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89화 (89/122)

#89

그토록 바라온 관계를 스스로 끝냈다. 미친 듯 아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하고, 또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생존자 발견!”

갑자기 생각을 깨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해성이 보였다. 하진은 옆으로 와서 저를 한 번 장난스럽게 끌어안고 앉는 해성을 보고 웃었다.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정말 괜찮은 모양이었다.

“속은 좀 어때.”

“괜찮아요. 형은요? 형도 어제 많이 취했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랬던 것 같은데.”

“야, 하진아. 형이 무슨 많이 취해. 꽐라 됐지.”

씩 웃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해성을 보고 웃은 하진이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방콕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그 비행기 안에서 정말 내릴 때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내내 잠만 잤었다. 갈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올 때는 더 심했다. 공연도 공연이고, 몸이 쉽게 회복하기 힘들 만큼 섹스를 해댄 탓에 도저히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타자마자 마스크를 올리고 창 쪽으로 머리를 기대고 잤었다. 그런데 내리기 전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정우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잘 잤어요?」

놀라 고개를 들고 본 정우의 눈빛은 꼭 예전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에 활주로를 굴러가는 바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또 저도 모르게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방콕에서 그렇게 사랑해 미칠 것 같은 사람들처럼 내내 엉키고 또 엉켰었으니까 뭔가 달라졌을 거라고 착각했었다. 미안하다고, 어깨 아프지 않냐고 묻는 저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젓던 그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그만 착각해버렸다.

착각도 습관인 게 아닐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매번 이러는 걸까. 저처럼 바보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형.”

“응?”

“형은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 뭐 사귀는 사람?”

“…네.”

“지금은 없지. 있는데 쉬는 날 이러고 있겠냐. 데뷔하고 누구 사귄 적 없어. 여유도 없고, 스캔들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나는 뭐 내가 한 거니 그렇다고 쳐도 팀 이미지까지 박살 나니까.”

박살이라는 말을 중얼거린 하진이 쿠션 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외부인도 아니고 같은 팀 멤버, 남자. 해성이 말한 박살 중 가장 큰 박살이 날 일이었다. 제가 한 사랑은.

“아직은 팀이 더 중요해. 연애야 뭐 나중에 하면 되지.”

“…….”

“뭐야. 강하진 누구 생겼구나.”

좋은 소식을 물었다는 듯 고개를 든 해성이 하진을 보며 돌아앉았다. 의심하는 얼굴의 해성을 보고 웃은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럼 저도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긴. 아, 우리 팀 애들은 왜 이렇게 다 재미가 없냐. 아무튼, 누구 생기면 바로 말해. 그래야 형들이 가드 쳐주지.”

그냥 네, 대답하면 되는데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하진을 도와주기라도 하듯 방에서 나온 인규가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잤더니 더 힘들다.”

“저도요. 저 깼다가 다시 들어가 누웠는데 눕는 것도 힘들어서 나왔잖아요. 아, 심심해.”

“마트나 갈래? 저녁 해 먹자.”

“어, 좋아요! 매운 거 어때요?”

“콜. 좋아. 준비해, 그럼.”

소파에서 튕겨 일어나는 해성을 본 하진이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뭐 할까요?”

“하진아, 숨 열심히 쉬고 있어.”

씩 웃은 해성이 하진의 머리칼을 부스스하게 헤집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해성을 보고 웃은 하진이 다시 순식간에 밀려드는 상념들과 마주하며 소파로 앉았다. 이 벽 너머 방에 혼자 있을 정우가 떠올랐다. 문을 막고 서던 그 얼굴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그 눈이 떠올랐다.

뭐가 그렇게 충격이었을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 이상 저와 섹스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 외에는 정우가 받을 충격이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다른 시작, 다른 감정으로 뒤섞인 몸이 아니었던가.

전에는 그거라도 좋았지만, 이제는 아닐 뿐이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일도, 심각하게 파고들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땅을 파고 있는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 순간에도 제가 아니라 벽 너머를 떠올리고 있는 그 마음을 할 수만 있다면 숨기고 싶었다. 저도 찾을 수 없는 아주 깊은 곳으로.

「지금 복수하는 거예요?」

복수라도 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정우는 알까. 그 복수라는 말에 또다시 무너졌다는 것을. 손을 벌려도 쥘 게 없었다. 몇 번이고 부서진 파편들은 가루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형체가 없어 기댈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었다.

“…….”

하진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익숙한 어둠과 마주한 순간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

인규와 해성이 마트에 간다고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히 씻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나온 영우가 숙소 근처까지 온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나갔다. 정우와 단둘이 숙소에 남는 게 조금 어색해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하진은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진은 현관에서 뒤돌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바라지 않던 순간과 맞닥뜨린 순간 머리가 아파 왔다.

“…….”

“…….”

그대로 방을 나와 다른 방이 있는 쪽으로 성큼 간 정우가 문을 열어 방 안을 확인했다. 하진은 그런 정우의 행동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뭘 하는 건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방을 전부 살피고 부엌과 다용도실까지 문을 열어 살핀 정우가 하진에게 다가왔다. 하진은 그제야 정우가 집에 누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해요, 얘기.”

“…난 아까 다 했어.”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건데요.”

“…왜 화내는 거야?”

하진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끝내는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왜 이유를 찾고 화를 내는 건지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어디부터 살펴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화내는 거 아니에요.”

“계속 같은 말 하고 있잖아. 난 이제… 그만하고 싶어. 구걸해서라도 네 마음… 아니, 마음 준 적 없으니까 마음은 아니지. 네 주의를 끌고 싶었는데, 이제… 그러고 싶지가 않아. 이렇게 해서 이어가는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왜 의미가 없어요.”

“그럼 그게 너한테는 무슨 의미가 있는데?”

하진의 물음에 정우는 대답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소리 내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정우를 보던 하진이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나한테는 그래, 의미 있지.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라도 붙들고 있을 수 있으니까 좋을 거 아냐. 만족할 거야. 너랑 잘 때마다 좋을 거고, 이렇게 하다 보면 너도 날 사랑해 주지 않을까 매번 나도 모르게 기대할 거고, 실망하면서도 또 다독여서 새로운 기대를 만들어 낼 거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다고 나를 혼내고… 그러겠지.”

“…….”

“그런데 넌? 정우 너한테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

“팀 이야기 빼고 말하려니까 할 말 없는 건 아니고?”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하진은 정우가 할 말들을 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이 관계가 끝나버리면, 사람이니 어색해질 거고, 사이가 전처럼 가깝지는 못할 것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주변에서 눈치를 채게 될 거고, 팀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하진은 대답하지 못하는 정우를 보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강하진한테서 팀을 빼면… 너한테는 뭐가 남아?”

“…….”

“전처럼 친하고 잘 맞는 형도 이제는 아닐 거고… 편하게 섹스할 수 있는 거?”

“내가 강제로 형한테 하자 그랬어요?”

“아니. 내가 하자 그랬어. 내가 하고 싶었고, 내가 하자 그런 거 맞아. 그래 왔는데 이제 안 그러겠다고 그 말을 하는 거야.”

“…….”

“넌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싫어했잖아. 지긋지긋하고 짜증 나는 감정이었잖아. 그만둔다는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이러는 거… 이해 안 가.”

정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진은 정우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것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던 정우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그래요, 그럼.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형이 날 좋아해서 제정신 아니게 굴 때마다 달래고, 수습하기도 귀찮았는데 정신 차렸다니 잘된 일이에요.”

“…….”

하진은 가까이 다가오는 정우를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우가 더 큰 보폭으로 가까이 다가와 하진의 턱을 쥐었다.

“하고 싶을 때 형도 말해요. 우리 잘 맞았잖아.”

마음속에 그어진 끝이라는 선조차 무너졌다. 저의 감정이 이 모든 상황의 시작점이기에 그 감정을 매듭짓는 것도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정우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사과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식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정우는 제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섹스하고 싶을 때 해주기는 하겠다는 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형이 해준다면서요.”

“…….”

“맞아요. 나, 형이랑 자는 거 포기를 못 하겠어서 그래. 그 이유 말고는 없잖아요.”

“…….”

“형 말대로 내가 형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그대로 손을 들어 제 턱을 쥔 정우의 손을 잡아 던진 하진이 놀란 정우를 바라보았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건 네 마음인데, 그런 나를 우습게 보는 건 이제… 안 참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탁 끊어졌다. 끊어진 끈 같은 것이 심장 여기저기를 아프게 치고 움직이다가 축 늘어졌다. 그것은 가까스로 잡고 버티던 희망이기도 하고, 기대이기도 하며,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사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말 바꿔서 미안한데, 아까는 너랑 잘 수 있을 거 같았어. 사랑이라는 게 한순간에 사라지는 거 아니니까.”

“…….”

“그런데 나 이제 너랑 섹스 안 해.”

“…….”

“난 너랑 달라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섹스해 주고 그런 거 못 할 것 같아.”

“…….”

“생각보다 힘든 일이구나, 그거. 그동안 나랑 섹스도 해 주고, 키스도 해 주고, 연애까지 해 줘서 정말 미안했어.”

시야가 선명해졌다. 늘 뿌옇게 한 겹이 덮여 있었는데 더는 그 막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진은 아주 오랜만에 정우의 선명한 얼굴을, 그 표정을 눈에 담았다.

“앞으로 괴롭히는 일 없을 거야.”

“…….”

“이제 제정신이거든.”

단단하게 뭉치고 싶어도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발을 적시고, 머리끝까지 차올라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던 마음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지친 걸까, 상처 받은 걸까. 하진은 가만히 정우의 얼굴을 보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모든 게 너무나도 선명했다. 늘 힘이 빠지고 무기력하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푹 절여져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지 못하던 시간과는 분명 달랐다. 하진은 상담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저의 소리에 집중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 말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틀어질 관계라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

하진은 깊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의 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분명한 것은 얼마 전부터 무조건 애정만을 갈구하던 저의 소리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

이건 사랑이 아니야. 이제 그만하자. 몇 번을 물어도 나오는 소리는 같았다. 하진은 저의 폐허에서 울리는 메아리 같은 소리 사이에서 황량히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렇게 쓸쓸했지만, 다정했던 사랑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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