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88화 (88/122)

#88

처음 보는 눈이었다. 지친 눈을 본 적도 있고, 감정의 불에 타 모든 것이 사라진 눈동자를 본 적도 있지만, 지금 저런 눈은 처음이었다. 정말 모든 것을 비운 것 같은 눈동자에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얼굴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늘 그랬잖아.”

“…….”

“너는 팀만… 보이잖아. 그래서 이 연애도 해준 거잖아. 팀 지키려고 널 희생한 거잖아.”

“형.”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말에는 내내 덤덤할 수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말에는 자꾸 흔들렸다. 하진은 마른 입술을 꾹 물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너도 지겹겠다. 내가 자꾸 같은 말만 하니까.”

“갑자기 왜 그래요.”

“…갑자기?”

“몰랐던 거 아니잖아요. 내가 형 사랑한다고 속였어야 해요? 더 철저히 연기했으면 지금 형이 괜찮을까요?”

“…….”

조금 슬프기는 해도 화가 나지는 않았었는데, 정우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진은 말라붙은 입술을 떼며 조금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정말 연기라도 하지 그랬어.”

“…….”

“그랬으면 성의라도 있어 보였을 텐데.”

갑자기 왜 이러냐는 말에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 하진은 한기가 들고 떨리기 시작하는 몸에 깊게 눈을 감았다. 그래도 저의 이런 말은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연민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작이야 허락받을 무엇도 없이 멋대로 시작했다지만, 끝은 잘 내고 싶었다.

더는 감정에 파묻혀 울고 싶지 않았다. 기대도 없던 마음이 또다시 기대로 물들고, 정우만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집착하고, 매달리는 저를 보며 짜증 난다고 말하고, 귀찮은 눈을 하는 정우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있던 사랑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힘들게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만, 저의 이 이기적인 감정을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정우는 괴로워도 저는 행복했었다. 저의 이 사랑이 정우를 삐딱하게 만들고, 서로의 관계를 기형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염치도 없이 행복했었다. 울면서도 정우가 몸을 만져줄 때면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정우 얼굴 한 번을 보지 못해도 마냥 좋았었다.

하지만 점점 그걸로 만족이 되지 않았다. 얼굴을 보고 싶고, 웃어줬으면 좋겠고, 진짜 연애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진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잠시라도 있었으면 했다. 하진은 연애해 주는 정우와 함께 있으며 행복하지 않았다.

“…널 괴롭히는 거 알면서도 난 내가 행복하니까 버텼어. 난 그냥 너만 있으면 좋았거든.”

“…….”

“그런데 이제 아니야.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아. 네가 해줄 수 없는 것만 바라게 되고… 그래서 너를 자꾸 괴롭혀.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지? 너한테 사랑도 못 받는 나 같은 거… 끔찍해. 나 숨 쉬면서 그런 생각을 해.”

“…….”

“…이제 나도 행복하지가 않아. 그래… 달래려고 그냥 재우려고 지나가는 말로 한 그 말 하나에도 나는 서운하고, 네가 날 사랑했다면 지켰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 그래서 깬 너한테 다정한 말을 못 했어.”

바라는 게 많아질수록 마음은 비좁아지고, 감정은 오목해졌다. 지쳤고, 질렸다.

“깨자마자 나한테 그런 말 들은 너도 짜증 났을 거야. 알아.”

“…….”

“…의미가 어떻든 연애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난 답이 없나 봐. 그러니까 이제 정말 그만하려고.”

하진은 덤덤히 말했다. 눈물이 마구 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저에게 닿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숨을 내쉰 하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정우의 얼굴이 꼭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당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정우 네가 원하던 대로 된 거잖아.”

“결국, 말실수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 맞네.”

“말실수?”

“나도 모르게 헛나온 말이에요.”

“진짜 연애하는 사람들도 안 한다는 말을?”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고,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맴돌았다. 그 고요를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하진이었다.

“…넌 내가 우습지. 싫다는 사람한테 섹스라도 해달라고 매달리고, 그래도 좋다고 하는 내가 우습지. 지금도 그래서 그러는 거잖아.”

“형 우습게 본 적 없어요.”

“그럼 내 감정이 우스워?”

“…….”

정우의 눈을 마주한 하진이 이제 알았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제가 가진 감정, 몸이 활활 타버릴 것처럼 뜨겁고, 받지 못하면 죽는 게 낫던 그 감정이 정우에게는 그저 가볍고 우스운 사랑놀음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또다시 무너졌다.

“…어이없다고 생각할 거 알아. 갑자기 뭐 그런 말 하나에 이러나 싶기도 할 거야. 얼마나 가나 보자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데 정우야.”

“…….”

“…너한테 직접 진짜가 아니라는 걸 확인받은 이상… 나도 더는 못 하겠어.”

“…….”

“연애해 줘서 고마웠어.”

작은 목소리지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분명히 전달되는 그 목소리에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진을 따라 일어났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형이 이러는 이유 잘 모르겠어요.”

“…나도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

“이제 섹스 못 해서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그게 아니면… 이럴 이유가 없잖아. 좋아해야지. 네가 그토록 바라던 그 포기 내가 해준다잖아.”

다시 돌아서서 나가려는 하진의 앞으로 성큼 먼저 가서 문을 막아선 정우가 손을 뒤로해 문을 잠갔다. 스스로도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요.”

“…뭐?”

“어제 못 한 거 하자고. 나도 어제 하고 싶었어요. 취한 형 건드리기가 좀 그래서 하려다가 만 거지.”

“차정우.”

“하자니까. 지금 거기서부터 화나서 이러는 거 아니야.”

“…너 진짜 내 감정이 우습구나.”

정우 역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평소와 별로 다를 것도 없었고, 술 취한 사람 안 건드리고 멀쩡히 재웠는데 이렇게 극으로 몰려버리니 솔직히 좀 황당했다. 말실수를 한 건 인정하지만, 충분히 사과할 수 있고,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으니까. 지금보다 더한 상황에도 괜찮다고 웃어넘기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솔직히 잘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다시 얘기해요. 형 화난 거 다 풀어줄 테니까 앉아 봐요.”

“…나 화나서 한 말 아니야.”

“그러니까 다시 얘기해요. 화난 거 아니니까. 난 형이랑 정말 틀어지고 싶지 않아요.”

“…내가 우습게 굴긴 했지.”

또 그 소리였다. 정우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고 숨을 뱉어냈다.

“얼마 전까지는 제정신 아니었어. 무려 나랑 연애해 준다는데 고마웠어. 너만 보면 애가 탔어. 네가 먼저 키스해 줄 때마다 네가 날 사랑하는 것 같아서 행복했어.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외면했어. 너랑 계속 그렇게라도 닿고 싶었으니까.”

“계속 그렇게 지내요, 그럼.”

오히려 화가 난 것 같은 정우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던 하진이 마른 입술을 열었다.

“섹스하고 싶으면 말해. 그 정도는 해줄게.”

“뭐라구요?”

“…그거 그냥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거잖아.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형 미쳤어요?”

“네가 나한테 한 말이야.”

하진은 충격받은 것 같은 정우의 눈을 바라보며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너처럼 생각했어. 너한테 그 말 듣는데 미쳤구나 생각했어.”

“…….”

“네가 아니라 내가. 그런 말을 듣고도 네가 좋았거든. 너랑 처음 한 그 섹스도 좋았고, 네가 나랑 할 때 계속 내 얼굴 봐주고, 만져주고, 날 좋아하는 것처럼 흐트러지고… 그게 좋았어. 그래서 나 너랑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어.”

“…….”

“그렇게도 했는데… 앞으로 못 할 거 없잖아. 어차피 너도 그냥 기분 좋아서 하는 거고…. 나도 그러면 되니까 필요할 때 말해.”

“지금 복수하는 거예요?”

복수……. 정우의 말을 숨처럼 되뇐 하진이 시선을 들어 다시 눈을 마주했다.

“조금 슬프네.”

“…….”

“너 정말 모르는구나. 내 감정 자체를… 이해 못 하는 거였어.”

“…….”

“비켜 줘.”

하진이 문을 막고 선 정우를 밀어냈다. 그리 센 힘도 아니고, 밀려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밀리지 않을 힘이었지만, 정우는 밀려나 주었다.

잠긴 문이 열리고 하진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 정우는 뒤돌았다. 하진은 나갔고, 문은 닫혔다. 정우는 지금 제가 겪은 일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정말 모르고 있는 걸까. 아니, 도대체 뭘 알아야 하는 거지. 정우는 닫힌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문을 열지 못했다.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은 정우가 고개를 숙였다. 하진에게 너무 많은 말을 들어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정말 연기라도 하지 그랬어.」

사랑하는 척 연기라도 해야 했던 걸까.

「그랬으면 성의라도 있어 보였을 텐데.」

얼마 전부터 하진에게 한 번씩 보이는 표정과 분위기가 있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거라 마주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방콕에서 애처럼 굴지 말라고 하며 듣기 싫은 말도 들으라던 그 말을 할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차갑게 식어 내려앉은 새벽공기 같은 눈동자와 목소리. ‘지쳤다.’보다 ‘질렸다.’가 더 잘 어울리는 그런 느낌.

이번에도 그랬다. 성의라도 있어 보였을 거라는 말을 할 때의 그 질린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정우는 머릿속을 때리며 빠르게 도는 말들을 하나씩 붙잡아 그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섹스하고 싶으면 말해. 그 정도는 해줄게.」

전혀 감정적이지 않은 목소리.

「…그거 그냥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거잖아.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하진의 온도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온몸을 내던져 휩쓸리지도 않고, 녹아내린 것이 감정을 흠뻑 적시지도 않았다. 그저 하나의 단어일 뿐이었다.

「네가 나한테 한 말이야.」

제가 그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섹스는 저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하진과 섹스했을 때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온몸이 녹아내리고, 이렇게 좋을 수도 있나 싶은 그런 기분. 다음, 또 그다음에도 내내 마찬가지였다. 하진과의 섹스는 끝나고 밀려드는 약간의 죄책감을 빼면 늘 황홀했다.

“…….”

갑자기 그 말에 화가 난 걸까. 아니, 하진은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렇게 녹아버릴 것처럼 키스했는데, 정말 같이 자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짜 연애하는 사람도 안 이런다는 말 때문에?

정우는 여전히 이 상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더 맞았다. 하지만 빠르게 머릿속을 떠다니는 하진의 덤덤하고 뾰족한 말들 중 하나를 잡았을 때, 현실과 정확하게 마주하고야 말았다. 말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우는 그 말을 놓지 않고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맴돌던 말들이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 하나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연애해 줘서 고마웠어.」

하진과의 연애가 끝났다는 그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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