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84화 (84/122)

#84

하진의 몸에 묻은 정액을 닦아낸 정우가 이불을 걷어내고 하진을 바로 눕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마른 몸 위로 이불을 잘 덮어준 정우가 창으로 가 커튼을 쳤다. 밝던 방 안은 금세 바깥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어둠으로 뒤덮였다.

잠든 하진을 한 번 바라본 정우가 맞은편 침대에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매니저 형에게 쉰다고 말을 해두었으니 전화가 오거나 방으로 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공연장에 가기 전까지 쉴 수 있는 시간은 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상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

우울해 보이는 그 얼굴 안 마음속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 걸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게 뭐가 그리 다르다고 사랑이라는 말에 그렇게도 매달리는 걸까. 사랑이면 어떻고, 사랑이 아니면 또 어떻다고.

정우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 친구를 만나본 적이야 있지만, 아이돌 준비를 하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정우에게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꿈을 이루는 데 방해되는 감정. 굳이 필요하지 않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감정.

솔직히 하진이 저에게 원하는 게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간지러운 다정한 행동을 원하는 걸까. 사랑한다는 말? 그냥 그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 걸까.

하진과의 섹스는 좋았다.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진과 몸을 맞대고 있을 때는 솔직히 다른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끝나고 전혀 기쁘지 않은 하진의 얼굴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상적인 것.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얼굴만 봐도 좋고, 같이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한 감정. 하진이 말한 것은 전부 그런 것들이었다. 별것 아닌 너무나도 평범한 것들.

“…….”

저와 하진 사이에도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좋아 힘들어도 웃음이 나고, 내내 붙어 있다가 떨어질 때면 빨리 다시 만나고 싶어 초조해지던 그런 때가.

하진의 말대로라면 그것도 사랑이어야 했다. 사랑. 사랑……. 쉽게도 떠도는 그 말들이 정우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가볍게 지나고 싶고, 무심히 외면하고 싶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봐서 복잡해지는 하진의 감정 같은 것들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저은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지난밤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생각이 전부 다 물에 씻겨 말끔히 사라지기를 바라며.

***

함성이 대단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무를 맞춰 무대를 가득 채우는 아포제를 보며 방콕에 모인 팬들은 열광했다. 두 다리로 제대로 서는 것도 힘들어 보이던 하진은 프로답게 무대를 아주 멋지게 해냈다. 팬들을 향해 웃고 손을 흔들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준비한 곡들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무사히 마친 아포제를 끝으로 모든 가수들이 무대 위로 모여들었다. 흐르는 땀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를 찾아간 정우가 옆에 선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으로 슬금슬금 와서 서는 문혁과 그 그룹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잘 쉬었어? 괜찮아?”

“아, 응. 잘 쉬었어. 어제 미안해.”

“미안하기는. 괜히 몸 안 좋은데 술 마시면 좋을 것도 없잖아.”

팬들의 함성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문혁은 하진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본 팬들은 더욱 큰 함성을 보냈고, 정우는 최대한 굳은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연습했던 것처럼 희망찬 노래를 마지막 곡으로 같이 부른 뒤에야 공연은 완전히 끝났다. 다정하게 팬들을 향해 끝까지 남아 인사를 하고,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낸 하진이 해성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다.

“방콕의 희망 강하진. 진짜 소름인 게 아까 다른 가수들 거의 다 이제 대기실 쪽으로 가고, 하진이만 그 무대 중앙 쪽에서 인사해 주는데, 와… 팬들 눈이 다 하진이한테 몰려서 장난 아니었어. 막 눈들이 다 초롱초롱해. 그냥 보기만 하는데도 다 웃고 있어.”

“나도 봤어. 아까 문혁이가 하진이한테 귓속말하는데 막 스탠딩에 있는 팬들이 막 좋아서 난리가 난 거야.”

“형 모르셨어요? 문혁이랑 하진이 파는 팬들도 꽤 있어요. 진짜라니까요.”

“아, 농담 아니었어?”

“진짜예요. 부동의 1위는 정우하진인데 문혁하진도 은근 있어요. 정문혁이 워낙 애가 사교성이 좋잖아요. 여기저기 치대고.”

답답한 화장을 클렌징티슈로 지워낸 정우가 거울 안으로 대기실 의자에 앉은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해성과 인규의 대화에도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순간 제가 한 생각에 놀란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 별 미친 생각을 다 했다. 하진에게서 시선을 뗀 정우가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가득 빨아들였다. 머리가 아플 만큼 차가운 것이 한꺼번에 들어가자 그제야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사라졌다.

***

한국에서 하는 공식적인 스케줄은 잡지 않았지만, 쉬는 동안 해외 스케줄이 꽤 많이 잡혀 있었다. 해성은 일본 데뷔 싱글 준비를 위해 하루 더 머물지 못하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지창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제대로 놀지도 못했어요.”

“다음에 정규 2집 끝나고 한 번 단체로 오자. 좋네, 여기.”

“와, 까마득하다. 정규 2집 끝나고가 언제예요, 도대체.”

“일본 데뷔 싱글 내고, 한국 미니 하나 내고, 시상식 하면, 2집 준비 들어가지 않겠어? 생각보다 금방이야.”

앞으로 펼쳐질 스케줄을 줄줄 쉬지도 않고 말하는 지창을 보며 고개를 저은 해성이 뒤로 머리를 푹 기대었다. 이 밤에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다니, 내리면 또 얼마나 피곤할까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방콕에 온 가수 중 반 이상은 하루 더 묵고 내일 비행기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중에는 문혁의 팀도 있었다. 정우는 공항에서까지 마주치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공항에서까지 정문혁을 만났다면, 기분이 더러워지다 못해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었다. 공적인 공간도 아니고, 사적인 만남이니 얼마나 달라붙고, 귀찮게 하겠는가. 착하고 사람을 밀어낼 줄 모르는 하진은 문혁의 성가신 행동들을 전부 다 받아줄 것이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공항에는 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포제가 공항 안으로 들어오자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지고 가까이 다가오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호원들과 보안요원들이 멤버들을 감싸며 길을 열어주었고, 멤버들은 입국할 때와 마찬가지로 겨우 그 사이를 빠져나가 출국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둘둘 같이 앉은 좌석이었다. 보통 여유가 있을 때는 좋은 좌석으로 예약을 하지만, 일단 가는 게 중요할 때에는 이렇게 자리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이동하고는 했다.

“창가에 앉을래요?”

“응. 기대고 잘래.”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마스크를 턱으로 내린 하진이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정우는 하진이 앉는 것을 보고 복도 쪽으로 자리 잡았다. 뒤에 앉은 해성과 영우가 바로 게임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 웃음이 났다.

좌석벨트를 하고, 담요를 펼쳐 덮은 하진이 다시 마스크를 위로 올리며 창가로 머리를 기댔다. 정우는 바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하진을 흘끗 바라보았다.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이 들 것이었다. 오전에 그렇게 뒤엉키지만 않았어도 좀 나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자리에 오르고, 비행기가 이륙 준비를 할 때까지 30분 이상이 소요되었다. 정우는 뒤로 반듯하게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한 건 매한가지라 바로 잠이 들 줄 알았는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전에도 극도로 피곤하면 오히려 잠들지 못하고 내내 뒤척였던 적이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이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불이 꺼졌다. 어둠이 찾아들자 어디서인가 작게 들리던 목소리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정우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하진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다. 차가운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게 불편해 보였다. 딱딱해서 아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움직여 창가에 부딪히는 것도 아플 것 같았다.

“…….”

정우는 가만히 손을 뻗어 하진의 고개를 반대로 기울게 만들었다. 창가에 기대고 있던 하진의 머리가 반대로 기울며 정우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어깨 위로 하진의 무게가 내려앉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가볍게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정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진이 깨어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또 어떤 생각을 할까. 어쩐지 하진이 깨어 있다면, 웃어줄 것 같았다. 감긴 정우의 눈꺼풀 속 어둠으로 웃는 하진의 얼굴이 어룽졌다. 빛의 뭉침처럼 아주 밝고, 예쁘게.

***

일본 데뷔 싱글 준비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노래인데, 가사가 일어로 바뀌는 순간 너무나도 낯선 노래로 변해버렸다. 가사를 외우고, 능숙하게 노래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하진은 차라리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진아! 올라가 봐.”

“어, 벌써 저예요?”

“내가 상담하는데 뭐 할 말이 없어서 빨리 끝났거든. 그냥 요즘 난 걱정이 없어.”

“부러워요, 형.”

“얼마나 할 말이 없었냐면, 요즘 최고 고민거리가 뭐냐고 하시는데 내가 일어가 안 외워지는 게 제일 큰 고민거리라고 했다니까. 선생님이 그건 시간과 연습이 해결해 줄 거라고 하셨어. 진짜 간단하지.”

행복하다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도는 해성을 본 하진이 소리 내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담이라는 말에 답답하기도 하고, 선생님을 보기가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번처럼 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괜찮아.”

상담실로 올라가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하진이 작게 중얼대며 마음을 먹었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여전히 저를 보고 다정하게 웃어주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며 그 앞으로 앉았다. 죽고 싶어 약을 먹고 난 뒤 처음으로 하는 상담이었다.

“하진 씨한테는 참 긴 한 달이었을 것 같아요.”

“네. 길기도 하고, 지난 뒤에는 아득하기도 한 시간이었어요.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잘 버티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버티지 못하는 순간이 있어요. 내내 버티다가 부러질 수도 있고, 부러지지 않으려고 내내 휘어지다가 살짝만 바람이 불어도 휘어지기도 하죠. 하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그래도 그 뒤로는 괜찮아졌어요. 이제 잠도 잘 자고, 밥도 먹고, 전처럼 늘 가라앉아 있지도 않고… 약 안 먹어도 되고, 좋아졌어요.”

거짓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부분은 여전히 존재했다. 아무리 상담이고, 편히 다 말해도 된다지만, 연애에 대해서 서운한 부분 같은 것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다행이네요. 하진 씨가 이제 하진 씨 자신에게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저… 자신한테요?”

“네.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하진 씨가 만들 수 있어요. 전 하진 씨가 다른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진 씨의 소리에 집중해서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한 번 다음 상담까지 해 보시겠어요?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 말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틀어지는 관계라면 흘러가는 대로 놔두면서 속이 답답하지 않게 하루하루 살아 보는 거예요.”

멋진 말이었다. 나에게 집중해서 나의 소리에 집중하라는 말에 마음이 울렁였다.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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