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정말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평소를 생각하면 그 정도 말이야 늘 해왔던 수준이지만, 그래도 하진에게 지금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정말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수였고, 부주의였다.
“…….”
명백한 실수와 함께 묻어 있던 잠도 모두 사라졌다. 정우는 굳게 닫힌 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잔뜩 상처 받은 눈을 했더라면 지금처럼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덤덤한 하진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정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마침 욕실에서 나오는 하진이 보였다.
“형.”
“응?”
저를 보는 눈빛은 또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미 그 말 같은 것은 다 잊은 것처럼 구는 하진을 본 정우가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다시 꺼내 들쑤시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긴 하진은 그동안 이 말보다 더한 말도 듣고 넘겼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말들도 모두 잊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보고 매달리기도 했었다. 한 번 더 들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에요.”
“아, 배고프다. 시리얼 먹을래?”
“…아, 네.”
진짜 연애. 그 말이 뭐라고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신경을 써도 하진이 써야 하는 게 맞는데, 그 반대였다. 정우는 시리얼 볼에 시리얼을 담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는 하진에게 다가갔다.
“먹어.”
“…….”
하진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상처받은 얼굴을 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정우가 우유 속에 담긴 시리얼을 아무렇게나 섞었다.
“어제 나 많이 취했었지. 기억이 중간중간 하나씩만 나는 거 보니 심각했나 봐.”
“많이 마시기는 했어요.”
“어제 술이 정말 맛있었거든. 고생했겠다. 미안해.”
“…별로 고생한 것도 없어요.”
“그래도 미안해. 앞으로 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정우는 내내 하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리얼을 뒤적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하진의 얼굴을 보고 안심을 하면 될 일인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술 때문에 그런지 잘 안 먹힌다.”
“국이라도 끓여줄까요?”
“괜찮아. 아직 속이 울렁거려서……. 좀 더 자는 게 낫겠어. 먹어, 그럼.”
이야기를 하면서도 하진은 정우를 보지 않았다. 정우는 저를 바라보지 않는 하진을 향해 내내 시선을 움직였다. 눅눅해진 시리얼과 우유를 버리고 시리얼 볼을 씻어 정리한 뒤에도 하진은 정우를 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
우유에 늘어진 시리얼을 누르던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리는 하진이 보였다. 정우의 얼굴에 닿아오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따 씻을걸. 어차피 또 잘 건데.”
“형.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나중에 하자. 나 잘래. 자고 싶어.”
“…지금 해요.”
“지금… 하기 싫어서 그래. 나중에. 나중에 하자.”
“나중에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화를 내요. 말을 그따위로 하냐고 화내고, 서운하다고 해요. 감정 얘기 잘하잖아요. 왜 갑자기 다르게 구는데.”
“…….”
어둠 속에서 하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우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참 이상한 마음인데, 나도 다 알고 있고, 내가 너한테도 여러 번 했던 말이고 한데… 그걸 너한테서 들으니까, 직접 들어버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제 그런 말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화가 나고, 서운하고, 밉고 그래야 하는데… 그냥 피하고 싶어.”
“…….”
“…그러니까 나 좀 피하게 해줘. 지금은 피할래. 자고 싶어. 자라고 난리야. 그러니까 나 좀 잘게. 자고 나서… 그때, 그때… 얘기하자.”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지 않은 것 같았다. 정우는 고개를 젓는 하진을 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침대에 올라 벽을 보고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는 하진을 보던 정우가 작게 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그냥 혼자 있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어우, 죽겠다. 어! 어제의 위너 차정우! 진짜 멀쩡하네.”
“어제 저만 살았잖아요.”
“아, 나 분명히 정신 있었는데. 마지막 한 잔이라고 마시는 순간 갔어. 내가 그게 느껴졌다니까. 어, 나 취하네. 취하는구나, 어, 나 취했다.”
취하는 과정을 생생히 말하는 해성을 본 정우가 웃으며 생수를 한 병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해성에게도 내밀었다.
“던져.”
해성이 받기 좋도록 각도를 잘 조정해서 물병을 던져준 정우가 한 손으로 캐치하는 해성을 보고 웃고는 제 물병 캡을 열었다.
“하진이는 괜찮아? 내 기억에 강하진도 꽤 마셨는데. 내가 다른 기억은 잘 안 나는데 하진이가 그 노래 나오면 고개 흔드는 인형처럼 막 고개 흔들흔들하던 건 기억이 나거든.”
“자고 있어요.”
“그래? 기절한 거 아냐?”
“아까 잠깐 깨서 씻었어요.”
“그런데 또 자는 거야? 술에 말렸네, 말렸어. 이게 마실 때는 좋은데 다음 날 아주 죽겠어. 집에 헛개나무라도 키워야지.”
속이 쓰린지 배를 문지르며 거실 소파에 쓰러지는 해성을 본 정우가 식탁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나 좀 피하게 해줘. 지금은 피할래.」
피하고 싶다는 말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하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정우는 닫힌 방문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하진이 상황을 피했고, 저 역시 하진이 피한 상황을 또 피했다. 어디까지 피할 수 있고, 또 어디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알고 싶기도 했고, 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저울질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만 좀 보라고, 계속 그렇게 보고 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 생각이 변하지도 않을 거라고 하진을 밀어냈다. 하지만 하진은 그런 벽을 내내 바라보았다. 잠들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아 무서웠다. 또 전처럼 자고 싶어도 잘 수 없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진짜 연애하는 사람들도 평생이라는 말 안 하잖아요, 요즘.」
짜증이 묻은 피곤한 목소리. 하긴 깨자마자 그런 질문을 들으니 어이가 없고, 짜증 나기는 했을 것이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의 저는 꽤 집요한 면이 생기지 않았는가. 저처럼 굴면 정우가 아닌 그 어떤 사람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
진짜 연애. 언젠가 운명적인 사랑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얼마나 좋으면 첫눈에 반하고, 심장이 마구 흔들리고 그러는 걸까.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할 만큼 온 정신을 지배하는 사랑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막연하기만 했던 그 감정과 예고도 없이 맞닥뜨린 순간, 온통 뚜렷했던 것들 위로 얇고 투명한 막이 씌워졌다.
차정우라는 막은 모든 것을 그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또 다른 것을 하고 있어도 늘 머리와 마음, 눈동자에는 정우가 있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고, 밀어내도 끈질기게 버틸 수밖에 없었다. 버티지 않으면, 매달리지 않으면, 사랑을 멈추면 견딜 수가 없으니까.
연애라는 말 앞에 ‘진짜’와 ‘가짜’가 붙을 줄은 몰랐다. 알고는 있어도 소리 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진짜 연애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다른 관계의 우리. 하진은 눈을 깊게 감으며 머릿속에 맴도는 정우의 목소리를 피하려 애썼지만, 결국 피하지 못했다.
“…….”
상처 받았다. 저도 모르게 한 말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정우 역시 이 상황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에 맥이 풀렸다.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처음으로 의미라는 말에 중심을 두었다. 하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울고 싶은데 아까부터 눈물이 나오지 않아 이상했다.
“…….”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스스로 소리 내는 가짜 연애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 말을 소리 냄으로써 받는 상처의 깊이와 아픔을 알고 있으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정우가 낸 소리는 그 모든 것을 뒤흔들어버렸다. 정말 가짜라고, 그 어떤 희망도 없다고 확인받은 것 같았다.
“…….”
마음이 가라앉았다. 갈가리 찢기며 아플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덤덤했다. 눈물도 나지 않고, 숨이 턱턱 막히지도 않았다. 몸을 일으킨 하진이 닫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저를 돌아보는 정우와 눈을 맞췄다. 그 얼굴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꽉 조여들며 아파 왔다.
“…들어와.”
“…….”
“…얘기하자.”
피할 걸 그랬다고 언젠가 후회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피한다면 더 큰 후회를 할 것 같았다. 하진은 그렇게 제가 선 어둠 속으로 다가오는 정우를 가만히 눈에 가득 담았다.
“안 잤어요?”
“잠이 안 와서.”
“…….”
“전처럼 그런 거는 아니야. 그냥 오래 잤으니까.”
잠이 안 온다는 말에 걱정이 들어차는 눈을 본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의심이 묻은 눈을 바라보던 하진이 블라인드를 움직여 방 안을 밝혔다. 날이 흐려 빛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의 얼굴이 확실히 분간되고 표정까지 보일 정도로 밝아져 다행이었다.
“앉자.”
제 침대에 걸터앉은 하진이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까 하려던 말 먼저 할래?”
“어제… 맞아요. 내가 형이랑 같이 자 준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해놓고 약속 안 지킨 것도 맞아요. 씻고 왔는데 형이 자고 있었고, 술도 많이 취했는데 편히 자라고 그랬어요.”
“…자고 있어도 같이 잔다고 했잖아.”
“형, 나는 형이 어느 정도 나를 이해하고, 포기하는 것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포기?”
“그래요. 솔직히 같이 자 준다고 한 거 그냥 빨리 달래서 재우려고 한 말이었어요. 그 의미가 더 커요. 형 취해서 기억 못 할 줄 알았고, 잘 넘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진은 가만히 정우의 말을 바라보았다. 말에 형체가 생겨 다가왔다. 뾰족한 모양이 된 가시는 말을 감싸고 있는 거품을 너무나도 쉽게 터뜨렸다.
“나도 한다고 하잖아요. 노력하잖아. 내가 노력하면, 형도 하나쯤은 포기하고, 넘어갈 건 좀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노력과 포기. 하진은 눈앞에서 계속 터지는 뾰족한 말의 형체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도 노력하고, 정우도 노력하는데 그 끝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수도 없이 외면했던 그 순간을 이렇게 맞닥뜨릴 줄은 더 몰랐다.
몸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질 줄 알았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또다시 폐허가 된 마음 위로 더 부서질 게 남았다는 듯 뾰족한 파편들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머릿속이 차가웠다.
“…이제 노력하지 마.”
정우를 위해 늘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말을 소리 내버렸다. 아직은 제대로 된 소리라고 하기에 미약한 크기였지만, 그래도 말이 의미를 담아 나와 버렸다.
“이제…… 노력 안 해도 돼.”
“뭐라구요?”
“내가, 내가 포기할 테니까… 노력 안 해도 된다구.”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우가 말하는 노력은 저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 견뎌내는 노력,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 그래서 이 팀을 유지하려는 노력일 뿐이었다.
“…내가 포기할게. 네가 날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도 포기하고… 내가 널…… 사랑하는 것도 포기할게.”
“…….”
“그러니까 이제 노력 안 해도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형.”
“걱정하지 마. 나 안 죽어. 말만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정말 아니야……. 팀에 피해 안 줄 거야.”
하진의 입에서 팀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정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팀 이야기 하는 거 아니잖아요.”
정우의 말에 잠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든 하진이 가만히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고요하고 뭔가 텅 빈 것 같은 하진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정우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