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91화 (91/122)

#91

하진은 죽고 싶지 않았다. 정말 가짜여서 그런 걸까.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관계가 끝났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는데 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물론 고통스럽기는 했다. 정우를 보면 마음이 찌릿거리고, 저에게 이유를 묻는 정우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애초에 정우는 저의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머릿속에 서리가 내렸다.

종일 일본 데뷔 싱글 연습을 하고, 한국에서 낼 미니앨범 준비를 하면 하루가 지났다. 정우와 어쩔 수 없이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 사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은 거의 없어 다행이었다.

“하니까 되긴 되네. 죽어도 안 외워질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저 어제 일어 버전으로 노래하는 꿈 꿨어요.”

“헐, 나도! 난 거의 매일 꾼다니까. 자면서도 와, 내가 꿈에 일어로 노래를 다 하네. 생각도 들어.”

“어, 저두요. 일어로 너무 잘 불러서 꿈인 거 알았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 강하진은 내일모레 당장 아랍어로 노래하라 그래도 마스터 해서 할 사람인 거 다 아는데.”

해성과 웃으며 숙소로 들어온 하진이 아까부터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누가 그렇게 난리야?”

“문혁이요. 모레 일본 간다니까 가기 전에 보자구요.”

“걔도 정말 짝사랑이다, 짝사랑이야. 애가 끈질겨.”

“방콕에서 못 만난 게 아쉬웠나 봐요.”

“한 번 만나줘라, 줘.”

오늘 밤에 시간이 되는지 묻는 문혁의 메시지에 잠시 고민한 하진이 될 것 같다는 답을 보냈다. 차일피일 만나는 것을 미루다가 어색해지느니 그냥 잠깐이라도 보고, 마음이 편해지는 게 낫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고생이네. 어떻게 인터뷰 영상에서 정우 부분만 사라져?”

“그러게요.”

“똑같은 말 또 하는 거 보통 일 아닌데.”

일본 데뷔 쇼케이스에서 쓸 영상 중 정우의 인터뷰 부분만 깨끗하게 삭제가 되었다고 했다. 한 번만 더 부탁한다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와서 내내 사과하는 스태프를 달래고, 남아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전이었으면 인터뷰하는 동안 같이 있다가 왔을 텐데, 오늘은 그냥 해성과 같이 숙소로 먼저 왔다. 이렇게 하나씩 너무나도 당연했던 행동들을 바꾸고 싶었다.

“형, 저 이따 문혁이 좀 만나고 올게요.”

“드디어 문혁이 소원 푸는구나. 걔 차 샀댔지?”

“네. 이 앞으로 와서 전화한대요.”

“그래, 그럼 잘 놀고 와. 늦으면 전화하고. 난 좀 씻어야겠다.”

“네. 그럴게요.”

미리 손을 흔들어 인사한 해성이 욕실로 들어갔다. 하진은 소파에 앉아 출발했다는 문혁의 메시지에 알았다고 간단히 답했다. 숙소가 그리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것이었다.

“…….”

정우에게 말해야 하는 건 아닐까. 너무나도 당연한 순서처럼 정우가 떠올랐다. 제가 문혁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고, 또 그 연락을 받는 것조차 싫어했던 게 선명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방콕에서도 밤에 그 약속을 나가려다가 잡혀 내내 섹스했었다.

“…….”

분명 문혁을 만나러 나간다고 하면 싫어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정우의 의견을 물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나가는 것도 아니고 해성에게 말을 한 이상 더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진은 턱 밑으로 내렸던 마스크를 올려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까지 들어왔다는 문혁의 메시지를 받고 아래로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정말 문혁의 차가 있었다. 창을 열고 애처럼 손을 막 흔든 문혁이 빨리 타라고 하진을 불렀다. 하진은 웃으며 조수석에 올랐다. 뭔가 데뷔한 뒤에 이렇게 나와 다른 가수 친구를 만나는 자체가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다. 그동안 뭘 했나 생각하니, 늘 정우를 생각하고, 정우하고만 시간을 보냈었다. 그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닌데, 지금 이렇게 정우가 없는 시간을 타인과 보낸다는 게 낯설게 느껴져 이상했다.

“드디어 강하진 영접!”

“미안해. 나온다고 말만 하고 매번.”

“바빠서 그런 건데 뭘.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응.”

하진은 모든 것을 문혁에게 맡겼다. 문혁은 하진과 편히 식사하고 얘기할 수 있는 식당을 예약이라도 한 건지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찾아가 안내했다.

“여기 가끔 친구들이랑 오는데 좋아. 맛도 있고, 조용해서 얘기하기도 좋고. 팬들도 절대 못 들어와.”

“조용해서 좋다.”

“그치.”

메뉴를 보고 주문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테이블 위에 가득 놓였다. 하진은 아주 가볍게만 한잔하고 싶어 주문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정우 허락받고 나왔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차정우 나 싫어하잖아.”

“정우가? 아니야.”

“뭐가 아니야. 내가 너한테 말만 해도 걔 완전 난리 나잖아. 너랑 사귀는 줄 알았다니까.”

문혁의 말에 하진은 맥주가 목에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문혁의 눈에 그렇게 보일 줄은 정말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에 방콕에서 너 못 나온다고 했을 때 그런 얘기 나온 적 있거든. 너 정우 때문에 못 나오는 거 아니냐고.”

“…….”

“난 나만 느끼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애들도 다 그러더라. 차정우 무서워서 너한테 말도 못 걸겠다고.”

“에이, 너무 나갔다. 그런 거 아니야. 오해겠지.”

“나만 하면 오해지. 그런데 다들 그랬다니까. 내가 걔 떠보려고 일부러 너한테 더 말 걸잖아. 차정우가 옆에서 진짜 존나 노려본다니까.”

제가 문혁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정우가 싫어하기는 했었다. 방콕에서도 그랬고, 그 전에 대기실이나 다른 곳에서도 늘 정우는 제 친구들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건지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다들 이렇게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걔 브라콤 아니야?”

“브라콤?”

“브라더 콤플렉스인가. 형한테 집착하는 거.”

농담이라고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이 재밌게 들리지가 않았다. 하진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문혁을 바라보았다.

“그런 애 아니야. 너희가 뭔가 오해했겠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하진을 본 문혁이 얼른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우 편을 드느라 앞에 있는 친구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졌다. 하진은 그렇게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다.

***

인터뷰를 다시 마친 정우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하는 스태프를 달래주었다. 기껏 한 촬영을 다시 한 것은 귀찮은 일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과한 사과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끝났어?”

“네. 형들도 다 끝났어요?”

“응. 왜 멀쩡하던 인터뷰가 지워지고, 녹음이 이상해진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얼른 가자. 해성이랑 하진이는 아까 갔어.”

“…네.”

평소라면 다른 멤버들은 없어도 이 자리에 하진은 있었을 것이었다. 연습생 때부터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면 늘 서로의 옆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부탁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진은 이곳에 없었다.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도 내내 옆의 빈자리가 신경 쓰였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하나둘 비기 시작하자 신경이 곤두서고, 몸 어디인가가 비어버린 것 같아 신경 쓰였다. 불편한 기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이제 와? 고생들 했어. 뭔 일이야, 갑자기 지워지고. 그 와중에 내 건 살아 있는 게 기적 아님?”

자랑하듯 씩 웃는 해성을 본 정우가 불이 꺼진 방을 한 번 보고 거실을 눈으로 살펴보다가 몸을 조금 기울여 거실을 보았다.

“하진이 형은요?”

“아, 하진이. 문혁이 만나러.”

“네?”

듣고도 쉽게 이해가 안 갈 말이었다. 아니, 믿을 수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게 더 맞았다. 정우는 제가 들은 말이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런 정우를 보며 해성이 친절하게 하나씩 풀어 말해주었다.

“우리 낼모레 일본 간다고 그 전에 보고 싶었는지 직접 차 몰고 와서 하진이 모셔갔다. 그렇게 하진이, 하진이 노래를 부르더니 드디어 꿈을 이룬 거지. 정문혁 오늘 일기 쓰는 거 아니냐?”

해성의 말에 웃은 인규와 영우가 그동안 문혁이 하진에게 공들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우는 쏟아지는 가벼운 말들을 들으며 미간을 구겼다. 표정 관리를 할 생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다.

“언제 갔어요? 어디로요?”

“한 시간쯤 전에? 어디 갔는지는 모르지.”

애써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춘 정우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불을 켜자 비어 있는 하진의 침대가 보였다. 정우는 하진과 문혁이 단둘이 있을 것을 떠올리며 작게 욕을 내뱉었다.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진을 보기만 하면 웃으며 다가오는 것도 싫고, 와서 하진의 팔이나 어깨, 뺨이나 목덜미 같은 곳을 만지는 것도 싫었다. 자꾸 만나자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도,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싫었다. 어디인지 모를 곳에 둘이 마주 앉아 웃고 있을 것을 떠올리니 머릿속이 뒤집혔다.

“…….”

휴대폰을 꺼내든 정우가 하진의 번호를 막힘없이 반쯤 누르자 저장된 이름이 나타났다.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누른 정우가 연결음을 들으며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

“…….”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안내음이 나오는 순간 또다시 작게 욕이 흘러나왔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또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하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안 받는 걸까. 받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받고 싶지 않아 일부러 안 받는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집혔다.

술을 마시는 걸까. 술 약해서 금방 취할 텐데. 얼마 전 멤버들과 다 같이 회식하던 날이 떠올랐다. 금세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키스해 달라고 매달리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울 것 같은 눈을 감고, 입술을 머금던 그 열기, 문질리던 혀끝과 결국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뒤엉키던 그 감각들이 선명했다.

“…….”

취해서 정문혁과도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끌어안고, 매달리고 섹스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정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튀었다. 하진이야 취해서 그런다고 쳐도 정문혁은 그런 하진을 가지고 놀지도 몰랐다. 정우는 다시 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진은 여전히 받지 않았다.

“씨발, 진짜.”

아무렇게나 휴대폰을 집어 던진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성에게 정문혁 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대신 어디인지 물어 봐주기를 부탁해야 하는 건지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

왜 이렇게 싫은 걸까. 단순히 친구를 만나러 간 것뿐일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가장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나 외에 다른 사람과 더 가깝게 지내는 것을 봐버린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 정우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한 시간이 겨우 지났을 때, 정우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무의미하게 흐르는 연결음은 결국 하진의 목소리를 데려오지 못했다. 짜증이 나다 못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정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숙소를 나섰다. 차로 데리고 갔으면, 주차장까지 들어와 내려줄 것이었다. 그렇게 주차장으로 내려간 정우가 한기가 도는 그 창백한 불빛 아래에서 주차장 입구를 노려보았다.

“…….”

그렇게 몇 대의 차가 들어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때쯤, 차 한 대가 더 들어왔다. 정우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 차가 정문혁의 차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정우의 예상대로 차는 정우가 선 앞까지 와서 멈추었다. 곧 조수석 문이 열리고 하진이 내렸다.

“조심해서 가. 태워다 줘서 고마워.”

몸을 숙여 문혁에게 인사하는 하진을 본 정우가 그대로 그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놀란 하진이 문을 닫지도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정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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