐르는 것을 혀끝으로 전부 맛보듯 헤집은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만해.”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 정우의 어깨를 밀어낸 하진이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분위기에 넘어가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섹스에 화가 풀리고,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그런 전개를 원하지 않았다.

“왜요. 형도 하고 싶잖아요.”

나가지 못하도록 손목을 쥔 정우를 본 하진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맞아. 네가 키스해서 더한 짓도 하고 싶어. 그동안 계속 그랬으니까. 아마 네가 안 놔주고 계속하면 나도 그냥 하게 될 거야. 흥분할 거고, 기분도 좋겠지.”

“…….”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 순간이 지나면, 난 널 보는 게 더 괴로워질 거고, 같은 방에 있는 것도 고민하게 될 텐데.”

“…….”

“나랑 섹스하고 싶어?”

“…….”

“왜?”

잘만 나오던 말이 또 멈추었다. 정우는 하진이 왜? 라고 물을 때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한테 왜 이래? 왜 자꾸 같은 말을 하게 해? 왜 전화했어? 왜 문혁이를 만나는 게 싫어? 나랑 왜 섹스하고 싶어?

수많은 ‘왜?’에 단 하나의 답도 하지 못했다. 정우는 결국 쥐고 있던 하진의 손목을 놓았다. 하진이 손을 들어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넘겼다.

“…나 화난 것도 아니고, 삐진 것도 아니야.”

“…….”

“그냥 우리 관계가 달라졌을 뿐이야. 이 상태에 익숙해졌으면 좋겠어.”

“…….”

“부탁할게.”

몸을 돌려 서랍을 다시 연 하진이 옷을 꺼내 정우의 옆을 스쳐 지났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우는 어디엔가 걸려 있던 숨을 그제야 내뱉었다. 여전히 ‘왜?’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하진이 없는 방에 앉은 정우는 ‘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저는 하진과 섹스하고 싶을까. 기분이 좋아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쾌감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그 이유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라고도 할 수 없었다.

“…….”

하진이 문혁을 만나는 건 왜 싫을까. 정문혁이 하진에게 친한 척을 해서? 그럼 친한 척을 하는 게 왜 싫을까. 친한 척이 아니라 그냥 친한 건 아닐까? 강하진이라는 사람에게 친한 사람이 있는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닌가? 인규와 해성, 영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하진과 가까운 게 싫었다. 단순히 하진의 인간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고 싶어서라면 왜 인규와 해성, 영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도대체 왜.

눈에 보이니까. 무슨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니까. 확인할 수 있으니까. 모두의 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니까.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답들이 흘러나왔다. 정우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

하진에게 친한 사람이 있는 게 왜 싫을까. 가장 단순한 질문이었다. 정우는 그 단순한 질문에 어울리는 가장 단순한 답을 꺼냈다.

하진은 저와 가장 가까워야 하니까.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누군가가 갉아먹으며 조금씩 파고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고, 쉽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방콕에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질투. 정우는 결국 그 단어를 소리 내고야 말았다. 죽어도 가져다 붙이고 싶지 않았던 그 말을.

“…….”

문혁을 질투했다. 저와의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제가 모르는 시간을 하진과 보내는 정문혁을. 쓰레기 같은 상상을 해대며 스스로를 갉아먹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정문혁을, 하진의 친구를 질투하는 걸까?

“…….”

정우는 그것에 대한 답을 회피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방 안에만 있으면 사람이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거실로 가서 멤버들이 노는 모습이라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앉아 생각하던 정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

“…….”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걸까. 정우는 안으로 들어오려고 몸을 기울인 하진과 마주했다. 저는 문 바깥으로 몸을 기울이고, 하진은 문 안쪽으로 몸을 기울여 쉽게도 서로의 몸이 마주 닿았다.

늘 제가 담겨 있던 매끄러운 눈동자가 쉽게도 시야를 벗어났다. 정우는 제가 나갈 수 있게 피해 주려는 하진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멤버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울리며 맴돌았다.

“형이 뭐라 해도 상관없어요. 왜냐고 물어도 난 대답 안 해요. 모르니까.”

“…….”

“그래도 난 지금 형한테 키스할 거예요.”

“…….”

“하고 싶으니까.”

하진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잡은 정우의 손목을 쥐었다. 정우는 하진이 그 손을 밀어내기 전에, 뭐라고 답을 하기 전에 서둘러 그 입술을 머금었다. 제 손목을 쥔 하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가 게임에서 이겼는지 환호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탄식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나마 안전한 문 안이 아니라 바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우는 하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

하진의 젖은 머리칼 끝에 맺힌 물방울이 정우의 뺨을 타고 눈물처럼 흘렀다. 정말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에 대한 답은 여전히 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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